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존재 투쟁의 시대

- 고병권(수유너머R)

이 글을 쓰는 오늘 현재,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한 지 22일입니다. 제 자신은 ‘상식’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현대차가 이들 노동자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새삼 ‘상식’을 확인해두고 싶어집니다.

2007년 7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파견법에 따르면 파견 기간 2년이 넘은 노동자의 경우 원청업체는 그 노동자를 직접 고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자동차는 이 노동자들의 사용자는 자신들이 아니라 도급 계약을 맺은 하청업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파견법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거죠. 하지만 작업장을 가보면 바로 알 수 있답니다. 실제로 노동자의 작업 배치를 결정하고 근무상황을 파악하는 건 현대차이고, 일도 독립된 업무를 떼어준 것이 아니라 정규직과 그냥 섞여서 하고 있다는 걸 말이지요.

사실 옥신각신 할 것도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빤한 상황이니까요. 현대차만이 아니라 많은 제조업체들이 숙련도 높으면서 고용 비용 낮고 언제든 해고 가능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법적으로 쉽지 않으니까 겉모습만 도급 계약인 것처럼 위장하지요. 그냥 다 아는 이야깁니다.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회사관계자들도 다 알겠지요. 다만 불법을 내놓고 저지를 순 없으니까 법리를 교묘히 따지며 우기는 거지요. 한마디로 상식과 맞짱을 뜨는 겁니다.

그런데 지난 7월 대법원에서 상식을 확인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실제 사용자가 현대차라는 거지요. 그리고 2년 이상을 고용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원청업체, 즉 현대차의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판결이니 사안이 일단락 됐을 거라는 게 상식이죠. 그런데 현대차는 다시 법리 논쟁을 하며 이 상식과 맞짱을 뜹니다. 대법원의 판결도 결국에는 파기환송심을 거쳐 확정돼야만 효력이 인정된다며 법원 결정을 따르지 않습니다(헌법소원을 내기도 했지요). 그리고는 재빨리 하청업체를 폐업시켰습니다. 그럼 이 하청업체의 노동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노동자가 폐업한 업체 대신 새로운 업체와 근로계약을 맺으면 다시 2년을 채워야 하는 ‘리셋’ 상태가 된다는 군요. 2년 주기로 리셋은 계속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구적 비정규직이 된다는 말입니다. 확정 판결까지 좀 기다리지 그러냐구요? 그렇게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답니다. 새로운 업체와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으면 아예 일자리 자체를 잃을지도 모르니까요. 사인을 하면 정규직 길을 포기해야 하고 사인을 하지 않으면 직장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죠.(<국민일보 12. 6>)

공장 점거 노동자들의 심정이 짐작 되십니까? 현대차의 몰상식이 가장 큰 원인이겠습니다만, 이런 몰상식적인 일은 결코 현대차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청년유니온의 김영경 위원장은 저희에게 보낸 글에서 7-80년대 노동상황과 지금 중 어느 것이 나은지 잘 모르겠다는 말을 진지하게 던졌습니다. 예전엔 어용노조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예 노동조합 설립자체를 막고 있”다는 겁니다(청년유니온에 대한 소개는 위클리 21호 ‘청년유니온의 존재’를 참조). 민주노총도 합법화된지 언젠데 설마 정말이겠냐구요? 일단 청년유니온의 경우엔 사실입니다. 노동부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청년유니온의 노조설립신고를 계속 반려하고 있으니까요.

삼성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인류 문명사에서 노동조합 설립이 자유롭게 된 지 언제인데 삼성은 ‘무노조경영’이라는 황당한 원칙을 세웠습니다. 삼성일반노조의 김성환 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달력을 확인하지 않으면 이게 어느 시대 이야긴지 헷갈릴 겁니다. 몇 년 전 저도 <한겨레>에 ‘삼성이 누군가’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요. 노조설립이 합법이고 설립 의사를 가진 노동자들이 존재하는데 삼성에서는 노조를 설립할 수가 없습니다. 노조설립신고를 하러 가면 어떤 유령들이 와서 먼저 신고서를 접수해버립니다. 그러면 이제 노조를 설립하려 했던 사람들이 유령처럼 실재성을 잃어버리지요. 뿐만 아닙니다. 노조설립을 하려는 노동자들의 휴대폰은 ‘누군가’ 감청하고 온갖 회유와 압박을 해옵니다. 하지만 이 ‘누군가’를 고발하면 검찰이나 경찰은 유령같은 이 ‘누군가’를 알 수 없다며 수사를 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누구나 알 수 있는데 이상하게 신고만 하면 삼성은 유령이 됩니다.

법과 제도로는 모든 것이 충분히 보장된 것처럼 보입니다. 언론은 자유롭게 진실을 보도할 수 있고 시민단체도 목소리를 얼마든지 낼 수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매년 총력투쟁을 자유롭게 선언합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고 자신들을 조직화하는 게 이렇게 어려울까요. 노조설립의 자격이 있고 노조설립의 의사가 있어도 온갖 이상한 이유가 동원되고 각종 행정 조치들이 개입해서 그 자격과 의사는 결국 없는 것처럼 되고 맙니다. 법원에서 다투는 일도 어렵지만, 유리한 판결을 받아도 도무지 시행되지가 않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이 모든 권리는 ‘존재’하는 사람의 것인데, 이들의 경우엔 존재가 부인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없는 사람’ 취급 당하는 거죠. 분명히 2년간 현대차 사람으로 일했는데 그걸 부인당하는 겁니다. 분명히 노조설립의 의사가 있고 자격이 있는데 그걸 부인당하는 겁니다. 제가 보기엔 청년유니온의 김영경 위원장과 삼성일반노조의 김성환 위원장의 요구는 같습니다. 역시 이번호에 글을 주신 재능노조의 오수영님의 요구도 그렇습니다. 바로 존재를 인정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노동자이고 우리 모임이 노동조합임을 인정하라는 거죠. 현대차의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거기서 2년 일한 파견노동자임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이들의 난입과 점거는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몸짓인 셈입니다. 작년 용산에서 사람들이 화염에 휩싸여 죽을 때 누군가 말했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사람이 있음을, 아니 그 전에 철거민도 사람임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거기서 지난 몇년 몇십년을 살아왔음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이주노동자들도 그렇지요. 티셔츠 가슴에 이런 문구가 새겨진 걸 봤습니다. ‘우리는 유령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미등록이지만 여기서 엄연히 여기서 일하며 살아가는 노동자임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바야흐로 존재 투쟁의 시대입니다. 우리가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그들에게도, 우리 서로에게도 알려야만 하는, 지금은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응답 1개

  1.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솔잎향, 박재민. 박재민 said: 일독을 권합니다. 수유너머의 글이네요 "존재 투쟁의 시대" http://bit.ly/ihEtR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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