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파리시민들 “통치자를 통치하는 것은 거리다”

- 파리6대학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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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교외의 집 근처 RER B(파리와 교외를 잇는 지하철)역에는 두 줄의 안내문만 붙은 채 철문으로 굳게 닫혀있었다. 나는 오후에 몽파르나스에서 있을 가두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학교 친구들 몇몇과 약속을 했던 참이라 난감했다. 역 앞에는 나처럼 ‘다섯 대에 한 대는 열차가 있다’는 인터넷 사이트의 안내를 굳게 믿고 나온 시민들로 북적였지만 투덜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파리까지 가는 버스를 알아 볼 생각으로 큰 도로로 걸어 나왔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건너편 주유소 앞쪽으로 꼬리에 꼬리를 문 자동차 행렬이 줄지어 도로를 거의 차단하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연금법 관련 파업으로 정유공장 점거 이후 전국 주유소의 휘발유 재고량이 바닥에 떨어졌다더니 재고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주유소 앞은 북새통인 모양이었다. 같은 걸음을 했던 사람들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고는 각자의 집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용감하게 파리로 난 길로 삼사십 분여의 도보를 택했다.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다가 집 근처에 사는 과외학생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수업 일찍 끝나면 과외나 할까? 이 동네에서 나갈 수가 없어서 시간이 많아.’ 그랬더니 이런 답이 왔다. ‘학교가 blocus라 학교 지켜야 돼요.’ 프랑스 생활을 7년이나 했지만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는 아직도 조금의 시차가 발생하곤 한다. 그러니까 프랑스인 고등학생은 지금 ‘파업 중’ 이라 학교를 ‘사수’해야 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르몽드와 리베라시옹 파리지엥 등 몇몇 신문 사이트를 둘러보았다. 신문들은 프랑스 전국의 파업과 시위 현황과 함께 파업 지지율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파업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지지율은 5개 신문사 평균 70%를 조금 웃돌았다. 70%라니! 처음 유학 왔던 당시만 해도 놀랐다. 파업 지지율을 설문조사 한다는 것과 그 지지율이 절반도 아닌 70%를 넘어선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하긴 헌법에 3대 기본권의 하나로 존재하거나 말거나 파업이란 모조리 불법이고 시민들의 발을 묶는 (기실 프랑스처럼 묶었던 적이 있었는지도 의문지이만) 사회악으로 규정하는 나라에 살다가 온 사람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통치자를 통치하는 것은 거리다’

일상을 뒤흔드는 파업. 프랑스에 살면서 느끼는 파업의 모습은 그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던 안 하던 공동체 모두의 삶 구석구석에 파업의 실체를 체감하게 하는 일상적인 마비이다. 파업 지지율이라는 생소한 단어는 둘째 치고 한국에 살면서 시위 행렬에 서 있는 그 순간에도 파업이 일상적이라는 느낌을 받아 본적이 있었던가?

새내기 시절, 마지막에 가까웠던 지하철 노조 파업 이후 (그마저도 서울시와 수도권에는 서울시의 대체인력 투입으로 지하철이 거의 정상에 가깝게 운행되었었다.) 공공 교통수단을 비롯한 일상의 어떤 영역에도 파업이 비집고 들어온 기억은 없었다. 파업이란 직접 참가하지 않는 한, 뉴스나 신문의 한 면에 기록되는 사회뉴스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면 누가, 왜 파업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연예계 뉴스에 묻혀 지나가버린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는 모든 이들이 왜 파업을 하는지에 대한 토론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아니 그 반대의 경우 일지도 모른다. 모든 이들이 알기에 파업이 이토록 공공화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 고등학생에서부터 70~80대 할아버지 할머니들까지 전 세대를 아울러 구성된 어마어마한 시위대 행렬을 보고 있자면 마이클 무어 감독이 왜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국민을 무서워한다고 표현했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거리는 의사 표현을 해야 하지만 거리가 통치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총리의 TV뉴스 대담에 ‘통치자를 통치하는 것이 거리이다’라는 피켓을 높이 들고 행진 할 수 있는 Power people 프랑스인들, 바깔로레아(프랑스 수능)의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교육부 장관에 맞선 교사와 학부모, 학생의 파업과 그에 연대한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교육부 장관이 물러나야 하는 나라 프랑스의 모습은 그래서 내겐 동경과 부러움, 한국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동반하는 복잡한 감정을 안겨준다.

