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 고병권(수유너머R)

이탈리아 로마에서 지난 주 십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시위에 나섰다고 합니다. 소위 ‘섹스 스캔들’에 휩싸인 베를루스코니 총리 불신임안이 하원에서 부결된 뒤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에 나선 것인데요. 70년대 ‘뜨거운 가을’ 이후 가장 뜨거운 계절이 이 겨울에 이탈리아를 찾아온 모양입니다. 일차적으로는 부도덕한 총리에 대한 분노였지만 그것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지난 달 말에 수십만의 학생과 노동자들이 대학개편 및 복지삭감과 관련해서 시위를 벌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학생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릅니다. 대학 점거는 말할 것도 없고 철로와 도로를 점거하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고등교육이 갖는 공공적 측면을 무시하고 시장 논리에 따라 재편을 하면서(물론 여기에는 정부의 재정 위기가 큰 원인인데요), 학생들이 반발하는 것입니다. 지난 달 제노바에서 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학생들의 구호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도로 점거에 나선 이유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들이 우리 미래를 봉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도시들을 봉쇄한다.”

그들이 미래를 봉쇄했기에 우리는 현재를 봉쇄한다는 말, 참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여태껏 금융자본이 이렇게 부풀러 오른 것은 ‘신용(credit)’을 활용했기 때문인데요. 신용이라는 것이 대체로 미래에 지불해야 할 빚인데, 그것을 현재 가지고 있는 자산으로 평가해서 ‘빚을 내라’고 말하는 거지요. 뭔가 맡길 게 있으면 그걸 담보로 돈을 빌리라는 겁니다. 저리로 빌려주겠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온갖 생색을 냅니다. 심지어 무담보 대출도 있더군요. 하지만 이 ‘무담보’가 말하는 게 뭘까요. 오히려 분명하지 않습니까. 모든 담보는 미래를 담보한다는, 심지어 담보가 없을 때는, 순수하게 ‘미래’ 자체를 담보로 잡겠다는 것이겠죠.

하지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여기저기서 거품 터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익은 ‘그들’이 차지했지만 손실은 ‘모두’가 진다는 겁니다. 더욱이 정부가 위기의 해결사 노릇을 하면서 막대한 재정적자를 지게 되고, 그것이 가난한 이들을 직접 겨냥하는 잔인한 공격이 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가는 자원들의 공급이 중단되었고, 소위 공공영역은 정부가 철수하면서 사적인 시장의 폭력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고등교육의 영역이 그렇지요. 우리 <위클리 수유너머>에서도 대학과 고등교육의 심각한 상황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만, 지식과 정보에 대한 접근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이 시대에, 가난한 이들을 고등교육에서 추방하는 사태가 펼쳐지고 있는 겁니다.

‘미래의 봉쇄’를 세대의 문제로 전환하면 ‘젊은이들의 착취’가 되겠지요. 아직 갖지 않았지만, 가질 수 있고 가져야만 하는 것들로부터 젊은이들이 추방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유럽의 젊은이들은 미래를 구원하기 위해 현재에 들어온 <터미네이터>의 전사처럼, 미래의 착취를 미리 보았고, 따라서 그런 미래로 가는 길을 지금 봉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영국 런던에서도 수년 동안 보지 못했던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일이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학등록금이 대폭 인상되고 고등교육에 대한 각종 지원이 대폭 삭감되었습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과 몇 달 전 프랑스에서도 연금개혁 관련해서 큰 시위가 있었습니다. 이번호 위클리 기사를 보면 아시겠지만, 연금 문제의 깊은 곳에는 청년실업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정부의 연금개혁안이 청년실업을 늘릴 뿐만 아니라, 재정부담을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기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세계의 모든 문제들이 이젠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세계가 거대한 몸뚱이를 뒤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한국 사회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문제들 중 우리와 무관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모든 지역의 문제들이 모든 지역과 엮여 있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미래의 모든 일들과 엮여 있습니다.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미래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응답 2개

  1. ms.chuck말하길

    요즘들어 무형의..예를들면 능력가치, 미래 가치 등등이 갖는 파워를 생각하면서 나는 어떤 무형의 가치를 만들어 담보로 잡힐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 싶었는데 알맞은 언어가 제 안에서 없어서 말로 형언 할 수 없기에 머리속에 뭉개뭉개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인거죠.
    대학의 부패와 횡포에 맞서지 못하고 그저 뒷담화만 나눴던 대학생활이 이제 막이 내려짐을 보면서 한편 부끄럽기도 아쉽기도 합니다. 대학을 나왔는데 내미래를 책임질 사람이 되어있지 못한 것 같아서 더욱 지나간 시간에 후회가 남습니다. 하지만 미래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의 후회를 그만두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면서 살아보도록 하렵니다. 수유너머에 와서는 늘 깨닫고 갑니다^^

  2.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hwa. hwa said: ㅎㅎ 반갑네용 RT @mksmile19: 수유너머 정말 괜찮은 싸이트인것 같습니다. 제목도 정말 좋아요. 일독을 권합니다. "미래를 점거당하지 않기 위해 현재를 점거한다" http://bit.ly/giqXQ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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