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우리 난민들 (1943년 1월) – 한나 아렌트

- 적린

우선, 우리는 우리를 “난민”이라고 부르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새로 온 사람” 또는 “이주자”라고 부른다. 우리의 신문은 “독일어를 쓰는 미국인”을 위한 신문이며, 내가 아는 한에서는, 히틀러가 처형한 사람들, 난민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사람들이 만든 모임은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다.

난민이란 자신의 행위나 정치적 의견 때문에 피난처를 찾아야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글쎄, 우리가 피난처를 찾아야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별다른 행위를 한 적도 없고, 대부분은 급진 정치적 견해를 가질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이제 “난민”이란 우리처럼 빈털터리로 새로운 나라에 가서 난민협회의 도움을 받을 처지에 놓인 불운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이 전쟁이 발발하기 전, 우리는 난민이라는 명칭에 대해 훨씬 더 민감했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이주자라는 점을 입증하려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스스로의 자유의지가 선택한 나라로 간 사람이라고 선언했으며, 우리가 처한 상황은 “이른바 유태인 문제”라고 일컬어지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맞다. 우리는 “이주자” 혹은 “새로 온 사람들”이었고, 어느 화창한 하루, 살던 곳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적절치 않아서, 혹은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살던 나라를 떠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삶을 구축하길 원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삶을 새로 구축하려면 강인하고 낙관적일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우 낙관적이다.

분명 우리의 낙관주의는 존경할 만하다. 우리 스스로에게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마침내 우리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고향을 잃었다. 친숙한 일상을 잃은 것이다. 우리는 직업을 잃었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제법 쓸모가 있다는 확신을 잃은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잃었다. 자연스러운 반응, 단순한 몸짓, 꾸밈없는 감정 표현을 잃은 것이다. 우리는 폴란드의 게토에 친척들을 버려두고 떠났으며, 가장 친한 친구들을 강제수용소에서 죽게 내버려 두었다. 사생활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출되자마자 (또 우리 대부분은 여러 차례 구출되어야만 했다)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구해준 이들이 들려 준 좋은 충고를 가능한 한 충실하게 따르려 노력했다. 사람들은 망각하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우리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빨리 망각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나라가 새로운 고향이 될 것이라는 점을 친근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4주, 미국에서 6주를 보낸 후, 우리는 프랑스인 혹은 미국인 행세를 하려고 했다. 우리들 중에서 좀 더 낙관적인 이들은 예전의 삶 전체가 일종의 무의식 속 유형지로 옮겨갔다고 말을 보태면서, 진정한 고향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는 새로운 나라만이 가르쳐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옛 일을 망각하라는 충고를 들을 때 우리가 가끔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옛 이상은 우리의 사회적 기준 자체가 문제될 때면 보통 내버리기가 힘들다. 하지만 우리는 언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다고 한다. 낙관론자들은, 딱 1년만 지나면, 영어를 모국어만큼이나 능숙하게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2년이 지나면 영어가 가장 능숙한 언어가 될 것이라고 엄숙하게 맹세한다. 독일어는 거의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언어가 될 것이다.

우리는 더 효율적으로 망각하기 위해, 거의 모든 유럽 국가가 경험했던 강제수용소 혹은 억류수용소를 암시하는 것은 전부 다 피하는 편이다. 새로운 조국에서는 아마 비관론 혹은 자신감의 결여로 해석될 것이다. 그뿐인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들어 왔던가. 지옥은 이제 종교적 믿음이나 환상이 아니라 집, 바위, 그리고 나무만큼이나 현실적이다. 현재의 역사가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이 새로운 인간은 적들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구금되었고, 친구들에 의해 억류수용소에 구금되었다.

