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삽질의 종말 – 역사의 비극적 반복에 대해

- 오항녕

광해군 시대를 모른다?

올 초, <조선의 힘>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의 책을 냈을 때, 예상치 못하게 어떤 분이 간단히 서평을 해준 적이 있다. 같은 전공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가져준 것이 감사했고, 아, 이런 분들까지 내 책을 보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정말 글을 조심해서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경각심을 갖게 된 데 감사했다. 특히 조선시대를 다룬 책이었기 때문에 메타-역사나 학제적 해석이 필요한 대목을 간략히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점을 지적하면서 오류나 비약을 바로잡아 준 데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이메일로나마 전했다.

그런데 그 비평에서 아쉬웠던 것은 그 분이 ‘광해군대가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데 왜 핵심이 되는 시대이자 주제인지 잘 모르고’ 내 책을 비평했다는 점이다. 기실 이 말이 겸사(謙辭)가 아니라 정말이라면, 내 책을 비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마치 춘추전국시대를 고려하지 않고 공자와 맹자를 논하는 것과 같고, 다윈을 모르면서 진화학(進化學)을 설명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통상 학계에서는 광해군대를 전후하여 조선은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란을 염두에 두기도 하고, 사회경제적 변화를 염두에 두기도 한다. 정치세력의 변화, 즉 본격적인 사림정치의 전개를 염두에 두기도 한다. 이에 따라 시기구분에는 약간의 편차가 있지만, 조선 후기를 곧 해체기로 비정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인조반정을 통한 광해군대의 전복이 곧 식민지로 귀결되는 조선의 패망으로 연결된다는 시각이다. 이제 조선은 무려 3백 년 동안 망해가는 지루한 과정을 거치게 될 운명이 되었다.

그리고 ‘혼군(昏君)’이라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인식과는 달리, 광해군은 ‘민족 통일’을 위한 귀감이자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마저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인물로 평가되기 시작하였다. 남북한 역사학계가 함께, 또 보편적이고 민주적인 역사인식을 가졌거나 다소 수구적이고 기득권 중심의 역사인식을 가졌거나 막론하고, 또 교과서든 대중서든 전문연구서든 가리지 않고 고르게 재평가를 받으며, 광해군은 복권, 부활하였다.

그런데 그 화려한 부활에는, 당색의 재연, 어설픈 근대주의와 진보사관, 실용주의를 빙자한 기회주의, 왜곡이 수반된 결과론, 순환론, 물타기, 사실 왜곡, 해석을 가장한 자의적인 추측, 감상주의, 패배주의 등등이 참으로 다채롭게 버무려져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내가 ‘주의=ism’이란 표현을 이렇게 많이 써보기도 처음이다.) 그리고 다시 각 요소는 서로 다른 요소의 근거가 되면서 재생산, 강화되고 있었다. 앞으로 ‘역사를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는 학습 자료로 전혀 손색이 없는 샘플이었다. 오죽했으면 점잖은 내가 ‘역사왜곡의 종합선물세트’라는 표현을 썼을까.

모든 민란은 정책과 연관

공무원을 지낸 경력 때문인지, 아니면 그런 관심 때문에 공무원을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정책에 관심이 크다. 정책의 실패는 곧바로 국민에게 피해를 준다. 세금도 낭비되고, 민심이 불안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존심도 상한다. 특히 어렵게 사는 노동자, 농민들일수록 그 타격은 더 크다. 흔한 오해 중의 하나가 정책, 특히 재정/경제 정책을 과소평가 하는 것이다. 300조가 넘는 예산의 쓰임새를 우습게 보는 일이다. 역사를 보면, 모든 민란은 세금과 상관이 있다. 재정 개혁은 가장 근본적인 개혁 중의 하나이다.

3년 전(벌써 3년이나 지났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흘러나온 몇몇 말을 들으며 ‘앞으로도 그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내심 그것이 나의 ‘망령된 생각’이길 바랬다. 그리고 결국 촛불로 이어진 한미 FTA를 보면서, ‘이 정권은 정말 애당초 국정에 대한 ABC조차 기대할 수 없는 정권이라는 절망감이 나를 덮치고 있다.’고 썼다. 그리고 이어진 한미 FTA 재협상(김종훈 한국측 단장이 아니라고 우기는!)과 2011년 예산안 날치기 통과, 그 예산안에서 속속 드러나는 ‘결식아동 급식보조 등을 닥닥 긁어 4대강으로 퍼붓기’ 기조를 보면서, 다시 광해군을 떠올린다.

