씨네꼼

전쟁국가 이스라엘(4) 레몬트리(2008)

- 황진미

2008년에 만들어진 <레몬트리>는 서안지구의 분리장벽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건국과 현재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1948년 1차 중동전쟁으로 팔레스타인 영토의 78%를 장악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추방한 이스라엘은 ‘부재자 재산법’을 통하여 팔레스타인인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모든 유대인은 새로운 이주자로서 이스라엘로 돌아올 권리를 가지며 완전한 이스라엘 시민권을 받는다”는 ‘귀환법’을 통과시킨다. 이로써 아랍인들이 추방된 땅에 유대인들을 정착시켜 유대국가 이스라엘을 건설하겠다는 정책이 완료된다. 1967년 3차 중동전쟁으로 가자와 서안이역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그곳에 유대인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1977년부터는 이주하는 유대인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주어가며 정착촌을 확대시켜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유대국가 건설을 위한 유대인 인구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자 1980년대 말 동구권 몰락으로 경제난에 직면한 하층 유대인 러시아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기근에 빠진 이디오피아의 흑인유대인(팔라샤)들을 수송해오고 계속 정착촌을 건설해나간다. 평화협상이 진행되던 1996년에도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에 새로운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오슬로 협정이행이 중단되기도 하였을 만큼 정착촌건설은 평화협상의 최대 걸림돌이다. 2005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의 투쟁이 격렬해지자, 가자지구의 모든 정착촌을 철수시킨다. 그러나 서안지역의 정착촌 건설과 이주는 계속 확대되고 있으며, 서안지구에 유대인정착촌 건설을 계속하려는 이스라엘로 인하여 최근 오바마 정권의 중재로 재개된 평화협상마저 난항에 빠진 실정이다.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에는 현재 132개의 정착촌에 약 46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 정착촌자체가 서안에서 차지하는 면적은 3%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도로와 팔레스타인인들의 이동제한 등으로 실제로는 서안지역의 40%가량의 땅이 유대인 정착민들을 위해 쓰이고 있다. 유대인정착촌은 사실상 서안지역 내에서 이스라엘의 군사적 전초지 역할을 해왔다. 정착촌의 유대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스라엘은 병력을 주둔시키고 군사시설을 확충해왔으며, 유대인정착민들은 이스라엘군으로부터 지급받은 총기로 무장하고 있다. 2000년 2차 인티파다 이후 2007년까지 5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유대인 정착민들의 총격으로 살해하였다. 유대인정착민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대부분 법적 처벌을 받지 않거나 이스라엘군에 의해 보호되는 실정이다. 여기에 분리장벽이 쌓아지면서 정착촌 지역은 군사 요새화되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가자지역 전체를 포위하는 60Km 길이의 장벽을 세워 가자지역을 지붕 없는 감옥으로 만들었던 이스라엘은 2002년 6월부터 서안지구에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막기 위한 보안성의 자구책이라며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총길이 720km에 이르는 장벽이 서안지역의 그린라인 안쪽으로 파고들며 지그재그로 건설되었다. 분리장벽의 10% 정도는 8-10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으로 인구가 밀집한 도시지역에 세워지고, 나머지는 전기철책 장벽으로 농촌지역에 세워진다. 콘크리트 장벽의 폭은 30m정도를 차지하는데 비해 전기철책 장벽은 보조철책과 순찰로, 참호 등을 합쳐 폭이 100m에 달한다. 장벽이 건설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인들은 땅과 우물을 빼앗기고 집이 헐려나갔다. 여기에 더하여, 정착촌과 정착촌, 정착촌과 이스라엘 지역을 연결하는 광범위한 도로건설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마을이 고립되거나 분할되었다. 도로는 팔레스타인 마을을 에워싸거나 관통하는 형태로 건설되며, 팔레스타인인들은 통행이 제한된다. 도로 양측의 50-75m의 완충지대까지 포함하여, 도로 건설은 상당한 땅이 소요되는데, 분리장벽 건설 때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이를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의 땅을 몰수하고 수천그루의 나무를 뽑아버렸다. 이스라엘은 분리장벽과 곳곳에 설치한 검문소, 도로건설 등으로 마을을 고립시켜 일자리를 잃게 만들고, 교육과 의료 등 필수적인 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만든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농민들의 통행제한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땅을 몰수하거나, 그린라인과 장벽 사이에 놓인 땅을 합병하는 방식으로 서안지역을 침식해 들어가 서안 지역 영토의 14.5%를 이스라엘 영토로 가져가고 있다. 이런 식으로 땅을 빼앗기고 난민이 된 사람들이 2006년 당시 서안지구에만 72,000명이 있으며 지금도 계속 발생중이다.