우리는 서로에게조차 이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신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하는 우리만의 고유한 방법을 찾아냈다. 사람들은 모두 계획을 세우고 소망을 갖고 희망을 갖는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인간 일반적 태도를 논외로 하면, 우리에게는 보다 과학적인 방식으로 미래를 처리한다. 그만큼이나 큰 불운을 겪었기에 권총만큼이나 확실한 길을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불확실성을 남겨둔 채 지상을 떠나 천상으로 눈길을 돌린다. 히틀러가 언제 패배할 것인지, 우리가 언제 미국 시민이 될 것인지를 알려 주는 것은, 신문보다는 별들이다. 우리는 별들이 우리의 친구들을 다 합한 것보다도 더 믿을 만한 조언자라고 생각한다. 후원자와 언제 점심을 먹으면 좋을지, 그리고 우리의 현재 삶을 따라다니는 무수히 많은 설문지들 중 하나를 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오는 날이 언제일지, 우리는 별들로부터 그 답을 배운다. 우리는 때때로 별들조차 믿지 못하고 차라리 손금 혹은 필적에 나타난 징표들에 의존하곤 한다. 정신분석학은 유행이 지났지만, 정치적 사건들보다는 우리의 소중한 자아들에 대해 더 많이 배우는 것이다. 상류층 숙녀와 신사들이 지루함을 달래려 어린 시절에 저지른 정겨운 잘못을 이야기하던, 좀 더 행복했던 시절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귀신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살에 소름이 돋게 만드는 실제의 경험인 것이다. 이제는 과거에 매료될 필요가 더 이상 없다. 과거는 현실에 충분히 신들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공공연히 말하는 낙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래의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마술적 기법들을 총동원한다.

밤마다 어떤 기억과 어떤 생각들이 우리들의 꿈속에 자리를 잡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차마 그 점을 물을 수가 없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낙관론자에 가까웠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따금씩, 우리가 최소한 밤에는 죽은 이들을 생각하거나 한 때 사랑했던 시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닌지 상상하곤 한다. 나는 심지어 서부 해안에 있는 우리 친구들이 우리는 야간 통금 시간에 “시민 후보”인 것만이 아니라 “적군 이방인”인 것은 아닌지 믿게 할 만큼 이상스러운 생각들을 가졌어야만 했던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낮에는, 물론, 우리는 “기술적으로는” 적군 이방인이다. 모든 난민들은 이 점을 안다. 하지만 그런 기술적 이유 때문에 어두운 시간에 집을 나서는 것이 금지된다면, 기술성과 현실성의 관계에 대해 어두운 견해를 갖지 않기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다. 우리의 낙관론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 우리들 중에는 이상한 낙관론자들도 있다. 낙관적인 말을 매우 많이 한 뒤 집으로 돌아가 가스를 틀거나 짐작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마천루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주장하는 활기의 토대에는 위험한 죽음의 예견이 잠복해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삶은 최고의 선이며 죽음은 가장 큰 실망이라는 확신 속에서 길러졌으나, 죽음보다 더한 공포의 목격자이며 희생자가 되었다. 삶보다 더 높은 이상을 발견할 수는 없는 채로. 따라서 죽음이 우리로부터 공포를 빼앗아 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동력으로 만들 수 있는 의지도 능력도 없게 되었다. 싸우는 대신, 혹은 맞받아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려 없이, 난민들은 친구 혹은 친척들에게 죽음을 기원하는 데 익숙해졌다. 우리는 누군가가 죽으면 죽음으로 인해 덜게 된 그 모든 고생을 즐겁게 상상하곤 한다. 결국 우리들 중 많은 이는 자신 또한 그런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을 바라면서, 그 기대에 따라 행동하고 삶을 마감한다.

1983년 이래 –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이래 – 우리는 유창한 낙관론이 얼마나 빨리 말을 잃은 비관론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아 왔다. 우리의 상태는 시간이 가면서 더 나빠졌다. 한층 더 낙관적이 되었고 한층 더 자살에 이끌렸던 것이다. 슈슈니크(K. Schuschnigg – 히틀러의 합병에 저항했던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정권 아래 있던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은 그만큼 활기찬 사람들이었다. 모든 공평무사한 관찰자들은 그들을 존경했다. 사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그들의 깊은 확신은 사뭇 놀랍다. 하지만 독일군이 나라를 침공하고 비유태인 이웃들이 유태인 가정에서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은 자살하기 시작했다.

