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사랑하는 나의 손녀 로사에게.

- 김융희

겨울방학이 가까워지고 있구나. 이번 방학이 끝나면 너는 6학년이 되는 게지. 초등학교 입학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리 되었구나… 초등학생이 되면서 너는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참 자주 하더니, 차츰 차츰 한 학년씩 오르면서 전화질이 점점 줄어들어, 5학년이 된 지금은 너의 목소리를 듣기가 정말 가끔이구나. 그러니 이제 6학년이 되면, 할아버지는 너의 목소리도, 모습도, 거의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2,3학년 때만 해도 너는 곧잘 전화를 해서 “할아버지, 보내주신 책을 벌써 다 읽었어요. 책 안보내 주세요? 지금은 읽을 책이 없어 심심해요.”라면서 책 주문으로 할아버지를 다구치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 책 주문도 뜸해져 버렸구나. 그런 로사가 조금은 섭섭했다만, 그 때마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우리 로사도 인제는 커서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겼구나. 그래서 친구들과 즐겁게 놀며 지내고 있어서, 책과 할아버지 생각에 관심이 좀 멀어졌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동안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로사가 궁금하였지만 너를 믿으며 꾹 참고 지내왔다. 네가 부반장까지 되어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맘 때는 남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며, 친구들과도 잘 어울려 지내는 것이 어찌보면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더 바람직스러운 좋은 일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너의 소식을 알려 주는구나. 요즘 네가 산수 실력이 떨어져서 엄마가 밤 늦게까지 너의 산수공부 지도를 해주고 있다는 말을 너의 어머니로부터 들었다는구나. 사실인지는 몰겠다만, 어떻든 너의 소식도 궁금하였고, 또 이런 소식을 듣고서 그냥 넘길 수가 없구나. 오랫동안 그점 저점 잘 되었다 싶어, 이처럼 너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다.

로사야. 엄마와 함께 보충 수업을 하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거나, 공부를 하며 책을 읽고 있거나, 할아버지는 그런 문제로 너에 대한 관심이 없다. 학생은 해야할 의무가 공부하는 일이며, 그 공부는 먼저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부터 배우는 교과 위주의 공부가 제일 중요하겠지. 그러나 학교 수업이 중요하다고 너무 학교 공부만 고집하는 것을 할아버지는 결코 바라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우리가 먹는 음식물로 밥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밥이 중요하다 하여 밥만을 먹고 지낼수는 없는 것처럼, 공부도 학교 공부만 고집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외의 다른 음식물도 밥 못잖게 중요하듯, 다른 공부들도 학교공부 못잖게 중요한 것이다. 또한 밥도 쌀로 지은 밥이 있지만, 밀가루로 차린 주식도 있고, 감자가 주식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보리밥도 있고, 콩을 넣어 지은 콩밥이 있는 것처럼, 학교 공부도 국어 사회 산수 음악 과학 미술처럼 여러 가지가 있어 제각기 모두가 나름으로 필요하다. 더구나 여러 가지 공부가 있는데, 그 모두를 네가 다 함께 잘 할 수 만은 없지 않겠니.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학생인 너는 학교를 위주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지만, 꼭 학교 공부에 포함되지 않는 공부, 즉 관찰 경험 실험등의 일도 있고, 좋은 동화나, 옛날 이야기, 세상일들을 적은 많은 책들이 있음으로, 그런 책도 골라 읽어야 하며, 공부뿐 만이 아닌, 친구들과 함께 미술관 관람도 하고, 고궁도 다녀보며, 때로는 집안 청소도 하고, 어머니의 일손도 도와주면서 생활을 하는 것도 네가 해야할 아주 중요한 일들이다. 해야할 일이 이리 많은데, 또 공부까지 네가 모두 잘 해야 된다는 것이 무리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네가 모두 잘 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그것은 자기 능력을 모르고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는 짖이란 생각이다. 물론 너의 산수가 조금 미흡하여, 보충 공부로 네가 어머니와 함께 노력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자기의 능력이 부족하면 누구의 도움을 청하여서라도 더욱 노력하여 체우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꼭 그리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지나친 관심은 항상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할아버지는 해본다.제일 중요하다는 학교 공부도 그 많은 여러 공부를 다 잘 할 수는 없지 않겠니?