<레몬트리>는 “Lemon tree is set on both side of the Green line bother between Israel and the West Bank” (레몬나무는 이스라엘과 서안지구 사이에 놓인 그린라인 경계 양쪽 면에 심어져있다.) 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영화가 시작되면 6번 고속도로를 따라 이삿짐 트럭이 달려 이스라엘의 하샤론 지역에 닿는다. 서안지구와 그린라인을 접하고 있는 그곳에 신임 국방부 장관이 이사해온다. 장관의 집은 보안철책을 경계로 서안지역의 레몬농장과 접해있다. 레몬농장은 살마의 것으로, 그녀는 1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들을 출가시킨 팔레스타인 중년여성으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농장에서 50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 농장의 철책선 바로 너머로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이사 오면서 그녀의 악몽이 시작된다. 철책선 바로 위로 감시탑이 설치되고, 감시카메라가 장착되는가하면 레몬농장 안에 들어와 농장을 살펴보던 정보국 직원들이 살마에게 총을 겨누기도 한다. 어느 날 살마는 이스라엘군으로부터 명령장을 발부받는다. 히브리어를 읽지 못하는 살마는 칼킬리아 시내로 남편친구를 찾아가 겨우 명령장의 내용을 이해한다. ‘테러리스트들이 농장을 통해 장관관저를 공격해 올 수 있기 때문에 레몬나무를 잘라내야 하며, 살마에게는 보상을 해 주겠다’는 것이다. 살마는 서안지구의 이스라엘 민정사무소를 찾아가지만, 보상을 해주겠다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말만 듣는다. 살마는 라멜라의 젤라준 난민캠프에 있는 변호사를 찾아가 군사재판을 제기한다. 군사법원에서 이스라엘군 측은 2000년 인티파다 이후 2만여 건의 테러가 발생했으며, 테러조직이 유대인을 괴롭히고 있는 가운데,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이 나무에 가려 장관관저가 위협당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살마 측 변호사는 변변한 변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판결이 내려진다. 이스라엘군은 살마에게 보상할 의무가 없고, 레몬나무를 빨리 베어버려야 하며, 베어질 때까지 철조망을 설치하여 살마의 과수원 출입을 금한다는 것이다. 살마의 집과 농장 사이에는 새로운 철조망이 세워진다. 살마는 자신의 집 바로 앞에 있는 레몬나무가 말라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철조망을 넘어가지만, 번번이 군인들로부터 제지당하거나 총으로 위협 당한다. 살마와 변호사는 라말라에 있는 팔레스타인자치정부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려 하지만,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다. 살마는 법정투쟁을 함께해나가는 젊은 변호사에게 로맨스를 느끼며, 여성으로서의 자신감을 회복한다. 살마와 변호사의 관계는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금세 소문이 나고, 지탄받는 일이었지만, 살마는 주눅 들지 않는다. 레몬농장을 둘러싼 송사는 언론에 알려지면서, 팔레스타인 분쟁의 상징으로 언론의 주목받는다. 장관은 분리장벽 건설에 열을 올리고, 서안지역의 올리브나무 2천 그루를 뽑아버렸으면서도, 레몬나무 송사는 정보국의 조치일 뿐이라며 발뺌한다. 아내는 이중의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몇 번 마주친 살마에게 차츰 연민을 느끼며, 농장에 들어와 마음대로 레몬을 가져가려는 군인들에 맞서는 살마를 보고, 남편의 행위가 가혹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아내는 남편이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였더라도 모두 ‘우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믿어왔지만, 그러한 믿음이 점차 흔들린다. 마침내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진다. 살마는 농장의 레몬나무 절반만 30cm높이로 잘라내라는 판결로 절반의 승리를 거둔다. 장관의 아내는 자신이 손수 꾸민 집을 버리고 남편을 떠나고, 레몬농장과의 경계였던 철책이 콘크리트 장벽으로 바뀐 답답한 집안에 장관 홀로 남는다.