다른 자살과는 달리, 우리의 친구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어떤 설명, 어떤 고발도 남기지 않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이 최후의 날까지 활기찬 모습으로 말하고 행동하도록 강요했던 세계에 대해 어떤 비난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편지는 관례적인 것으로 의미 없는 서류들이다. 따라서 장례식 날 읽는 애도사는 짧고 당혹스럽고 매우 희망차다. 동기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에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다지 인기 없는 사실들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더한층 나쁜 것은, 내 논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현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것으로는 유일한 논변을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숫자들. 유태 민족이라는 것의 존재를 맹렬하게 부인하는 유태인들조차 숫자와 관련된 한에서는 상당한 가능성을 보여 준다. 범죄자인 유태인은 소수이며 상당수의 유태인이 전시에 훌륭한 애국자로 죽어간다는 점을 입증할 방법이 달리 또 어디에 있겠는가? 유태 민족의 통계적 삶을 구하려는 그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모든 문명화된 민족 중에서 유태인이 가장 낮은 자살률을 보인다는 점을 안다. 나는 이제 이 수치가 더 이상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매우 확신하지만, 그 사실을 새로운 숫자로 증명할 수는 없다. 대신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는 증명할 수 있다. 이는, 두개골의 측정치가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정확히 알려준다거나, 범죄 통계가 민족 윤리의 수치를 정확히 알려준다는 점을 단 한 번도 믿어 본 적이 없는 회의적인 영혼들에게조차 충분할 것이다. 어쨌든, 유럽 유태인들은 세계 어떤 곳에서 살건 통계 법칙에 맞게 행동하지 않는다. 자살은 베를린이나 비엔나, 부다페스트나 파리에서처럼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 가운데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 같은 곳에서도 발생한다.

다른 한편으로, 게토나 강제수용소 자체에서 발생한 자살에 대해서는 보고가 거의 없다. 사실 폴란드에서는 극소수의 보고만이 있었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강제 수용소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구르(Gurs)의 수용소, 내가 시간을 좀 보낼 계기가 있던 그 곳에서, 나는 자살에 대해서는 단 한 번 밖에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집합적 행동 제안이었고, 외견상으로는 프랑스인을 괴롭히려 하는 일종의 시위였다. 우리들 중 일부가 우리는 어떤 경우에든 “터질 듯(pour crever)” 이송되었다는 것을 주지시켰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갑자기 삶에 대한 거친 용기로 돌변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의견은, 사건 전체를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불운으로 해석할 여지가 남아 있다면, 비정상적으로 반사회적이며 일반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고, 한 개인의 삶 역시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끝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삶으로 돌아오자마자, 겉보기에는 개인적인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었고, 절망과 종이 한 장 차이인 이 미친 낙관론으로 다시 한 번 전향했다.

우리는 비종교적 유태인으로서는 최초로 처형당했다. 그리고 우리는 극단에서만이 아니라, 자살로서 대답한 최초의 유태인이었다. 어쩌면 인간 자유 최후의, 그리고 지상의 보증서는 자살이라고 가르침을 주었던 철학자들은 옳았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 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창조할 자유는 아니지만, 삶을 버리고 세계를 버릴 자유가 있었던 것이다. 경건파 유태인들은 분명 이 부정적인 자유를 깨달을 수 없다. 그들은 자살로부터 살인을 감지해 낸다. 즉, 인간이 절대 이뤄낼 수 없는 파괴, 창조주의 권리를 방해하는 것. “주님께서 주셨고 주님께서 가져가신다”(Adonai nathan veadonai lakach). 그리고 그들은 이 점을 추가할 것이다: “주님의 이름에 은총이 있기를”(baruch shem adonai). 그들에게 자살이란 살인과 마찬가지로 전체로서의 창조에 대한 신성모독적 공격을 뜻한다. 스스로를 죽이는 사람은 삶은 살 가치가 없고 세계는 자신을 은거시킬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자살은 삶과 세계에 대해 투항하거나 자신과 함께 우주 전체를 죽이려 드는 미친 반역이 아니다. 그 죽음은 조용하고 소박한 사라짐이다. 그들은 자신 개인의 문제에 대해 자신이 찾을 수 있던 폭력적인 해결책을 사과하려는 듯 보인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정치적 사건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개인적 운명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시절이 좋건 나쁘건, 그들은 자신의 인격만을 믿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자신을 더 살 수 없게 만드는 이상한 단점을 스스로에게서 발견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특정한 사회적 기준에 맞는 자격을 지녔다고 느껴 왔기 때문에, 이 사회적 기준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면, 스스로의 눈에 실패작으로 비치는 것이다. 그들의 낙관주의는 머리를 물 밖으로 내 놓기 위한 공허한 시도다. 앞으로 내세운 쾌활함 뒤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절망과 투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일종의 이기심 탓에 죽는다.

