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미의 시경읽기

큰 쥐야 큰 쥐야

- 정경미

가렴주구가 심하던 시절, 백성들은 한 해 농사 지어 봤자 세금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고대에 세금은 수확량의 10분의 1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50% 이상을 빼앗겼다. 거기다 걸핏하면 성 쌓는다 제방 만든다 해서 불러 일을 시키고 젊은 장정들은 전쟁터에 끌고 가니 그야말로, 그놈의 나랏님들 먹여살리느라 백성들 등골이 빠진다. 과중하게 세금을 거두는 정치를 풍자한 시로, 시경詩經 위풍魏風에 「석서碩鼠」라는 시가 있다. 클 석[碩]. 쥐 서[鼠]. ‘큰 쥐’라는 뜻이다. 쥐, 하면 당신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G20 회의장 앞의 쥐그림? 관련이 있다. 요즘 쥐가 무능한 위정자의 모습으로 자주 그려지는데, 옛날에도 세금 착취하는 탐욕스러운 관리를 ‘큰 쥐[碩鼠]’라고 했다. 창고의 곡식을 몰래 훔쳐 먹는 커다란 쥐처럼 자기 배 불리는 데 나라 살림을 축내는 탐관오리를 ‘석서’라고 했다. 시경 위풍의 시-「석서碩鼠」는 이렇게 커다란 쥐처럼 백성들을 착취하는 탐관오리들이 전횡하는 정치 현실을 풍자한 시이다.

碩鼠碩鼠 큰 쥐야, 큰 쥐야
석서석서
無食我黍 내 기장을 먹지 마라
무식아서
三歲貫女 삼년 간 너와 알고 지냈거늘
삼세관여
莫我肯顧 나를 돌보지 않는구나
막아긍고
逝將去女 떠나리 장차 너를 버리고
서장거여
適彼樂土 저 즐거운 땅으로 가리라
적피락토
樂土樂土 즐거운 땅, 즐거운 땅
락토락토
爰得我所 거기서 내 편히 살리라
원득아소

창고 지키라고 했더니 곡식 훔쳐 먹는 쥐를 탐관오리에 비유하였다. 얼마나 많이 훔쳐 먹었는지 배가 뚱뚱하고 덩치가 집채 만한 석서碩鼠이다. 큰 쥐야 큰 쥐야 내 곡식 먹지 마라. 오랫동안 내가 너 먹여 살렸는데 선한 정치를 하지 않고 나날이 가렴주구만 일삼는구나. 나 이제 너를 떠나리. 너를 버리고 즐거운 땅으로 가리라. 백성을 돌보지 않는 나라에서 더 이상 시달리기 싫다. 나를 착취하지 않는 곳-낙토樂土로 가서 나 행복하게 살리라… 고달픈 현실에서 벗어난 이상향을 꿈꾼다는 점에서 이 시를 읽으니 우리나라의 고려가요 「청산별곡」이 생각난다.「청산별곡」에서 고달픈 현실에서 벗어난 이상향을 ‘청산’이라고 했다면 「석서碩鼠」에서 그것은 ‘낙토樂土’라고 표현되었다. 청산은 고달픈 현실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자연을 뜻한다. 그렇다면 ‘즐거운 땅[樂土]’은 어떤 곳일까? 농사지은 거 세금으로 다 뜯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세금 없고, 부역 없고, 전쟁 없는 곳-국가 권력의 착취와 폭력이 없는 곳. 나라 없는 나라가 이 시에서 말하는 낙토가 아닐까.

碩鼠碩鼠 큰 쥐야, 큰 쥐야
석서석서
無食我麥 내 보리를 먹지 마라
무식아맥
三歲貫女 삼년 간 너와 알고 지냈거늘
삼세관여
莫我肯德 나를 잘 대해주지 않는구나
막아긍덕
逝將去女 떠나리 장차 너를 버리고
서장거여
適彼樂國 저 즐거운 나라로 가리라
적피락국
樂國樂國 즐거운 나라, 즐거운 나라여
락국락국
爰得我直 거기서 나 제대로 살리라
원득아직