<레몬트리>가 배경으로 삼는 지역은 서안의 칼킬리아주(州)로 서안에서 수자원이 가장 풍족한 곳으로 기름진 농업지역이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이스라엘 정착촌이 자리 잡았고 1967년 전쟁으로 서안을 점령한 직후에는 칼칼리아의 팔레스타인인을 모두 추방하려는 계획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 초반 주택부장관이었던 아리엘 샤론은 서안지역 경계에 인접한 정착촌을 건설하고, 그린라인을 따라 남북으로 종단하는 6번 고속도로의 건설을 구상하였다. 2000년에 개통된 6번 고속도로에 가장 근접한 서안의 도시가 칼칼리아 시이다. 오슬로 협정으로 칼킬리아주는 다시 A, B, C지역으로 분할되는데, 이스라엘이 직접통치하며 13개의 이스라엘 정착촌이 있는 C지역이 가장 넓게 분포하는 가운데, 부분적인 자치가 허용되는 25%의 B지역과 완전한 자치가 허용되는 2%의 A지역이 점점이 섬처럼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조각조각 구획된 각 지역을 통과하려면 곳곳의 검문소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주민들의 이동은 제한되었고, 수자원을 둘러싼 분쟁 또한 끊이질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칼킬리아는 2000년 2차 인티파다에서 최초로 교전이 벌어진 곳이 되었으며, 이후 서안 중 최초로 분리장벽이 세워진 곳이 되었다.

영화는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이 가장 첨예하게 결집되어 있는 칼킬리아의 레몬농장과 철책을 마주한 이스라엘 국방장관의 폭력과 위선을 분열을 보여줌으로써 전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의 핵심을 그려내고 있다. 50년 된 팔레스타인의 농장 옆으로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이사를 오고, 그들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팔레스타인의 땅 안쪽으로 철책이 만들어지고, 그 철책으로 인해 농민이 자기 농토에 들어갈 수 없어 농토가 버려지고, 버려진 그 땅은 이스라엘이 합병해나간다. 대법원심의에서 50년간 정성스럽게 농사를 지은 농장이라는 살마 측 변론에, 장군 측 변호사가 농장의 토양을 채취하여 농사를 제대로 짓지 않아 황폐해진 땅이라고 말한다. 농민의 이동을 차단한 다음 버려진 땅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장관의 집들이를 위해 군인들이 살마의 농장에 들어와 무단으로 따가며 이에 항의하는 살마에게 체포하겠다고 위협하는 장면이 나온다. 대법원 심의장면과 이 장면을 통하여 영화는 분리장벽의 건설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땅을 합병해나가는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현재 분리장벽으로 갈갈이 찢겨진 진 서안의 이곳저곳에서 실제로 저런 일들이 무수히 벌어진다. 장벽 건설경로의 80%가량이 그린라인을 넘어 서안지구 안쪽으로 파고들어오며, 그린라인과 장벽사이에 놓인 땅에서 자라는 올리브 나무 등은 이스라엘 것이 되거나 내버려져 망가지고 있다. 영화는 살마의 경우는 비교적 나은 편이며, 서안지역의 장벽건설 등으로 인한 토지나 주택의 몰수가 비일비재하며, 대부분 보상도 없이 이루어지는데다, 이스라엘 정부를 대상으로 소송을 거는 일은 극히 드물고, 부분적이나마 승리를 거둔 일이 최초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변호사는 법정에서 분리장벽(이스라엘에서는 보안장벽이라 부른다)이 국제법 위반이라는 점을 계속 주장하지만, 그때마다 이스라엘 측은 보안에 따른 조치라는 예외적 단서조항을 일깨운다. 2004년 국제사법재판소는 이스라엘의 장벽건설이 국제법 위반이며, 장벽건설 중단과 이미 건설된 장벽 해체, 피해주민에게 보상하라는 의견을 낸 바 있다. 유엔 총회에서에도 장벽철거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지를 기반으로 장벽건설을 계속 강해하고 있다. 영화는 살마를 통하여 오늘 날 서안지역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느끼는 분노와 절망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히브리어를 말하거나 읽지 못하는 살마에게 히브리어로 총을 겨누는 이스라엘 군인이나 히브리어로 된 집행명령장은 식민지인에게 닥치는 제국주의 폭력과 다름없다. 가난한 서안의 농업지역 바로 옆에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유대인 정착촌이 건설되고 정착촌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원래부터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은 큰 도로나 장벽 건설을 위해 땅을 빼앗기거나 자기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을 겪고 있으며, 유대인들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항시적으로 무장한 군인의 감시를 받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유대인 정착촌이란 점령촌에 다름 아니며, 정착민은 점령민에 다름 아니다. 