우리는 구원된다면 모욕감을 느낄 것이며, 도움을 받는다면 품위가 떨어졌다고 느낄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 운명을 지닌 사적 존재를 고수하려는 광인처럼 싸울 것이다. 예전에 박애주의자였던 사람이 많은 우리들로서는, 우리 스스로도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는 비참한 부랑자(schnorrer) 무리에 속하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단 이른바 부랑자는 불운자(shlemihl)가 아니라 유태 운명의 상징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던 때가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우리는 유태인으로 단결할 자격이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유태민족 전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로서는 덜 근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의 보호자들은 이따금 이러한 몰지각함을 강하게 지지해 왔다. 그래서 나는 한 사건을 기억한다. 파리에 사는 큰 자선 모금회 책임자가 독일계 유태인 지식인으로부터, 불가피하게 “Dr”라는 호칭이 쓰인 명함을 받으면서, 목소리를 한껏 높여 “박사님, 박사님, 부랑자양반, 부랑자양반!(Herr Doktor, Herr Doktor, Herr Schnorrer, Herr Schnorrer!)”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렇든 유쾌하지 못한 경험에서 우리가 이끌어낸 결론은 매우 간단하다. 박사(doctor of philosophy)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충분치 못하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일구려면 우선 낡은 것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괜찮은 작은 동화 하나가 우리의 행동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버려진 떠돌이 닥스훈트 한 마리가 슬픔에 차서 말하기 시작한다. “내가 세인트 버나드였던 때…”

우리의 새 친구들은 너무나 많은 스타와 유명인들에 압도된 나머지, 우리 과거의 영광 전체를 묘사하는 그 뿌리에는, 인간에 대한 진실이 하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배려했던 누군가였을 때, 우리는 친구들의 사랑을 받았고, 집주인은 우리가 집세를 잘 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먹을 음식을 샀고, 제재 받지 않은 채로 지하철을 탔다. 우리는 약간 히스테리컬해졌다. 언론인들이 우리의 존재를 감지해 내고 우유와 빵을 살 때 불화를 일으키는 일을 그만 두어 달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알 도리가 없다. 우리가 누군지, 어떤 여권을 갖고 있는지, 우리의 출생증명서가 어디에서 작성되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히틀러가 싫어하는 사람은 아닌지 알아차리는 사람들을 피하려, 일상의 매 순간 순간을 지독히도 조심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음식을 살 때마다 정치적인 마음가짐을 가질 필요가 있는 세계에 들어맞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세인트 버너드는 점점 더 커진다. 나는 어떤 일자리를 맡기로 되어 있었던 한 젊은이가 이런 말을 하며 한숨을 쉬고 말았던 일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지금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군요. 나는 카르슈타트(베를린에 있는 큰 백화점)의 점장이었단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구출되기 위해서 여러 위원회들을 수도 없이 찾아가야만 했던 중년 남성의 깊은 절망감 또한 들은 적이 있다. “여기서는 내가 누군지 아무도 몰라요!” 누구도 그를 존엄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유명인사 및 거물 친족들에게 전보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이 미친 세계에서는 한 사람의 인간보다는 “위대한 인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훨씬 쉽다는 점을 재빨리 알게 되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살 수 있을지 결정하는 일이 덜 자유로운 것이 될수록, 우리는 한층 더 노력을 기울여 대범해지거나 사실을 감추거나 역할을 수행하려 한다. 우리는 유태인이기 때문에 독일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경계를 거의 넘지 못했기에 “독일인”(boche)으로 변했다. 우리는 심지어 히틀러의 인종 이론에 정말로 반대한다면 이 명칭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우리는 7년 동안 프랑스인-혹은 최소한은 시민 후보-이 되려 노력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될 무렵 우리는 다시금 “독일인”으로 억류되었다. 하지만 그 동안 우리 대부분은 정말로 충실한 프랑스인이 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의 명령을 비판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우리는 억류되어도 괜찮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상 최초의 “자발적 죄수”(prisonniers volontaires)였다. 독일인들이 나라를 침공한 후로 프랑스 정부는 회사의 명칭만 바꾸면 되었다. 우리는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감금되었지만 유태인이기 때문에 석방되지는 못했다.