삽질 군주의 적통(嫡統), 광해군

광해군의 궁궐 공사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 소개한 책에서 얼개를 밝혔으니만큼 여기서 상론하지는 않겠다. 간단히 요약해보자. 먼저 궁궐공사의 규모. 인경궁은 인왕산 아래 사직단 동북쪽이고, 경희궁(경덕궁)은 현재 신문로에 위치해 있었다. 경희궁이 1,500칸, 인경궁이 5,500칸이었다. 잘 비교해보자. 임진왜란 전에 경복궁이 700칸이었다. 경희궁과 인경궁을 합하면 조선의 정궁(正宮. 法宮)인 경복궁보다 무려 10배나 큰 궁궐을 새로 지었던 것이다. 이 통계는 당시 다른 기록과도 일치한다. 광해군은 경복궁도 중건할 계획이었다.

이러다보니, 재정이 부족하였다. 조달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에게서 거두는 것이었다. 이른바 ‘결포(結布)’를 거두었다. 토지에 원래 정해진 세금 외에 다시 세금을 부과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지을 때의 사례에 따라 1결의 토지에서 1포를 거두었다. 그러면 당시 재정에 비추어 궁궐 공사비용은 얼마나 되었을까?

영건도감에서 3개월 동안에 쓴 것을 살펴보니, 들어간 쌀이 6,830여 석이고 포목이 610여 동이었으며, 당주홍 600근의 값은 포목 60동이었고, 정철(正鐵)이 10만 근에 이르렀으며, 각종의 다른 물품도 이와 비슷하였다. … 쌀과 포목은 한계가 있는데 공사는 끝날 기약이 없어서, 백성들의 골수까지 다 뽑아내었으므로, 자식들을 내다 팔았으며, 떠도는 자가 줄을 이었고, 굶어죽은 시체가 들판에 그득하였다. 심한 경우에는 왕왕 목매어 죽는 자도 있었다.(<광해군일기>권116, 9년 6월 25일(무오))

이들 궁궐의 공사비용을 위의 자료에 근거하여 계산해보았다.

① 쌀 6,830여 석 + 포 6백 동[≒7천 석(1동=50필, 1필≒3-4두(1석≒4필), 50필≒12석)] ≒ 1만 3천여 석.
② 정철 10만근은?[정철 1근에 쌀 1두 7승, 쌀 1석 ≒ 8근] ≒ 1만 2천여 석.
① + ② ≒ 2만 5천여 석. 이것이 석 달 동안의 비용이니까, 한 달 비용 ≒ 8천여 석.

복잡한 거 빼고, 적게 잡아도, 1년에 4만여 석에서 9만 석 정도가 궁궐 공사비용이었다. 당시 호조에서 거두었던 전세(田稅)가 연간 8-9만석이었다. 그것도 광해군대가 아니라, 양전(量田)을 거쳐 형편이 나아졌던 인조대의 통계이다. 결국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폐위될 때까지 전체 예산의 15-25%를 궁궐 짓는 데 썼다. 어때, MB! 광해군의 스케일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 족탈불급(足脫不及)이 아닌가?

정말 왜 그랬을까?

임진왜란 전후 국가에서 거두어들일 수 있는 전제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실제 전결(田結. 농사짓는 실제 땅)의 총수는, 임란 이전 113만 결에서, 계묘 양전(癸卯量田. 선조 36. 1603)에는 29만 결로 줄었다. 광해군 폐위 후에 있었던 인조대의 갑술 양전(甲戌量田. 인조 12, 1634)에서야 89만 5천여 결로 회복되었다. 광해군 즉위 당시 중앙정부가 운용할 수 있던 전결의 규모는 전쟁 전의 26%, 인조대의 32% 수준이었다. 자, 이런 상황에서 즉위했다면, 나라도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을 것 같다. 그렇다. 재정의 정상화이다. 양전을 해서 소득에 따라 세금 받고, 세금포탈 막고, 불요불급한 재정지출 줄이고!

그런데 광해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꾸로 갔다. 궁궐 건축을 두고 ‘왕권의 강화’를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 이런 짓들 많이들 한다. 진(秦)나라 말기 머슴으로 있다가 농민반란의 지도자로 부상했던 진승(陳勝)은 왕위에 오른 뒤 제일 먼저 궁궐부터 짓고 친구들을 불러 구경시켰다. 이 바보는 진시황이 이미 지어놓은 아방궁(阿房宮)을 쓸 줄도 몰랐나보다. 창덕궁을 한사코 쓰지 않으려던 광해군처럼.

혹자는 광해군이 실업을 해결하고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공공근로사업을 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아마 1998년 IMF사태 이후 실업을 해결하기 위해 시행했던 사업을 떠올렸나보다. 그러나 공공근로사업은 3,400억 전후의 예산이었고, 자재비 등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70% 이상 직접 임금의 형태로 지급되는 복지예산의 성격을 띠었지, 토목공사에 들어간 돈이 아니었다.

