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이민 간 참새』, 아주 특별한 참새들의 이야기

- 달맞이

달맞이의 책꽂이 29

아주 특별한 참새들의 이야기

-『이민 간 참새』모디캐이 저스타인 글, 그림 / 보물창고

1

언니! 변두리 버스 정류장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어요. 옆으로 쓰러질 듯한 쇼핑백을 바로 세우고, 어디서 나올지 모를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핑크색과 보라색 리본으로 어설프게 멋을 낸 와인 한 병, 선물로 받았으나 나보단 선생님에게 더 어울릴 것 같아 챙겨온 목도리 하나, 여드름 다닥다닥한 중학생 녀석들 몇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신다기에 챙겨온 책 세 권. 마음을 표현하기엔 턱없이 가벼운 쇼핑백이 자꾸 넘어져요. 저 멀리 보이는 산머루에선 스멀스멀 안개가 내려오네요. 뒤뚱뒤뚱 오리걸음을 하는 영감님을 부축해 가는 마나님이 보여요. 2인 삼각 경기에 나선 선수들처럼 손을 꼭 잡은 모습이 부러워요. 저기, 검정 비닐봉지들을 들고 재게 걸어가는 아줌마도 보여요. 손님 맞을 준비라도 하나 봐요.

언니! 난 손님을 맞고 보내는 일, 누군가의 손님이 되는 일이 참 어색해요. 그러니 삼, 사년 전에 시작된 묵은 약속을 이제야 지키는 거겠죠.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몇 번쯤 얼굴이 마주쳤을 때 내 곤함을 눈치 챈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 꼭.”

얼굴 덕지덕지 곤함을 드러낸 내 꼴도 무안하고, 친정 엄마처럼, 누이처럼 덥석 손을 잡아주는 선생님 맘에 미치지 못하는 내 맘도 촌스럽고……. 그래서 그 귀한 약속을 미적미적 미루기만 했어요. 고작 밥 한번 먹는 일인데 말예요. 미안해요. ‘밥’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평화의 첫걸음이라는 걸, 깜빡했네요.

하얗게 센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어, 순박한 산골 소녀처럼 보이는 선생님이 밥상을 차리셨어요. 동대문 시장에 갔다가 잔돈을 탈탈 털어 사 왔다는 꾸득꾸득 잘 마른 조기를 두 마리 굽고, 돼지 뼈를 잘 우려낸 국물로 끓인 김치찌개를 데웠어요. 참기름에 살짝 버무린 명란젓과 멸치 볶음, 나물 몇 가지를 놓고 밥을 먹었죠. 입가심으로 먹은 사과 껍질은 잘게 썰어 거실 앞 작은 정원에 놓아두었구요. 오고 가던 날짐승들도 허기를 면하라고요.

소파에 나란히 기대 앉아 수다를 떨었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실타래처럼 어디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고여 있었는지 시간이 가도 끊이질 않았어요.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선생님은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셨어요. 북한 아이들에게 보내줄 털모자를 뜨기도 하고, 동네 아이들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할 때 쓸 장식품을 만들기도 하고……. 요술 손이 따로 없더라고요. 몇 시간 되지 않아 모자 하나가 뚝딱 완성되었죠.

선생님은 가끔 배낭을 메고 재래시장을 한 바퀴 도신대요. 털실 가게를 만나면 무작정 들어가 있는 돈 다 내어놓고 자투리 털실을 사신대요. 그렇게 모은 털실 뭉치를 풀어 하루에도 몇 개씩 모자를 짜신대요. 파란색 모자가 텔레비전에서 본 그 어떤 비니보다 멋졌는데, 갖고 싶단 말을 차마 못했어요. 내 욕심 때문에 북한 친구 누군가가 모자를 받지 못할 테니까요. 선생님은 어쩌면 모자를 짜는 게 아니라, 아이들 허기를 녹여줄 사랑을 엮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 꼭.”

생각해 보니, 이 말은 주술과 같은 거였어요. 내 허기를 눈치 챈 선생님이 건네준 신통방통한 알약 같은 거요. 그러고 보니 욕심쟁이 선생님, 귀한 알약을 참 여러 개나 가지고 계시네요. 남들 허기를 기막히게 눈치 채는 밝은 눈, 따뜻한 손, 맛난 음식, 색색의 모자…….

2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온 저녁, 뜬금없이『이민 간 참새』라는 그림책이 생각났어요. 모디캐이 저스타인이 글과 그림을 그린 책인데, 모디캐이 저스타인은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나 인물 이야기를 시침 뚝 떼고 자기 이야기로 변주해 버리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요. 실제 영국 참새의 미국 이민사를 다룬 이 책은, ‘영국 참새’로 상징되는 수많은 개체들이 자신들이 살던 땅을 떠나 다른 나라에 정착하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존 버슬리에게 참새는 게걸스럽고 시끄러운 조류, 유용한 양식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발밑에 떨어진 새끼 참새 한 마리와 조우하는 순간, 존 버슬리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돼요. 허기가 졌다는 참새의 전언을 듣게 된 존이 참새에게 연민을 느끼거든요. 존은 참새를 집으로 데려와 보살펴요. 벌레와 구더기를 먹이고, 함께 목욕하고, 함께 자고, 함께 돌아다니고. 둘 사이엔 끈끈한 유대감이 형성되고, 존은 이제 더 이상 참새를 사냥하지 않아요. 아니, 사냥할 수가 없게 된 거겠죠. 참새 역시 형제, 삼촌, 이모, 사촌들까지 끌고 존을 찾아와요.