전 세계에서 똑같은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유럽에서는 나치가 우리 재산을 몰수했다. 하지만 브라질에서는 재외독일인 동맹(Bund der Auslandsdeutschen)의 최고 지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재산의 30%를 지불해야 했다. 파리에서는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8시 이후로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적군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제약을 받았다. 우리의 정체성은 너무나 빈번하게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지를 밝혀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불행하게도, 유태인을 만난다고 하여 형편이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유태인은 라인강 너머에서 오는 모든 유태인은 자신들이 폴란드계(Polaks)라고 불렀고 독일 유태인은 동부 유태인(Ostjuden)이라고 불렀던 존재라고 완벽하게 확신했다. 하지만 정말로 동유럽에서 왔던 유태인들은 그들의 프랑스 형제들(French brethren)과 의견을 달리하며 우리를 야키(Jaecke)라고 불렀다. 이 야키의 아들들-프랑스에서 태어나 적절하게 동화된 2세대-은 프랑스 상류계급 유태인과 의견을 공유했다. 따라서 동일한 가족 내에서도 아버지는 야키라고 부를 수 있고, 아들은 폴란드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유럽의 유태인에게 파국이 닥쳐 온 이래로, 난민이라는 단순한 사실은 지역의 유태인 사회와 섞이는 것을 가로막았고, 일부 예외는 그 규칙을 강화할 뿐이었다. 이렇듯 문서화되지 않은 사회법들은 공적으로 인정된 적은 없으나 여론에 큰 힘을 미친다. 그리고 그런 조용한 의견과 실천은 모든 공식적인 환대 및 선의의 선언 전체보다도 우리의 일상에서 더 중요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관계가 끊어졌을 때 삶은 쉽지 않은 것이 된다. 도덕적 기준은 사회의 결 속에서 지키기가 더 쉽다. 사회적, 정치적, 법적 지위가 완전한 혼란에 빠졌을 때 자신의 고유한 통합성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은 극소수다. 사회적・법적 지위를 변화시키기 위해 싸울 용기가 없었기에, 우리, 우리들 중 그토록 많은 수는, 그 대신 정체성을 바꾸려고 했다. 그리고 이 이상한 행동은 문제를 한층 더 악화시켰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혼란은 일부 우리 자신의 활동에 기인한다.

언젠가 누군가는 독일로부터 이민을 나온 유태인들에 대해 진실이 담긴 이야기를 쓸지도 모르겠다. 그 작업을 하려는 사람은, 항상 150%의 독일인이었고, 독일의 수퍼 애국자였던 베를린의 콘 씨(Mr. Cohn)를 묘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1933년에 콘 씨는 프라하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순식간에 확신에 찬 체코 애국자가 되었다. 그는 독일 애국자였을 때만큼이나 진실하고 충실한 체코 애국자였다. 시간이 흘러 1937년 무렵 체코 정부는 이미 나치의 압력 아래서, 유태인 난민은 체코 시민 후보로서 아주 강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그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콘 씨는 당시 비엔나로 향했고, 거기서 적응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오스트리아 애국주의가 필요했다. 독일 침공은 콘 씨를 그 나라로부터 몰아냈다. 그는 별로 좋지 않은 시기에 파리에 도착하는 바람에 정규 거주권을 받지 못했다. 현실이야 어떻건 낙관적 관측을 하는 데 대단한 기술을 습득해 버린 그는 미래의 삶을 프랑스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단순한 행정적 고려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우리”의 조상인 웨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 갈리아 아르베르니 부족장으로 카이사르에게 대항하여 갈리아를 총궐기하도록 만든 인물)와 동일시하면서 프랑스 민족에 적응할 준비를 했다. 콘 씨의 모험은 더 이상 자세히 말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 듯하다. 콘 씨가 그가 자신은 정말로 누구-유태인-인지 마음을 정하지 않는 한은, 그가 계속 겪어야만 할 그 모든 광적인 변화를 예측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자아를 잃기를 원하는 사람은, 과연, 그 창조만큼이나 무한한 인간 실존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인격을 회복하는 것은 세계를 새로 창조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희망도 없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가 누구 행세를 하든, 우리는 변화하고자 하는, 유태인이길 바라지 않는, 광적인 욕망만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이 목표를 달성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우리는 유태인이 되길 원치 않기 때문에 난민이 되길 원치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최근 몇 년 간 독일어를 사용하는 이민자들에게는 유태인이라는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인 척 한다. 우리는 국가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데, 국가가 없는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은 유태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성스러운 호텐토트(Hottentot: 남아프리카의 부족)가 될 의사가 있는데, 그것은 단지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다. 우리는 성공하지 못하고, 성공할 수도 없다. 우리의 “낙관주의”의 이면에서는 동화주의자의 절망적 슬픔이 쉽게 발견된다.

