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참 바람직한 삼각관계 <클라라>

- 황진미

<클라라>는 슈만의 아내이자 브람스의 연인이었던 클라라를 중심으로 한 삼각관계를 그린영화이다. 여기엔 두 가지 오해가 따라붙기 마련이다. 첫째, 그녀는 두 남성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뮤즈’인가, 둘째, 삼각관계를 맺었다니 그녀는 팜므파탈 인가하는 것. <클라라>는 두 가지 오해를 보기 좋게 따돌리며, 그녀를 뮤즈나 팜므파탈이 아닌 당당한 여성 예술가로 그려낸다. 세 사람의 관계 역시 흔한 불륜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배려와 자기절제로 빚은 예술적 연대로 그린다. 여성주체가 중심이 된 참 바람직한 삼각관계이다.

1. 남성예술가와 여성뮤즈의 도식을 집어치워라!

예술사에서 ‘남성예술가-여성뮤즈’의 도식은 유구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오직 남성 예술가이며, 여성은 남성 예술가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비인격적 존재로 대상화된다. 역사상 여성예술가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남성예술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빛을 잃거나, 역사나 드라마에 의해 더 나쁘게 재현됨으로써 주체로서의 지위를 잃고 사장된다. 예를 들어보자. <까미유 클로델>은 촉망받던 여성예술가가 남성예술가와의 만남을 통해 어떻게 자아를 잠식당했는지 잘 보여준다. 로댕의 제자이자 모델이자 연인이기만 할 뿐 자신의 예술을 할 수 없게 된 그녀는 몸부림을 친다. <프리다>의 열정적인 여성예술가 역시 남성예술가와 결혼하면서 인생을 저당 잡힌다. 영화는 그녀가 남편의 바람기로 괴로워하다가 다른 관계로 결핍을 해소하려는 것을 보여줄 뿐, 예술가로서 자아를 몰수당한 그녀의 고민을 담지 않는다. 영화 속 그녀의 그림에는 자신의 육체를 응시하는 실존적 고민이 녹아있지만, 영화의 서사는 오직 난봉꾼 남편을 둔 여자의 고통에 주목하다가 마지막엔 “그래도 난 그를 사랑한다”는 말로 봉합해버린다. <실비아>는 더 나쁘다. 등단 후 곧장 유명시인과 결혼한 그녀는 생계와 가사를 짊어진 채 시를 쓰지 못한다. 영화는 그녀의 의부증으로 남편이 집을 나간 뒤 그녀가 시를 좀 쓰는 것 같다가, 남편과의 재결합 시도가 거절되자 자살한 것으로 그린다. 영화를 보아선 그녀가 언제 무슨 시를 썼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으며, 오직 ‘사랑과 전쟁-의부증 편’이 남을 뿐이다. <까미유 클로델>, <프리다>, <실비아>를 통해 여성 예술가들의 실패와 실제보다 더 악의적인 재현에 넌더리가 난 관객의 입장에서 “슈만과 브람스가 사랑한 뮤즈”라는 <클라라>의 표제는 우려스러웠다. 더욱이 <애수의 트로이메라이>(1983)에서 아버지에 의해 영재로 길러진 순진무구한 클라라가 가난하고 방탕한 예술가 슈만을 만나 아버지의 반대에 맞서 6년간의 법정투쟁 끝에 결혼하지만, 결혼 후 자신의 예술 활동에만 전념하는 남편으로 인해 그녀의 재능이 사장되는 것처럼 묘사되었던 것을 떠올리면 그러한 우려가 더 굳어졌다.

그러나 <클라라>는 그녀를 성공한 여성예술가로 재현해낸다. 영화는 슈만과 연주여행을 다니는 클라라로 시작하여, 위엄 있는 그녀의 연주장면으로 이어진다. 연주가 끝나자 그녀가 “내가 사랑하는 작곡가 슈만”을 불러내 무대 인사를 시킨다. 그녀는 당시의 편견을 불식시키며, 정신질환을 앓는 슈만을 대신하여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브람스와의 첫 만남 역시 그녀가 남편을 끌고 선술집에 옴으로써 이루어지며, 집에 찾아온 브람스에게 같이 살자는 제안을 건네는 것도 그녀이다. 그녀는 집안에서도 무대에서도 언제나 중심에 있으며, 영화는 그녀를 바라보는 슈만과 브람스의 시선을 교차시킨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남편을 잃었지만 예술가로서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는 클라라의 연주장면과 그것을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브람스의 시선을 롱숏으로 잡는다. 그녀는 뛰어난 예술가이자 열정적인 사랑을 품은 여성이었고, 또한 예닐곱 명의 아이를 낳고 집안을 건사하는 모성적 존재였다.

2. 너 죽고 나죽는 파국적 삼각관계는 이제 그만!