이 과정은 넓게 보면 팔레스타인 땅에 시오니스트들이 이주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한 역사와도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그들은 2천년 이상 아랍인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자본주의적인 부와 제국주의적인 무력을 앞세워 땅을 점거하였으며, 이후 자신들의 안보를 빌미로 무수히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이고 내쫓았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당시 팔레스타인 마을이 파괴되고, 인구의 2/3 가 죽거나 난민이 되어, 팔레스타인 사회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이후 난민이 된 그들의 땅은 일명 ‘부재자 재산법’을 통해 몰수되어 유대인들의 키부츠가 건설되었다. 국방장관 역시 그 역사를 알고 있다. 그는 살마의 농장에 대한 자신의 행위를 “이 땅의 역사의 일부이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시오니스트들이 건국 이전부터 자행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영화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대립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두 진영 내부의 균열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야세르 아라파트 초상이 벽에 걸려있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바브다는 이유로 살마의 법적 투쟁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며, 팔레스타인 내부 사회는 이슬람 여성의 정조와 추문에 더욱 관심이 있다. 이들은 살마에게 죽은 남편의 명예를 훼손한다며 가부장적인 억압을 행한다. 이스라엘 역시 국방장관으로 대표되는 강경파가 주를 이루지만, 이외에 “좋은 이웃이 되기를 원했다”고 말하며 자신들의 지나친 조치로 마음이 불편한 다소 온건한 아내가 존재한다. 그녀가 “우리에겐 한계가 없는 것 같다”고 한 말이 신문에 크게 실리는데, 이는 ‘한계는 있다’는 뜻을 지닌 이스라엘의 전쟁노선에 항의하는 유대인 모임 ‘예시 그불’ (Yesh G’vul)의 존재를 직접 가리킨다. ‘예시 그불’은 1982년 레바논 침공에 반대했던 이스라엘 예비군들이 점령지에서 일어난 투쟁을 탄압하는데 참여하지 말라는 청원에 600명이 서명함으로써 결성된 단체로, 이들은 점령지역에서 근무하는 것을 거부한다. 또한 여기자 게라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사안을 보도하는 중립성을 보인다. 그리고 이스라엘 공무원이지만 살마를 이웃으로 알고 지낸 유대인 제이콥은 세 번 등장하는데, 처음엔 정보국직원에게 레몬농장이 위험하지 않다고 말해주고, 중간에는 살마에게 이스라엘 정부와 법정투쟁을 하는 것을 만류하지만, 마지막엔 그녀의 대법원 가는 길이 검문에 의해 막히자 길을 뚫어준다. 이처럼 영화는 두 개의 진영이 단일한 덩어리로 뭉친 채 서로 대립하는 단순한 구도로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때로 내부적인 분열을 겪으며 상대 진영과 교섭과 미약한 형태나마 연대가 이루어지기도 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심경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람은 장관의 처이다. 그녀는 장관의 아내이자 사회의식을 갖춘 세련된 전문직업인이지만, 남편을 매우 사랑하며 “남편이 진심으로 아랍인과 사이좋게 살고 싶어 했다”고 믿었지만, 레몬농장의 사건이 “내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려버렸다”고 말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바가 뿌리 채 흔들리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마지막에 그녀는 장관의 곁을 떠난다. 영화가 목표로 하는 지점이 아마 여기일 것이다. 영화는 강경 시오니스트들이 아니라, 장관의 부인처럼 테러리스트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보호받기를 원하기에 이스라엘의 정책에 크게 반대하지 않고 살아왔지만, 자신들의 안보를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똑바로 보고, 그들도 나와 같은 인간이며, 그 자리에 자신을 대입해보는 방식을 통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무도한 국가폭력으로부터 한 걸음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2002년 6월 장벽건설이 시작될 당시 이스라엘인의 69%가 장벽건설을 지지했으며, 서안지대 유대인정착민들은 처음에는 장벽건설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정착촌의 영토가 이스라엘로 합병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지지로 돌아섰다. 여전히 대다수의 이스라엘 시민들이 장벽건설을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막기 위한 보안책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들은 장벽건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그 자체로 엄청난 국가폭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지 않은 채, 이웃으로 평화공존하기 위해 장벽을 통한 분리가 두 집단 모두에게 안전하고 불가피한 조치라고 생각하고 있다.