사르코지 ‘변해야 산다’ 노동유연화 정책

하지만 사르코지 정권 이후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파업과 시위를 바라보는 내 심경은 더는 그럴 수 없게 변해가고 있다. 파업의 쟁점은 점점 더 프랑스인들의 삶의 질을 위협하는 내용이 되어가고 결과는 점점 더 우울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에 이은 2009년 EU의 재정적자 문제로 가뜩이나 날로 어려워지던 유럽 각국의 경제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2000년대 이래 ‘변해야 산다’는 어디서 많이 본 슬로건을 내건 유럽의 우파들은, 그나마 신자유주의의 물결 반대편에서 명색을 근근이 유지하고 있던 유럽식 사회주의의 모든 사회복지 정책과 노동정책에 칼을 들이 밀었다.

프랑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80년대 미테랑 시절, 전체 기업의 3분의 1을 국유화 시켰다가 알음알음 민영화를 추진하던 프랑스는 사르코지 정권 이후 전기와 가스마저 부분 주식매각을 통해 민영화 시키고 세계의 경제 질서에 따라야 한다며 잇단 사회 복지 정책 축소안과 노동 유연화 정책을 내놓았다. 주 35시간 완화, 연금체제 개정, 노령인구 노동 촉진, 실업자 지원제도 개정 등등. 그에 따른 프랑스인들의 반발로 최근 4년여 동안 프랑스의 길거리에는 바리게이트가 치워질 날이 없을 정도였다.

실업률 증가가 노동자 탓? 국민적 저항

한국의 극우신문들이 진실인양 보도하는 프랑스 우파의 입장인 ‘세계 경제 질서에 순응하는 발전형 경제 모델의 지향’이 이처럼 엄청난 반발에 부딪히는 이유는 바로 그 ‘발전형 경제 모델’이 자신의 삶의 질을 위협할 것이라는 프랑스인들의 생각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질이란 많이 벌어 화려하게, 없는 것 없이 사는 삶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노동할 권리와 사회생활을 영위할 권리의 보장과 은퇴 후 노년을 즐길 수 있는 자유이다.

이를 위해 프랑스인들은 수입의 평균 40%에서 많게는 60% 까지를 의료보험과 사회보장제도, 연금을 위해 세금으로 국가에 납부해 왔다. 은퇴 후의 제 2의 인생을 위해 평생 일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문화적, 질적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프랑스인들에게 연금제도의 개정은 분개를 넘어 위협의 의미나 다름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면 이번 파업은 그저 단순한 연금제도 개정의 문제에서 기인 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르코지 정부가 내놓은 연금제도 개정안을 들여다보면 노령인구의 증가 (현재 프랑스의 경우 20%를 넘어섰다)와 젊은 층의 노동인구의 감소로 인한 연금 재정의 위기로 인하여 60살과 65살인 퇴직연령과 연금 수급 연령을 각각 2년씩 늦춰 62살과 67살로 바꾸고 40.5년 동안 연금 보험료를 내면 지급하던 100% 수령 자격을 41.5년으로 늦춘다고 말하고 있다. 내용만 들여다보면 의아할지 모른다. 2년을 더 일 할 수 있으며 고작 1년을 더 연금 보험료를 지불하면 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의 분개는 사뭇 여느 때와 다르다. 현 노동자의 연금 보험료가 은퇴 인구의 연금을 지급하는 프랑스의 연금제도는, 70년대에는 노동자 4명당 은퇴 인구 1명을 감당할 정도로 비율에 문제가 없었지만 현재 노령인구 증가와 청년층의 고 실업률 문제로 지금은 엄청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이를 모르는 프랑스인들은 아무도 없다. 그에 따른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도 모두가 알고 있다.