어른이 된 존은 성공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요. 페인트 공으로 일하던 존은 어느 날 갑자기 자벌레 한 마리의 공격을 받게 되고, 필라델피아가 자벌레로 몸살을 겪고 있다는 걸 알게 되죠. 필라델피아에 사는 새들은 자벌레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것도요. 자벌레를 없앨 방법을 찾던 존은 미국에서 참새들을 데려오기로 마음먹고 시의회를 찾아가요. 시의회가 불확실한 일에는 지원을 할 수 없다며 외면하자, 존은 홀로 무모한 도전을 감행해요.

영국으로 건너 간 존은 친척들의 비웃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마침내 참새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와요. 1869년 영국 참새 천 마리가 특별한 임무를 띠고 미국으로 건너간, 기적 같은 사건이 일어난 거죠.

거친 풍랑과 배 멀미를 견디고 미국까지 왔건만, 참새들은 홀대를 당해요. 필라델피아의 나무와 덤불을 망가뜨리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자벌레를 퇴치할 막중한 임무를 띠었건만, 환대해주는 이가 하나도 없죠. 존만이 묵묵히 자신의 친구인, 참새 천 마리를 보살펴 줘요.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존은 참새 천 마리를 날려 보내요. 하지만 참새들이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품는 동안, 조급증에 걸린 사람들은 또 쑥덕거려요.

“참새도 소용없군!”

잠시 뒤 새끼 참새들이 알에서 깨어나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자벌레 사냥이 시작돼요. 입을 딱딱 벌리고 먹이를 재촉하는 새끼들을 본 엄마 참새와 아빠 참새가 수천 마리가 넘는 자벌레를 잡아다 새끼들을 먹이기 시작했거든요. 참새들의 어마어마한 먹성에 자벌레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그제야 사람들은 존을 ‘참새 짹’이라고 부르면서 칭송하기 시작하죠.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에요. 자벌레들이 자취를 감추고 나자 사람들은 또 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해요.

“시끄러운 참새들 때문에 귀찮아서 못살겠어!”

참새들은 처음부터 짹짹짹짹 시끄러운 존재였어요. 영국에 있을 때도, 미국으로 와서 자벌레를 사냥할 때도 참새들은 시끄러웠을 거예요. 자벌레가 없어진다는 기쁨에 취해 있는 사람들 귀에 참새들이 내는 소음이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죠. 특별한 임무를 말끔히 해결해 준 귀한 참새를 순식간에 ‘귀찮은 존재’로 여기며 홀대하기 시작하다니! 하기 싫은 일, 귀찮은 일을 죄다 떠 맡겨놓다가도, 머슴처럼 부리다가도, 지나치게 우리 곁에 밀착되었다 싶으면 냉정하고 잔인하게 돌변해서 ‘추방’시켜 버리는 요즘 우리 인심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요.

존이 참새들을 미국으로 데려온 건 ‘특별한 임무(자벌레를 퇴치하겠다는)’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예요. 존은 친구들이 그리웠고, 친구들과 같이 있고 싶었을 거예요. 사람들에게 시끄러운 존재 취급을 당하는 참새들 삶이 안타깝기도 했겠죠. 무엇보다 참새들의 허기가 눈에 밟혔을 거예요. 참새들이 미국으로 건너오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을 테죠. 포획되어 사냥감이 되지 않으려고, 배를 곯고 싶지 않아서, 무시당하는 존재로 살기 싫어서 고향과 가족을 떠나 스스로 뿌리 뽑힌 자가 되어야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의 그들 지위는 금세 전락해 버리고 말아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에서 귀찮은 존재로. ‘특별한 임무’ 를 수행한다고 해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되리라고 믿었던 것 자체가 어리석었던 거죠.

그렇다면 참새는 영국이나 미국, 아니 그 어디에서건 영영 ‘게걸스럽고 시끄럽고 귀찮은 존재’에서 한 발짝도 거듭나지 못하는 걸까요? 이 책이 재미있는 건 마지막 부분이에요.

그 후 자벌레는 없어졌지만 필라델피아 사람들은 다시 투덜대기 시작했습니다.

“시끄러운 참새들 때문에 귀찮아서 못 살겠어!”

하지만 참새들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존도 마찬가지였어요. 참새 친구들과 다시 함께 잘 살게 되었으니까요. 존과 참새는 정말 좋은 친구였답니다.

미국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참새와 존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 남들이 보기엔 뿌리 뽑힌 존재이지만, 여전히 귀찮은 천덕꾸러기 존재이지만 그들끼리는 정말 좋은 친구였다는 이야기. 좋은 친구가 있는 한 그곳이 어디건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 영국의 일원이었던 존과 참새들이 미국 땅에서 함께 잘 사는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이 책이야말로, 디아스포라의 완벽한 적응기가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 디아스포라란 흩어진 사람들, 추방당한 자, 뿌리 뽑힌 자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다시 모일 수 있는 사람들, 스스로 떠나온 자, 어디서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자로 정의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탄생된 순간, 세계성을 갖는 자로 말예요.

3

언니! 허기가 져요.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지는 건 마음이 곤하기 때문이래요. 얄팍해서, 혹은 너무 투박해서 친구를 붙여놓지 못하는 까닭이겠죠. 내 맘을 움직인 선생님의 신통한 알약처럼 배시시 웃으면서 이렇게 말해볼까요?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 꼭.”

응답 1개

  1. 둥근머리말하길

    밥 먹으러 오라는 말. 이 말을 콕콕 챙겨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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