영화 내내 감시탑의 이스라엘 병사가 풀고 있는 심리테스트 문항이 들려온다. 감시병은 이중으로 갇혀있다. 그는 감시자이지만 동시에 하루 종일 첨탑에 갇혀있는 신세이고, 알쏭달쏭하면서도 공허한 문답의 틀에 사고가 갇힌 채 무조건 상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가 감시탑에서 내려와 살마를 대면하는 순간 언어가 통하지 않음에도 이름을 교환하고 대화가 시도된다. 그의 행동은 곧바로 저지당하지만, 이후 살마가 철창을 넘어 레몬농장에 들어오는 것을 곧잘 묵인한다. 말장난에 가까운 형식논리의 문답을 깨고 이처럼 타자를 직접 대면하는 것은 놀라운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장관의 아내가 철창을 사이에 두고 몇 번의 마주침을 경험하고, 스스로 두 개의 철창을 넘어 살마의 집 앞까지 가서 살마의 우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녀는 지금껏 믿어왔던 세계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운다. 영화는 타자를 대면하는 것을 통해, 우리의 갇힌 인식이 바뀔 수 있음을 촉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마지막, 홀로 남은 장관이 콘크리트 장벽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블라인드를 치고 앉아 있는 모습은 이러한 대면성이 완전히 폐절된 가장 불행하고 가장 절망적인 상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 장벽은 타자에게 폭력이 될 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타자에 대한 공포로 가득한 감옥을 제공할 것이다. 저 보이지 않는 콘크리트 벽 뒤에서 언제 로켓포가 날아올지 몰라 그는 더더욱 많은 보안장비를 갖추어야만 할 것이고, 그 안에서 고독과 불안과 공포의 지옥을 맛볼 것이다.

맺으며

한국에서 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관심은 그리 크지 않다. 이스라엘의 군국주의적 팽창과 미국의 대 중동기지로서의 역할이 분명하였던 70년대 한국의 박정희 정권은 국민들에게 이스라엘을 대대적으로 찬양하였다. ‘국민 학교’에서부터 유대민족의 근면, 용기, 애국심 등을 본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교육되었다. 키부츠를 통해 사막에서 옥토를 건설하였다는 전설(사실은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 빼앗은 과수농지)은 새마을 운동과 조국 근대화의 구호가 되었고, 주변 아랍국의 공격을 물리치는 ‘작지만 강한나라’의 이미지는 북한을 비롯하여 공산국가의 침공을 막아내야 한다는 반공이데올로기와 군사주의 강화에 활용되었다. 동구권붕괴와 중동평화회담 시기를 거치면서 차츰 이러한 냉전적 사고틀은 종식되어 갔지만, 60-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고 보급되었던 할리우드의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무의식 속에 각인 시킨 ‘세계에서 가장 핍박받는 피해자=유대인’의 이미지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로인해 인종주의, 민족주의, 식민주의, 제국주의 등 20세기 세계를 재앙에 빠뜨렸던 이데올로기의 압축판이자, (나치즘과 홀로코스트의 결과라기보다) 나치즘의 유사판본에 해당되는 시오니즘과 이를 추구하는 이스라엘(그리고 전 세계 유대인 로비단체)에 대한 비판을 마치 역사적 반유대주의에 동조하는 것인 양 오인하여 반감을 느끼는 사람들까지 있다. 2001년 911사태와 이후 국내의 파병 문제를 거치면서 중동문제에 대한 관심이 촉구되고 국제연대운동에 대한 필요성이 언급되었다. 2003년 2월 국내에서 큰 규모의 이라크 반전집회가 일어난 후 다양한 반전행동들이 나타났지만, 여전히 친이스라엘적인 미국과 서구 언론들에 의해 걸러진 외신을 접하는 한계 등으로 인해, 중동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소수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미국의 대 중동 전초기지이며 중동평화의 걸림돌이라는 인식을 어렴풋이 갖고 있지만, 냉전종식 후 악의 근원인양 이해되는 테러리즘을 자행하는 이슬람 과격단체들의 주장과 행동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 대다수이며, 이러한 인식은 2004년 김선일씨 피살사건과 2007년에 있었던 아프가스탄의 윤장호하사 사망사건과 샘물교회 아프가니스탄피랍사건 등 복잡한 진폭을 가진 문제들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여기에 국내 보수기독교 진영에서는 여전히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의 땅으로 이해하며, 이스라엘 건국은 하나님의 역사이자 팔레스타인 이교도의 죽음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들에게 이스라엘은 성지순례의 장소이자, 중동에서 서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모범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미국의 맹방이며, 또한 (광복절 구국기도회에서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흔드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의 맹방은 자동으로) 한국의 맹방이기도 하다. 