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데이

너, 네 몸 알아?

- 매이아빠

어느 정신분석학자의 육아일기: 매이데이


지난 토요일 매이가 좋아하는 언니네 집에 가는 차 안이었다. 한참 언니네 집에 가면 뭐 할 건지 조잘거리던 매이가 조용해졌다. 덕분에 아내랑 연평도 사건 등 시사에 대한 갖가지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매이가 갑자기 “매이, 졸린 것 같은데? 졸릴까, 말까?” 라는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응? 매이 졸려?”하니까,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더니 십초도 안 지나서 스스르 잠이 들었다. 우와 놀라와라. 별일 아니지만 자기 몸 상태에 대한 자각능력을 보이다니, 놀라운 변화가 아닌가. ‘졸음’의 징조를 파악하고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은 상당한 진화 임에 분명했다.

두 돌때까지 매이는 졸리면 그냥 울었다. 배도 부르고 똥도 쌌는데 왜 울까 싶으면 졸려서 그런다고 생각해도 된다. 졸리면 왜 울까 이상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하다. 사지가 둔해지고 눈이 무거워지는 등 몸의 활동력이 떨어지면 불쾌할 수밖에 없다. ‘이게 뭐지? 내 몸이 왜 이러지? 몸이 말을 안 들어. 움직이고 싶은데 잘 안 움직여져. 어떻게 된 거지?’ 어른은 그 ‘졸음’의 징후를 감미롭게 느끼기도 하지만, 아직 제 몸에 대한 통제력과 자각능력을 갖추지 못한 아이로서는 그 ‘이상’ 징후가 당황스럽고 불쾌할 수밖에 없다.


두돌이 지나면서부터는 졸리면 짜증을 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짜증을 내는 식이었다. 나더러 그림을 그리라고 해 놓고는 그게 아니다, 왜 그렇게 그렸냐, 왜 매이 말을 안 듣느냐, 급기야 때리며 소리를 빽 질렀다. 예민한 아내는 매이가 괜한 트집을 부린다면 화를 내고 둘이 토라져 다투는 일도 꽤 있었다.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 소파에 뒹굴어져 잠에 곯아떨어진 매이를 보고, “아 졸려서 그랬구나, 애구 우리 매이, 착해서 괜히 때쓰는 일은 없는데…엄마가 미안해.”하며 다독였다. 그렇게 학습이 된 결과 매이가 평소와 달리 짜증을 내면 “매이야, 졸리지? 잘까?” 하고 물어보지만, 매이는 잠에 골아 떨어지기 전까지는 “아니!” 하며 더 화를 더 내곤 했다. 그런데 이제 스스로 졸음의 징후를 알아채고, “나, 졸리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니, 대단한 성장이다.


졸음의 자각보다 더 재미난 건 배뇨징후의 관찰이다. 몇 달 전부터 유나랑 놀다가 ‘쉬’ 마렵다며 화장실 갈 때 이상한 짓을 했다. 유나랑 손잡고 화장실로 뛰어 가면서 “뛰면 안 마려워” 하고, 멈춰 서서는 “서면 마려워” 하기를 반복한다. 처음엔 그냥 장난치는 줄 알고 안아서 화장실로 뛰어가곤 했는데 최근에는 집에서도 그런다. 거실에서 화장실로 가는 중에 가만히 서더니. “가만히 있으면 쉬 마려운데, 걸어가면 안 마려워” 그런다. 아내한테, “왜 이러는 거야?” 물었더니, 뛰거나 걸으면 회음부를 가로지르는 근육들이 수축하면서 요도괄약근을 조이게 되어서 오줌이 안 마렵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화장실 앞에 줄서 있다가 이따금 급하면 제자리에서 종종걸음을 치는 것도 같은 이치라고 한다. 자기 몸을 가지고 생리적 자극을 조절할 수 있다는 걸 자각하고 흥미로워 하는 매이의 모습이 귀엽고 흥미롭다.