낙토의 정치 원리는 사랑일 것이다. 지배와 착취가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정치. 오랜 세월 사람들은 그런 정치를 꿈꾸었지만 한 번도 실현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것은 단지 꿈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미지의 환상일까. 제도화되는 순간 도그마로 변하는 혁명일까. 그래서 예술가들은 사랑의 원리가 실현되는 또 다른 현실 영역을 창조하는 것으로 폭력적인 현실에 대항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삶의 원리-사랑을 실현하는 새로운 세계. 시詩가 바로 그런 새로운 현실-낙토의 하나일 것이다. ‘낙토로 가서 제대로 살리라[爰得我直]’라고 할 때 ‘제대로 살다’라는 뜻으로 ‘직直’을 쓴 것이 재미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 정직하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다. <논어>에서 공자도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정직이라고 했다. 정직하지 않으면서 살아 있는 것은 그건 단지 요행일 뿐이라고 했다.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자기의 본성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다. 사과나무 씨앗이 사과나무 열매를 맺는 것. 그런데 우리는 보통 권력의 욕망을 좇느라 자기의 본성을 잊고 살아간다. 난 사과나무인데 “나한텐 왜 복숭아가 안 열리는 거야?”라며 투덜거린다. 남의 욕망에 따라 흉내내는 삶이 아니라 자기만의 독자적인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碩鼠碩鼠 큰 쥐야, 큰 쥐야
석서석서
無食我苗 내 곡식을 먹지 마라
무식아묘
三歲貫女 삼년간 너와 알고 지냈거늘
삼세관여
莫我肯勞 나를 위로하지 않는구나
막아긍로
逝將去女 떠나리 장차 너를 버리고
서장거여
適彼樂郊 저 즐거운 들로 가리라
적피락교
樂郊樂郊 즐거운 들, 즐거운 들이여
락교락교
誰之永號 거기서는 누가 울부짖으리
수지영호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가서 쓴 시 「애절양哀絶陽」을 보면 조선후기 군정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지 엿볼 수 있다. 갈밭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만에 군적에 등록되었다. 당시 규정된 병역은 양민 남자 16세부터 60세까지인데 정군正軍이 아닌 자는 군보軍保라 하여 세금을 내도록 하였다. 갓난아기를 군적에 등록한 것은 바로 이 군보를 징수하기 위해서였다. 가뜩이나 농사 지어도 세금 내면 남는 게 없어 먹고살기 힘든 판국에 갓 낳은 아들을 군인으로 등록하여 또 세금을 내야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여 갈밭의 이 백성은 칼을 뽑아 자기의 생식기를 스스로 베면서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 아내가 그 생식기를 가지고 관아에 가니 그때까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아내가 울면서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했지만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이것을 다산이 듣고 「애절양」이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차암…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국가 권력의 횡포는 여전한 것 같다. 그런데 예전에 비해 지금이 달라진 것이라면 권력이 외부적 장소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상의 욕망과 무의식적 충동으로 권력은 내면화되어 작동한다. 이건 내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권력의 요구와 명령에 따르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이 자발성과 능동성을 상실했다면, 그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전혀 즐겁지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감응을 촉발하지 못한다면, 원래는 좋아서 했던 일이 지겨운 의무가 되어 있다면, 나는 지금 권력의 욕망에 포획된 것이다. 나의 신체가, 나의 욕망이, 나의 무의식까지가 모두 권력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자신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석서에게 피폐해진 삶을 자기의 본성에 충실한 삶-낙토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것이 아닌 욕망에 휘둘리느라 시간을 다 보낸 올해 남은 며칠 동안 그것을 생각해봐야겠다. 누가 내 시간을 모두 갉아먹었나! 큰 쥐야 큰 쥐야 올해 남은 며칠만은 뺏아가지 말아다오. 올해 남은 며칠만은 세금으로 다 뺏기고 피폐해진 내 삶의 마지막 양식으로 남겨다오.

응답 1개

  1. 지나가다말하길

    다산의 에 나오는 사연이 정말 섬뜩하게 절박하군요. ‘쥐’와 권력자의 인연이 참 깊군요. 자율성과 사랑으로 이뤄진 좋은 나라, 내 안에 일궈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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