슈만과 클라라의 집에 젊은 브람스가 찾아오고, 이들이 한집에서 살면서 브람스가 클라라를 사모하게 된다. 이 구도에서 무엇이 떠오르는가? 오직 ‘필름 느와르’적 파국뿐이라면 우리의 뇌가 얼마나 제한적 관계에 길들여졌는지 반성할 일이다. 브람스는 가족 모두와 좋은 관계를 맺는다. 슈만에게는 자신이 발굴한 후계자이고, 14살 연상의 클라라에게는 열정과 예술을 나눌 친구이며, 아이들에게는 잘 놀아주는 삼촌이다. 브람스는 집을 떠난 뒤에도 슈만의 입원으로 살림이 어려워지자 송금을 해준다. 클라라에게 슈만의 면회를 독려하고, 슈만이 죽은 후 클라라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클라라가 슈만의 작품을 편집하고 전파하는 것을 돕는다. 브람스는 슈만의 예술세계와 인적 자원을 승계한 후계자이자, 클라라의 중년이후 40년을 지탱해준 예술적 동지이다. 물론 이들에게 성적 긴장과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다. 20살의 브람스가 클라라의 발가락을 만질 때, 클라라는 여유 있게 물리친다. 슈만이 둘의 관계를 의심하며 흉포해질 때도 그녀는 남편의 불안을 달랜다. 슈만이 죽고 브람스와 누웠을 때, 그녀는 브람스에게 나지막이 말한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거나 내숭을 떨거나 신경질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언제나 욕망 앞에 당당하고 상대에게 진실하다. 브람스가 “당신을 뺀 모든 여자들과 자겠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과 함께 있는 것”라 말하는 것은 관계를 오래 지속하려는 자기절제와 배려의 방책이다. 이들은 리비도를 소진시키지 않고 상생적 관계를 꾸려나간다. 브람스는 평생 독신으로 그녀와 교감하다, 클라라 사후 1년 만에 뒤따라간다.

3.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의 소피아와 비교해보라!

<클라라>를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과 비교해보면 교훈이 더 뚜렷해진다. 19세기 대문호로 명성을 쌓은 톨스토이는 중년이후 사상가로 변모한다. ‘톨스토이즘’은 자본주의, 국가, 교회를 거부하고 사해동포주의와 평화주의를 표방하며, 농민공동체를 통해 이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귀족출신의 톨스토이는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저작권을 사회에 환원하려 하지만, 아내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힌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은 저작권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82세에 가출하여 간이역에서 숨진 톨스토이의 말년을 그린다. 영화는 톨스토이즘의 완고한 추종자인 체르트고프에 의해 개인비서로 발탁되어 저택에 들어온 청년 불가코프의 시점을 따라간다. 소피아는 48년의 결혼생활 동안 남편의 저술활동을 적극 도왔고 13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그의 사상에 동조하진 못하였다. 남편을 성자인양 추앙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사유재산도 포기할 수 없었으며, 무엇보다 남편이 자신보다 체르트고프를 더 신뢰하는 것에 배신감을 느꼈다. 영화는 악처로 유명한 소피아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건네며, 경직된 톨스토이즘 추종자들이 놓치고 있는 핵심적 가치인 사랑이 그녀에게 있었음을 발언한다.

그러나 영화를 본 후 얻게 되는 감상은 그녀의 패배이다. 결국 유언장은 작성되고, 톨스토이는 집을 나가 죽음을 맞는다. 소피아는 남편을 찾지만, 추종자들과 막내딸은 그녀의 접견을 가로막는다. 죽음 직전에야 겨우 남편에게 짧은 사랑의 말을 건넬 수 있었지만,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토록 집착하던 재산도, 남편의 사랑도, 유족으로의 명예도. 톨스토이가 죽고 그녀가 마차에 올랐을 때, 사상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기차역에 모여 든 가난한 사람들은 그녀에게 위로의 인사를 건넨다. 영화는 그녀의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을 짧게 담으며 끝맺는다. 자막에는 그녀가 4년 뒤인 1914년에 저작권을 돌려받게 되었다고 나온다. 그러나 1917년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으니, 환수된 저작권도 소용없어졌을 것이다. 남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사적소유에 관한 집착을 벗은 것이었다면,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과 함께 행복하지 않았을까. 영화는 소피아의 실패를 통하여, 사랑이 사적소유관계에 갇힐 때 집착과 질투만이 남는다는 교훈을 쓸쓸하게 전한다.

<독일, 창백한 어머니>(1980)로 전쟁과 파시즘의 시대경험으로 얼굴의 반쪽이 마비된 여성을 통해, ‘몸에 각인된 역사-쓰기’를 보여주었던 헬마 샌더스-브람스 감독이 일흔에 가까운 나이에 만든 역작 <클라라>에는 여성예술가로서의 감독의 자의식이 오롯이 녹아있다. 브람스 집안의 후손이기도 한 감독이 그려낸 슈만-클라라-브람스의 예술 공동체적 삼각편대는 우리에게 사적소유관계에 갇히지 않은 사랑에 대한 대안적 사유를 촉발시킨다. 그렇다. 누군가 말했듯이, ‘이제 모든 것을 다시 발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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