독일에서 온 우리들과 더불어 동화라는 말은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기 힘들 것이다. 동화는 우리가 태어나게 된 나라, 그리고 우리가 말하게 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필수적 적응을 의미할 수 없었다. 우리는 원칙상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적응한다. 나는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처럼 보이는 내 동료 한 사람 덕분에 이 태도를 명확히 알게 된 적이 있다. 그는 프랑스에 도착한 직후, 독일계 유태인들이 자신들이 이미 프랑스인이라는 점을 서로 확신시켜 주는 적응 사교모임들 중 하나를 만들었다. 첫 연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독일에서 좋은 독일인이었으므로 프랑스에서는 좋은 프랑스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청중은 박수갈채로 화답했고 누구도 웃지 않았다. 우리는 충성심을 어떻게 증진시킬 수 있는지 배웠기 때문에 행복했다.

만약 애국심이 일상이나 실천의 문제라면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애국심이 뛰어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콘 씨의 사례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그는 분명 모든 기록을 갱신했다. 그는 항상, 그리고 끔찍한 운명이 자신을 데리고 간 모든 나라에서, 그 현지의 산들을 즉각 바라보며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이상적인 이주자다. 하지만 애국심은 실천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반복적인 변환이 갖는 진실성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란 힘들다. 이 투쟁은 우리 자신의 사회를 너무나 관용심이 없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집단과 무관하게 완전한 승인을 요구하는데, 현지인들로부터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기 않기 때문이다. 현지민들은 우리처럼 이상한 존재들을 바라보면서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대체로 우리 자신의 옛 국가에 대한 충성심만 납득 가능하다. 그 점이 우리의 삶을 쓰라린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유태인인 채로, 우리가 본래 살던 나라에서 갖고 있던 애국심이 다소간 독특한 측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의구심을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애국심은 정말로 진실하며 뿌리가 깊다. 우리는 그 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두꺼운 책들을 썼으며, 그 점의 유서 깊은 측면을 탐사하고 통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다. 학자들에게는 유태인과 프랑스인, 유태인과 독일인, 유태인과 헝가리인, 유태인과 …의 사이에 이미 예정되어 있던 조화에 대해서 철학 논문을 쓰게 했다. 오늘날 종종 의심받는 우리의 충성심은 역사가 길다. 그것은 150년 동안 전례 없는 위업을 보여줘 온, 동화된 유태인의 역사다. 이들은 언제나 비-유태인적 성격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또한 언제나 유태인으로 머물러 있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율리시즈 같은 이들 방랑자들은 위대한 원형과는 달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지만 그들이 겪는 절망적인 혼란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길 거부하는 광증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이 광증은 우리 실존의 근본적인 부조리함을 드러냈던 지난 10년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우리는 상상적인 낙인을 덮어 감추기 위해 계속 애를 쓸 수밖에 없는, 고정관념을 지닌 사람들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것, 기적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새로운 가능성을 열광적으로 좋아한다. 우리는 단정한 체형의 여성이 자신이 원하는 허리선을 만들어 준다고 약속하는 새로운 옷을 보고 기뻐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새로운 국적에 매혹된다. 하지만 그 여성은 옷이 지닌 기적적인 특성들을 믿는 한에서만 새 옷을 좋아할 것이며, 그 옷이 자신의 지명도, 혹은, 자신의 지위를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내버릴 것이다.