아직은 이해력이 부족한 네가 알아듣기는 좀 어려울 것 같아서 할아버지는 매우 안타깝다만, 늘 말했던 여러 재미있는 책 많이 읽으며, 친구들과 잘 어울려 즐겁게 지내는 일이, 어쩜 학교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그 당부를 꼭 기억하기 바란다. 전에는 전혀 듣지 못했던 너의 보충 수업 이야기를 새삼 듣게 되었다. 새 해에 네가 6학년이 되면서, 곧 중학교를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너의 엄마가 네게 더욱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엄마가 너의 보충 수업을 돕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할아버지는 걱정을 한 것이다.

옛날엔 방학이 되면 방학을 하는 날“즐거운 겨울방학”이라는 책을 과제물로 나누어 주면서 긴 방학을 즐겁게 보내도록 했었는데, 지금도 그 책이 계속 나오며, 과제물 없이 너희들에게 즐거운 방학을 보내라고 권하는지 잘 몰라 궁금하구나. 가끔 신문이나 티비에서 보면, 방학이면 너희에게 계속되는 입시 공부, 한원 공부를 학교도 집에서도 너무 강요하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여 우려된다는 말을 듣고 있다.

할아버지 때에는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공부보담 가사를 도웁는 일을 하였다. 그렇지 않음 때로는 심한 꾸중과 함께 벌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변하여 오직 공부만을 강요하며, 그것도 상급학교를 가기위한 학교 공부만을 요구하는구나. 그런 나름의 이유가 있겠다.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은 역시 좋은 것이다. 그러나 밥이 좋다하여 밥만 먹을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고루 충분히 먹어야 건강에 좋은 것처럼, 공부도 여러 가지가 필요함을 알리는 할아버지의 말임을 네가 이해하기 바란다.

로사야, 오늘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하기가 좀 힘들지. 어찌 너 뿐이겠니. 편지를 보며 너의 엄마의 또 한 번 심한 투정이 나에게 있을 것이다. 너를 잘 못 가르쳐 자식 버린다는 불평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의 모든 친구들은 좋은 성적을 위해 학원을 다니며, 과외를 하며 야단들인데, 과외도 시키지 않는 네게 학교 공부가 꼭 중요하지 않다는 나의 주장이 말이 되느냐는 불만인 것이다. 네 엄마의 말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너의 엄마는 네가 잘되기를 바라는 엄마 욕심이 많기 때문이며, 경험이 더 많은 할아버지는 사람다운 삶이 더 중요하더라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란다.

로사야, 오늘 너에게 너무 어려운 말로 글을 써서 참 미안하다. 요즘 할아버지는 열심히 복잡하고 힘들게 살고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는 만화처럼 가벼운 글을 쓰고 있거든. 많은 공부도 한 그들에게 꼭 네가 이해하는 말만 골라서 쓸 수만은 없지 않겠니. 그래 네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었을지도 몰겠다. 힘들었어도 이해하렴.

그리고, 방학을 하면 모든 것 다 제외하고 곧 시골의 할아버지집으로 달려 오너라. 그럼 꽁꽁 언 추운 날씨에도 썩썩 끓는 따끈한 방에서 많은 책 잔뜩 쌓아두고, 나와 함께 고구마를 깍아 먹으면서, 재밋는 책을 눈이 시리도록 읽고 또 읽자꾸나. 그러다가 눈이라도 펑펑 내리는 날이면 흰 눈을 이고 있는 잣나무 숲의 토끼를 찾아 모이를 뿌리며, 미끄럼도 타며, 쌓인 눈을 모아 사람이 귀한 곳에 눈사람을 많이도 만들자구나. 네가 좋와하는 재동이도 눈이 오면 신이 난단다. 겨울 방학이 기다려 진다. 내일부터 추위가 닥친다는구나. 감기 조심하여라.

응답 1개

  1. 지나가다말하길

    손녀분이 꼭 이 편지를 읽었으면 좋겠네요. 자꾸만 입시교육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아이, 자꾸만 목소리마저 멀어져가는 소녀를 기다리는 할아버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학교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엄마, 시골과 도시, 과거와 현재, 학교와 들판 사이의 간격이 따뜻한 정서 속에서 느껴지는 글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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