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놀이, 행복의 마법

- 안티고네

한동안 어떤 책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위 ‘슬럼프.’ 생활습관이란 이런 때를 위한 것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꼈다. 어떤 대가의 글을 읽어도 머리에도 마음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눈가에서 아른 거리다 사라져갔다. 그래도 줄을 그어가며 책을 읽고, 줄 그은 문장이 많은 페이지를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렇게 ‘멍 때린 지’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 달만에 노들야학에 현장인문학 세미나를 하러 갔다. 맑스와 푸코에 이어 이번에는 루쉰을 함께 읽는다. 루쉰의 「납함」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조금씩 행불된 정신줄을 붙잡을 작은 힘을 얻었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리고 처음으로 손에 잡은 책이 조르조 아감벤의 신간 「세속화 예찬」_‘정치미학을 위한 10개의 노트’이다. 잘 알려진 대로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는 형상에 주목한다. 호모 사케르란 죄를 지어 공동체에서 배제됨과 동시에 희생제물로 신에게 바칠 수 없는 사람, 하지만 누군가가 그를 죽인다고 해서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호모 사케르는 인간과 신들의 공동체로부터 모두 버림받은 존재이지만 또한 배제의 형식으로만 인간의 공동체와 신들에게 속한다. 그는 희생불가능성의 형태로 신에 속하며, 공동체에서 살해당하는 형태로 그에 포함된다. 아감벤에 따르면 신과 인간의 공동체 양쪽 모두로부터 배제되며 그 결과로 생명 그 자체이기만 한 날것의 삶을 살아가는 호모 사케르는 근대 정치의 근본적인 모습이다. 호모 사케르, 예외상태. 처음 아감벤을 접했을 때에는 지나친 비관론이라고 쉽게 비판했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채-그 수용소를 나오기 위해 재판받을 권리를 포함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과 나의 생활을 어떻게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나. 그런데 슬프게도 나를 둘러싼 현실은 점점 더 아감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다. 멀게는 2007년 여수 이주노동자 보호소에서 화재가 발생해 아홉명의 귀한 생명을 앗아가는 참사가 발생했다. 노동 현장에서 더 좋은 노동조건이나 더 많은 임금이 아닌 생존할 권리를 두고 싸우는 일들이 점점 더 잦아지고, 심지어 많은 노동자들이 그 싸움 중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노들야학과 꾸준히 함께 공부를 하다 보니 장애인 문제에 대해서도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는데, 아감벤의 논의가 장애인 시설만큼 잘 통하는 곳도 없을 것이다. 거의 모든 장애인 시설에서 생활인들의 권리는 언제나 박탈되어 왔고, 항상 생명 그 자체를 두고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말 암울하다. 섣불리 서투른 희망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겠지만, 정말 아감벤에게는 출구가 없는 걸까?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은 10개의 짧은 노트들이 퍼즐 조각처럼 펼쳐진 글이다. 전체적으로 발터 벤야민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 책은 정치학, 문학, 신학, 법학, 미학 등을 가로지르며 기존의 아감벤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 해 준다.
이 책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개괄하고 잘 설명하는 것은 나에게는 벅찬 일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조정환 선생님의 블러그와 역자 해제를 추천한다. 특히 역자 해제는 이 책에 대한 좋은 가이드라인이 되어 줄 뿐만 아니라, 「세속화 예찬」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더 읽어야 할 책들과 사상가들에 대해서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좀 더 꼼꼼히 재독할 필요가 있겠지만, 장님 코끼리 만지듯 이 책에 대해 인상비평을 하면 다음과 같다.
‘세속화 예찬’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아감벤은 성스러운 것과 세속화 그리고 환속화를 구분한다. 성스러운 것은 앞서 호모 사케르에서 말했듯이 종교 그리고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에 기본이 되는 분리의 원리이다. 성스러운 것은 신에게 속한 것, 신과 관계된 것으로서 엄격한 형식을 지키는 세심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세속화는 신에게 묶인 성스러운 것을 다시 인간이 사용하도록 자유롭게 하는 것, 인간에게 돌려주는 것을 말한다. 한편 환속화는 거짓된 세속화라고 말할 수 있다. 억압의 한 형식으로서 환속화는 마치 신으로부터 자유로워 진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그저 권력이 모습이나 위치만 바뀐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어떻게 성스러운 것에서 세속화로 접촉될 수 있느냐가 된다. 성스러움의 엄격함과 엄숙함을 어떻게 별 것 아닌 것으로 소홀하게 다룰 수 있을까?
아감벤은 지금의 정치적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어떤 새로운 주체를 호명하기 보다는 배제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라는 종교)와 그 잣대를 오염시키고 뒤흔들 것을 주문한다. 즉, 그 자체를 ‘놀이’로 만들어 버리라는 것. 아감벤은 예상치 못한 주변의 공간을 발생시키며, 이를 통해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사랑과 섹스, 고상한 것과 저속한 것을 가로지르는 문턱을 혼란에 빠뜨리고 식별불가능하게 만드는’_63p 패러디를 언급한다. 놀이나 패러디 혹은 그가 스페키에스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물론 상황과 조건에 의해 제약되기도 한다. 놀이는 갑자기 중단되어 버리기도 하고, 더 이상 차이들을 생산해내지 못한 채 동일성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아감벤은 이같은 권력의 배제와 포섭, 동일화시키는 힘과 항구적으로 긴장관계에 놓여있는 잠재력과 창조성을 주장한다. 그가 이 책의 첫 번째 장에서 말하는 비인격적이며 비개체적인 힘인 게니우스가 바로 그것이다. 확실히 아감벤은 네그리나 들뢰즈만큼 희망적이거나 유쾌하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세속화 예찬」에서 그는 게니우스, 행복, 놀이, 마법을 통해 ‘배제의 장치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암시해 준다.