우리의 이상한 위장이 외견상 전부 쓸모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아직 낙담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일 수 있다. 인간이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사례에서처럼, 인간이 계속 반복되는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것 또한 그만큼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첫 번째 돌을 던지기 전에, 유태인이라는 것은 이 세계에서 어떤 법적 지위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유태인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법이나 정치적 고안물에 의해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인간, 즉, 단지 인간일 뿐인 존재의 운명에 우리 스스로를 노출시키게 될 것이다. 이보다 더 위험한 태도는 상상하기 힘들다. 우리는 인간 그 자체라는 것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존재하기를 멈추었던 세계에 실제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차별은 피를 흘리지 않고도 사람들을 죽일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사회적 무기라는 점을 사회가 발견한 이후, 여권이나 출생증명서, 그리고 심지어는 소득세 영수증조차 공식적인 서류가 아니라 사회적 차별의 문제가 된 이후의 세계. 우리 대부분이 사회적 기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사회가 우리를 승인하지 않는다면 확신을 잃는다. 우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언제나, 사회의 승인을 받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용의가 있다. 하지만 그만큼 사실인 것은, 이런 모든 적응 및 동화에 대한 속임수 및 농담 없이 지내려고 노력했던 우리들 중 극히 일부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뒤죽박죽인 이 세계에서 무법자들에게까지 주어졌던 몇 안 되는 기회들마저 위험에 빠트렸다.

버나드 라자레(Bernard Lazare)의 말을 빌면 “의식적인 파리아”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 극소수의 태도는 우리의 콘 씨처럼 벼락출세를 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던 사람의 태도와 같은 최근 사건들을 통해서는 조금 설명될 수 있다. 둘 모두는 19세기의 자손으로, 이 세계는 법적 혹은 정치적 무법자들은 모르며, 사회적 파리아와 그 짝인 사회적 벼락출세자만을 안다. 현대의 유태 역사는 법정의 유태인들로부터 시작해 백만장자 유태인 및 박애주의자들로 그 맥을 이어가는데, 이와는 다른 유태 전통, 하인(Heine), 라헬 반하겐(Rahel Varnhagen), 숄롬 알레이켐(Sholom Aleichem), 버나드 라자레, 프란츠 카프카 혹은 심지어 찰리 채플린에 이르는 전통을 잘 잊는 경향이 있다. 이는 벼락출세가 아니라 “의식적 파리아”의 지위를 선호했던 유태 소수 전통이다. 모두는 유태인의 자질들, “유태인의 심성”, 인간미, 유머, 사심 없는 지성과 같은 것들은 파리아의 자질이라고 내세웠다. 모든 유태인의 단점, 부족한 요령과 정치적 어리석음, 열등감과 돈에 대한 탐욕 모두는 벼락출세자의 특징이다. 인간적인 태도 및 현실에 대한 타고난 통찰력을, 카스트적 정신이나 금융 거래의 근본적 비현실성과 맞교환하기 위해 변화시키는 것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던 유태인들은 항상 있었다.

역사는 파리아와 벼락출세자 모두에게 무법자의 위치를 강요했다. 벼락출세자는 “두 번 실패는 안 한다”(On ne parvient pas deux fois)라는 발자크의 위대한 지혜를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파리아가 갖는 야생적 꿈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과 운명을 공유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무례함”이 느껴질 만큼 진실을 말하기를 고집하는 극소수의 난민은 인기가 없는 대신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장점을 얻게 된다. 역사는 그들에게 닫혀 있는 책이 아니며, 정치는 더 이상 비유태인의 특권이 아니다. 그들은 유럽에서 유태인을 치외법권으로 몰아내는 것은 대부분의 유럽 민족을 치외법권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안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밀려가는 난민들은, 정체성을 지키는 한에서, 그 민족의 전위를 표상한다. 유태인의 역사는 사상 최초로 다른 모든 민족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다. 유럽 민족의 공동체는 가장 약한 구성원들이 배제되고 처형될 때, 그리고 그 때문에, 와해될 것이다.

응답 1개

  1. 지나가다말하길

    좋은 자료, 좋은 번역,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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