과거 반공이데올로기와 친연성을 보였던 보수기독교가 자연스럽게 (정치적으로는 친미, 종교적으로는 반(反)이슬람의 입장에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깊이 공감하는 것이다.

기독교 내부의 입장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911이후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가 근본주의화하면서 ‘크리스천 시오니즘’이 퍼지기 시작하였는데, 그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권 하에 있는 한국 기독교에도 ‘크리스천 시오니즘’이 확산되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 예수 재림의 1단계이며, 이스라엘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회개함으로써 천년왕국이 도래한다고 믿는다. 미국 기독교 내 ‘크리스천 시오니즘’은 미국의 중동정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항구적인 이스라엘 지배를 지지하고 두 국가 평화정책을 반대하기 때문에, 가자와 서안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과 유대인 정착촌의 건설을 찬성하고 지원한다. 또한 예수 재림을 위해서는 일단 ‘열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모여야 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이민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이들은 80년대 후반 구소련의 유대인들과 에티오피아 유대인의 이민을 도왔으며, 2010년 여름에만 해도 미국, 영국, 캐나다 등으로부터 3,000명의 유대인 이민을 돕고있다. 올해 초 한국에서 이스라엘과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한국영화 한편이 개봉되었다. 김종철 감독의 <회복>은 이스라엘에 존재하는 약 15,000명의 ‘메시아닉 주(기독교를 믿는 유대인)’들이 정통 유대교인들의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모습을 담은 기독교 영화이다. 영화는 ‘메시아닉 주’ 뿐 아니라 이들을 공격하는 정통 유대교인들의 주장도 담고 있지만, 전체적인 내레이션은 이스라엘 건국이 천년왕국의 도래를 예비하는 징후이며, 그곳에서 예수를 죽였던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역사라고 이해하는 ‘크리스천 시오니즘’의 종교적 믿음을 담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지니는 콘텍스트적 맥락은 묘한 점이 있다. 국내관객의 입장에서 기독교와 유대교간의 피 튀기는 2천년 역사를 다 알지 못하고, 그저 20세기 이스라엘과 미국의 동맹관계에 의해서, 또는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기독교의 관점을 통해서 갖고 있었던 이스라엘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여지없이 깨져나간다. 영화의 결론은 이스라엘의 기독교 선교를 위해 기도하자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폭력이 이슬람을 향해서만 행해진다고 믿었던 국내의 일반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기독교와 예수를 향해 퍼붓는 이스라엘 유대교인들의 폭력은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회복>은 전형적으로 ‘크리스천 시오니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텍스트이지만, 이스라엘 관련 자료를 거의 접해보지 못한 국내관객들에게는 아주 드물게 반(反)이스라엘 정서를 (그것도 보수 기독교도들에게) 불러일으키는 텍스트이다. <회복>의 제작진은 이어서 팔레스타인인들 중 이슬람교도의 핍박을 받으며 기독교를 믿는 ‘팔레스틴 크리스천’들을 다룬 영화 <용서>를 제작하였으며, 11월 개봉예정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국내 진보진영의 관심이 활발하지 못한 가운데, ‘세계복음화에 앞장서는’ 한국기독교회는 대단히 공세적으로 이 지역의 유대인과 무슬림들에게 기독교를 선교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의 소수자 격인 기독교도들 간의 연합을 통해 양측의 화해 불가능한 갈등의 해소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 역시 관심을 가질 사안일 것이다. 