슬슬 걱정되는 건 성적인 자극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거다. 이쯤 되면 클리토리스에서 성적 자극을 느낄 때인데 매이가 어떤 말로 표현할지 그러면 어떻게 답해 주어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네살 접어들면서 매이는 “똥꼬”(매이는 자기 외음부를 여전히 똥꼬라 부른다)에 관심을 많이 보인다. 자꾸 뭐가 들어갔다며 물티슈로 닦으려고 하거나 민망하게 다리를 쫙 벌리고 앉아 고개를 숙여 들여다 본다. 유연하기도 하다. 실제로 개털이 뭍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 것도 없는데, 자꾸 가렵다며 손으로 만지고 물티슈로 문지른다. 자연스런 분비물도 더러운 게 있다며 닦아내려 하고 간지럽다면서 칭얼댈 때는 좀 난감하다. 가까이 가서 입으로 훅 불어주기도 하고, 팬티를 입혀서 오물이 안 들어가게 해주려고 하는데, 혹시 외부의 자극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성적 자극 때문에 간지러운 게 아닐까 싶다. 아내는 조심스럽게 “매이야, 똥꼬 간지러워요? 이렇게 닦아주면 시원해요? 기분 좋아요?” 라고 물어보면, “아니” 라며 알듯 모를 듯 쉬크한 대답을 한다. 아내는 성기를 만지는 매이에게 “안돼요, 손으로 똥꼬 만지면, 아파, 벌레가 들어갈지 몰라, 손으로 긁으면 점점 더 가려워져요” 라고 말린다. 아내는 위생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지만, 나는 그 말이 프로이트 책에 흔히 나오는 거세공포의 발언처럼 매이에게 들리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된다.

자기 몸을 알고 타인의 몸을 아는 건 애나 어른이나 어렵다. ‘그래피티 사건’으로 세 번째 경찰 조사를 받고 온 날 밀린 설거지를 하고 TV를 보며 아내를 기다리는데, 웬일인지 자꾸 울음이 북받치는 것이다. 서러울 것도 없고 억울한 것도 없는데 가슴에서 치밀어오는 울음을 억누르느라 심장이 벌렁거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집에 온 아내한테 “나, 이상해. 우울증세 같은 게 있어” 라고 말했더니 “그러지마. 내가 잘해 줄게” 했다. “그러지 마”란 말에 터질 것 같았지만 쪽 팔려서 꾹 참았다. 다음날 아침 연구실에 와서 아무도 없는 세미나실에서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펑펑 울었다. 그랬더니 시원해졌다. 울음은 ‘슬픔의 표현’이 아니라, ‘막힘의 터짐’임을 깨달았다. 조사 받느라 몸도 마음도 너무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자신의 신경질이 대부분 몸상태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마감 닥친 원고를 쓰느라 밥도 먹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거나, 이따금 ‘멀고 먼’ 강남(아내는 코엑스가 지구의 끝이라도 되는 양 느껴진다고 한다)에 시사회 갔다 왔다며 피곤해할 때, 갑자기 집구석은 더럽고, 자기는 외롭다며 재난스러워한다. 어떨 때는 ‘삶’과 ‘인간관계’와 ‘사랑’에 대한 총체적인 회의와 불만족을 터뜨리지만, 내가 밥을 해서 먹고나면 1-2시간 만에 다시 기력을 찾아서 장황한 시사문제를 꺼내곤 한다. 결국 몸의 문제라는 걸 자신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자신을 잘 조절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삶의 변화와 관계의 변화를 위한 실천이 동반되어야 한다.

알지만, 참, 어렵다. 옛날에는 인생 고민하는 여자후배에게 “배고프냐?” “돈이 필요하지?” “연애를 해봐. 아님, 등산을 하든가” 라며 가볍게 충고했지만, 이젠 그런 시건방진 얘기도 못하겠다. 앞으로 매이가 자기 몸의 변화에 대해 더 많이 자각하고 많은 말을 할 텐데, 걱정이다. 나도 못하는 걸 매이한테 충고할 수도 없고. 자식이 있어 좋은 건 자식으로 인해 자기 삶을 되돌아볼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매이 때문이라도, 매이와 함께, 자기 몸을 알고 잘 관리하는 노력을 키워나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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