프랑스 시위대 외침의 핵심은 이것이다. 노령인구의 증가는 그렇다 치더라도 청년 실업률의 증가는 ‘자본주의 경제 그 자체의 위기’에서 기인한 것인데도 고통을 고스란히 겪어야 하는 계층이 노동자라는 것. 사르코지 정권은 (혹은 전 세계 우파 정권은) 그에 파생하는 다른 문제의 책임과 손실의 부담을 고스란히 노동자의 어깨에 떠넘기고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노동자 이중고 ‘연금법’ 통과

이번 연금제도 개정안도 그냥 들여다보면 단지 2년의 기간 연장으로 보이지만 계급간의 불공정성을 내포한 개정안이다.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을 졸업한 엘리트 계층의 경우 학업을 마친 후 40.5년이 지나면 쉽게 62살을 넘어서는데다 월급 자체의 차이도 있어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20세 초반이나 10대 말부터 경제활동을 시작하는 블루칼라 노동자의 경우 2년을 더 세금을 내고 일을 해야 하는 이중고를 떠안게 된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프랑스에도 점점 늘어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연금제도는 더욱 가혹해서 (프랑스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도 3대 보험 및 연금 혜택을 받는다.) 연금 재정 악화에 따른 부담을 사회적 약자에게 떠넘긴다는 의혹을 피할 길이 없다. 게다가 공기업의 민영화와 고용 불안정 문제로 인해 작년 프랑스 텔레콤 노동자들이 스무 명도 넘게 자살을 하는 사태가 발생을 할 정도로 노동환경이 날로 나빠지고 있고, 사회복지 정책과 부자들에 대한 엄청난 세금에도 불구하고 빈익빈 부익부 문제가 발생하는 등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떠안고 있는 고통이 늘고 있다.

전세계적 경제위기에서 비롯된 제반 문제를 노동자에게 몽땅 전가하려는 프랑스 우파 정권의 정책은, 신자유주의가 경제발전이라는 허상을 기치로 전 세계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모습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프랑스 시위대의 목소리는 신자유주의 자체의 비판에 도달하기 보다는 당장의 제도적 개정에 대한 반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이 모든 문제점에 대한 민중의 인식과 한 달도 넘었던 항만, 철도, 도로, 공공 교통, 공장, 학교의 파업에도 프랑스 상원은 결국 10월 22일 연금 개정안을 최종적으로 통과시켰다. 지역이 아닌 계급에 따라 정치적 정책의 선호도가 극명하게 갈리는 프랑스의 경우 노동자 계층의 반발과 부르주아지 계층의 환호가 뒤따랐지만 그 이후 벌어진 반대 시위는 점점 힘을 잃었고 내년부터 프랑스인들은 바뀐 연금제도에 따라 연금을 수령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들썩이는 유럽,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유럽 각국에서는 경제위기를 이유로 들어 조금씩은 다른 수위지만 대학등록금 인상과 노동법개정 등을 추진하고 있고 이에 반대하는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대륙을 착취하고 전쟁을 일으켜가면서까지 부흥해온 서구 경제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지금과 같은 위기의 상황이라면, 그 모든 시위가 큰 힘을 발하지는 못 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독재 정권의 마구잡이식 개발경제와 강성노조가 마치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원인인양 해석되는 한국과 달리 유럽의 경우, 소위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유럽식 사회민주주의가 지금의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족쇄와 같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기치를 처음 내건 영국이나 그 이데올로기 기수나 다름없었던 미국의 경제위기 분석에서는 결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 자체의 문제점을 거론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에 상반되는 경쟁과 효율의 가치들만 지구 한 바퀴 구석구석 돌며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철저히 짓밟고 있다.

이러한 오늘날의 경제 철학으로는 인간다운 노년을 요구하는 프랑스인이나 살던 그대로의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아마존의 부족민들, 그 누구의 소박한 소원도 이뤄 질 수가 없을 것이다. 아니, 진실로 당대의 문제를 껴안으려는 경제철학이 존재하는지 조차 의구심이 든다. 지금 프랑스 사회는 경제위기 극복을 이유로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다. 프랑스인들이 소수의 인원만 참석을 허락받은 광란의 자본주의 파티 장 앞에서 무기력하게 성공 신화를 꿈꾸는 기계가 되어갈지, 아니면 ‘통치자를 통치하는 것은 거리이다’ 라는 슬로건이 파리에서 더 높이 울려 퍼질 것인지. 유럽은 지금 흔들리고 있다. .

응답 1개

  1. 조현삼말하길

    좋은 글입니다. ‘통치자를 통치하는 것은 거리다’ 블로그에 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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