아무튼 내가 이 책에서 ‘꽂힌’ 열쇳말들은 행복, 놀이, 마법, 사랑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행복에 대해서. 호모 사케르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사실 이 질문은 아감벤이 아니라, 글 서두에 언급했던 노들야학과 루쉰으로부터 온 것이다. 노들야학에서 활동하는 분들에게 수용소와 시설은 과거의 공간이 아니다. 그리고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 역시 이론이기 이전에 자신과 동료들의 삶 가운데로 던져진 질문이다. 이들과 루쉰의 만남은 처음부터 강렬했다. 장애로 인해 주위 사람들에게 투명인간 같은 취급을 받으며,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무엇으로부터도 촉발 받지 못하며 지내온 시간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스스로 무감각해질 수 밖에 없었던 세월들. 작은 물결이라도 일으켜 보려고 애썼지만 스스로 의지가 부족하다고 담금질했던 순간들. 갇혀있던 공간에서 벗어나 야학에서 친구들과 함께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놀고 투쟁하고 공부하는 분들이지만 아직도 자신들이 어떤 좌표 위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들. 누군가의 눈에는 그들이 ‘사회적 지도층의 도움이 필요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인지 모르겠지만, 함께 세미나를 하는 내 눈에는 그들이 진정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행복한 삶을 위해 싸우는 그들의 욕망이 눈부셨다.
아감벤은 벤야민과 유대 신비주의를 통해 행복과 마법의 비밀스런 관계를 언급하며 행복은 주체가 소유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행복은 절대 개인의 장점이나 노력의 대가일 수 없으며, 우리 모두는 자신이 의도치 않은 혹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만 행복할 것이다. 때로 이 말은 무섭도록 억압적인 맥락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국가, 민족, 발전의 논리 앞에서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권력자들은 늘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참아라. 그래도 이렇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 너희들이 고생해서 너희 자식들을 잘 키울 수 있다는게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냐.” 하지만 아감벤의 말이 이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아감벤이 라틴어 스페키에스species에 대해 분석하는 장에 다음과 같은 멋진 말이 나온다.

“중세 시대에는 스페키에스가 인텐티오intentio, 즉 의도라고 불렸다. … 스페키에스는 각 존재가 자기 자신을 욕망하고, 자기 자신의 존재함 속에서 스스로를 보존하고, 자기 자신과 소통하고자 욕망할 때의 긴장, 사랑에 다름 아니다. 이미지 속에서 존재와 욕망, 실존과 코나투스는 완전이 일치한다. 다른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의 스페키에스를 욕망한다는 것, 즉 그 존재가 자신의 존재함 속에서 스스로를 보존하고자 욕망할 때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페키에스적 존재는 공통의 존재 또는 일반적인 존재이며 이것은 인류의 이미지 또는 얼굴 같은 것이다.”_86p

내가 보아 온 장애계 활동가들의-또는 다르게 살기를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것은 절대 누군가를 죽이고 억압하고 기만하지 않는, 군림하지를 원하지 않는 자가 누리는 행복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존재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로 또 같이, 서로의 코나투스를 더 자유롭고 재미나고 큰 힘이 되도록 욕망하는 것, 이것이 행복의 비결이지 않을까. 행복은 사랑의 마법이다. 단, 이 마법은 아이들의 놀이처럼 이루어진다. 군림하지 않되 끊임없이 권력의 아르케를 뒤흔드는 것, 권력을 조롱하고 패러디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가끔씩은 자신이 큰 봉변을 당하더라도 굴하지 않는 것. 잘 살고 바르게 살려는 엄격한 분리에서 벗어나서 우리 모두 더 행복해지자. 나도 소심하게 구부렸던 어깨를 피고, 한바탕 놀이판으로 뛰어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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