그러나 <회복>에 등장하는 정통유대교인들(하레디)은 전체 유대인구의 10%에 불과하며, 이들 역시 병역을 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취업에서 배제되어 유대인 집단 중 가장 빈곤한 계층을 형성하는 소수자들이다. 유대인들 중 무신론자인 사람도 드물지 않으며, 이스라엘은 건국하였던 시오니스트들조차 종교적 가치에는 별 관심이 없는 세속 유대인들이었다. 즉 이스라엘은 유대교를 내세우고는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매우 세속화된 국가이며, 유대교는 시오니즘이라는 극우적 국가이데올로기의 명분으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레바논에 기독교 정권을 세우고자 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이스라엘은 기독교와 얼마든지 연합하여 왔다. 따라서 이스라엘 내부에 기독교인들이 많아진다고 해서 팔레스타인분쟁해결에 어떤 도움이 될지 기대하기 어렵다. 더구나 ‘크리스천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유대인의 땅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분쟁의 핵심이 되는 땅 문제와 난민 귀환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으며, 유대교와 이슬람 양측의 종교를 더욱 근본주의화 시켜 종교적 갈등을 증폭시킬 우려가 있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비슷한 점이 많다. 세계체제의 변방에서 2차 세계대전 직후 1948년 건국과 더불어 전쟁을 겪었으며 오늘날까지 평화공존에 이르지 못한 국제분쟁지역이며, 냉전시대부터 대테러전쟁 시기까지 미국의 군사적 전초기지 역할을 해왔고,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바탕으로 미국식 자본주의를 이식 발전시켰지만, 안보논리로 무장한 극우세력의 집권으로 높은 군사비와 징병제를 유지하는 군사주의 사회가 꾸려져왔으며, 그 결과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가 훼손당하였다. 순혈민족주의로 인해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정책이 고수되고 있으며, 1987년과 2000년이라는 비슷한 시기에 정치적 격변을 맞은 것도 공통적이다. 물론 항시적 전쟁국가인 이스라엘의 모순과 긴장이 남북한의 그것보다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시아의 양쪽 끝에 놓인 두 지역의 문제가 미국의 안보전략이라는 큰 틀 안에서 서로 연루되어 있다는 점이다. 2006년 이후 중동문제가 첨예화되면서 미국이 북핵문제에 공세를 강화할 여력이 없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지역의 평화는 상호 연동되고 길항하는 관계이다. 팔레스타인의 평화문제에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곧바로 한반도의 평화를 앞당기는 매우 실리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틀렸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그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에, 저녁에 죽고 말고 할 것이 없다. ‘그 자체가 죽음’인 이유는 도를 들은 이후의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나와 같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전의 나는 죽은 것이 된다. 진실을 아는 것도 이와 같다. 진실을 알고 난 이상 이스라엘의 잔학한 행위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으며, 더 이상 애매한 양비론에 휘둘릴 수가 없다. 세계인의 두뇌가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무수한 교류가 사건을 낳는 시대에, 진실을 알고자 묻고, 뒤지고, 그렇게 알아낸 진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행위는 그 자체가 실천이다. 그런 행위들이 무수한 접속을 거쳐 실질적인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음을 믿는다. 이 글 또한 그러한 행위의 산물로써, 접속을 통하여 더 많은 실천자들과 만나 변화를 촉발시키는 작은 티끌이 되기를 염원한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