그 뒤 좀 더 생각할 필요가 있는 사료를 발견했다. 우선 광해군 즉위년 11월에 강원도 인제 현감(麟蹄縣監) 이경조(李慶祚)가 백성들을 괴롭혀 2백 주(株)에 이르는 목재를 실어다 권력 있는 신하들에게 ‘귀염을 사고자’ 여러 곳에 나누어 보낸 일이 어사에게 적발되었다. 궁궐을 짓는 데는, 구운 기와, 토목 자재 및 석재, 대장간에서 쓸 숯, 단청에 쓰일 재료 및 정철(正鐵)·새끼줄·생칡 등의 물품이 필요하다. 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목재, 석재, 철이었다.

실제로 사관(史官)은 “궁궐을 세우는 토목 공사를 하게 되자, 어떤 사람은 재목을 바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동철(銅鐵)을 바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초석(礎石)을 바치면서, 밖으로는 권력 있는 신하나 총애 받는 신하와 도모하고 안으로는 궁금(宮禁)과 통하여 높은 품질(品秩)을 멋대로 차지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미천한 종들까지도 모두 수령이나 장관(將官)뿐만 아니라 귀한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당시에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석(石)·도적(盜賊)·호표(虎豹) 관원이라고 기롱했다.”고 적었다.

이쯤 되면, 광해군의 궁궐공사를 다른 시각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권력 있는 신하’와 ‘궁금(=궁궐. 왕실)’이 궁궐 공사에 들어가는 자재와 상관이 있다는 점이다. 궁궐공사 커넥션이 작동하는 느낌. 건설회사나 자재회사가 없는데 누가 그 물량을 조달하겠는가. 바로 저들이 궁궐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 상납 받든지 자체로 조달하여(내수사) 납품하고, 호조에서는 그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는 커넥션. 왕실과 권력자가 결탁된 대규모 공사.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그러니까 이미 궁궐이 있는데 왜 또 짓느냐는 항변은 의미가 없다. 궁궐이 필요해서 짓는 게 아니라, 궁궐 짓는 게 필요해서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대강 살리기가 대운하다, 아니다는 중요한 게 아니다. 4대강이든 대운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공사를 한다는 게 중요한 거다. 그렇기 때문에 MB가 4대강 살리기는 대운하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4대강 살리기는 대운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차이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공사를 한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15년, 그 끝은?

반정 직후, 궁궐 공사를 즉시 중단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세금을 추징하며 횡포를 부리던 조도사 김순(金純), 지응곤(池應鯤) 등을 처벌했다. 영건도감, 나례도감(儺禮都監) 등 난립했던 12개 도감도 혁파하였다. 조도성책(調度成冊. 특별 세금 징수대장)을 소각하는 한편 민간에 부과되었던 쌀과 포를 탕감해주었다. 인조 즉위 후 탕감한 세금이 당시 전세 1년 수입인 원곡(元穀) 11만 석이었다. ‘반정’은 말 그대로 사람들이 ‘정상적인 생활[正]로 돌아가는[反]’ 과정이었다.

조선 사회와 사람들은 광해군 15년 동안의 시간을 ‘잃어 버렸다.’ 정작 ‘잃어버린 시간’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민생회복, 사회통합, 재정확보, 군비확충, 문화발전 등 어느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이 오히려 그 반대로 흘러갔다. 반정을 통해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파탄 난 민생과 재생산구조를 회복시키고, 깡통조차 남지 않은 재정을 정상화하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야 했다. 거기에 북쪽 후금에 맞서 국방도 챙겨야 했으나, 이미 군기시에는 창 하나 칼 하나 만들 쇠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 15년을 잃지 않았다면, 동아시아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조선 사회가 임진왜란의 경험을 허투루 버려두지도 않았을 것이며, 사회 안정과 생산력 제고는 자강의 질과 수준을 높였을 것이다. 사림의 헌신적인 리더십과 인민들의 발랄한 생활력이 만나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문화를 아름답게 꽃피웠을 것이다. 역사학자로서 끝으로 한 마디 달자면, 광해군의 부활은 이명박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아니, 이명박의 등장은 광해군의 부활과 무관하지 않다. 이번에도 나는 내 생각이 ‘망령된 생각’이었으면 좋겠다. 망령된 생각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어차피 광해군을 따라하면 그 끝은 쫓겨나는 외길일 뿐이니까.

응답 3개

  1. 학생말하길

    어찌하면 좋을꼬, 이를……
    서민들은 더 힘들어지겠네요.

  2. 지나가다말하길

    금융위기 에프터쇼크, 유럽에서 시작된 재정위기, 대규모 토목공사, 물가폭등 = 반정! 광해군에 대한 정확한 평가도 좋았지만, 지금 상황과 너무나 겹치는 분석, 탁견이십니다.

  3. 고추장말하길

    참으로 무서운(^^) 글이네요! 반정의 냄새가 폴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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