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발가벗겨지거나 발가벗고 만나거나 – 장기 투쟁의 인간학

- 문재훈(서울남부노동상담센타 소장)

조약돌이거나 고목 같은 시간

사람이 사람을 샅샅이 안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장투 노동자들의 장단점은 다 이 속에 있다. 장기 투쟁의 시간은 좋을 때는 발가벗고 만나도 좋은 동지가 되지만 나쁠 때는 남 눈에 자기가 발가벗겨져 있다는 당혹감과 수치심으로 우울증에 빠진다. 그렇게 무섭다.

허물이 없다는 것은 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거리가 없다는 것은 사이가 없다는 것이다. 사이가 사라진 관계는 정말 친하거나 아니면 어떤 신비감도 사라진 삭막하고 짜증나는 관계다. 말에 담긴 의도가 고스란히 들어날 때, 그래서 속마음이 조금도 가려지지 않을 때의 당혹감은 종종 최소한의 존중도 삭제된 관계가 아닌지 의혹을 키운다.

기륭투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다. 자본 특유의 변덕으로 빛과 그늘이 하루에 몇 번씩 뒤집히고 있었다. 그때는 기대와 실망이 장마날씨처럼 변덕스럽게 사람들의 마음을 쑤시고 있었다.

최종안이 사측에게 전달되었고 긍정적이라는 말이 돌았다. 표현하지 않지만 조합원들이나 연대 동지들의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하지만 채 한나절이 지나지 않아 기륭전자 대표가 그것은 실무자들의 이야기지, 나는 아니고,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통째로 부정하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분위기는 급전직하 되었다.

인섭 조합원이 성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말을 한다. “언제 우리가 저놈들 믿었어. 나는 이럴 줄 알았어.” 흥희 조합원이 말한다. “기대를 가지는 것이 왜 문제야. 속상해 죽겠구만.” 갑자기 인섭이 나에게 화제를 돌린다. “소장님 우리 기륭은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었요.” “강경파? 온건파?” “예, 나하고 행란 누나하고 화숙이가 강경파고요 나머지는 온건파요.” “그 기준이 뭐야?” “그게요. 우리 세 사람 말고는 기륭 전에 노조 경험이 있어요. 경험한 사람들이 더 회사를 믿어요. 우리는 경험이 처음이라 절대 저 놈들을 믿을 수 없는데…”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노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온건파고 처음 경험한 사람들이 강경파인데 그 기준은 회사 말에 대한 믿음과 기대라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관점은 종종 현실에 대한 추종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는 노련함이지만 또 누구에게는 맨날 회사의 술수에 당하는 나약함이다. 평생 어디에서 온건이란 말을 듣고 살았던 적이 없던 이들이 졸지에 개량주의가 되는 순간이 매일 반복되는 곳이 바로 장기투쟁 현장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이 세월이라 한다. 하지만 그 세월을 견디는 장기투쟁 사업장에 세월은 누구에게는 조약돌처럼 단단하고 윤기 나는 것으로 나가는 세월이지만 누구에게는 푸석거리는 고목처럼 자기가 그리고 인간관계가 해체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의 풍화에 100명이 10명이 되고 그 10명이 또 온건 강건으로 부침을 한다. 그곳에 어떤 생의 장사가 있을 것인가?

골동품이거나 쓰레기가 되는 공간

시간을 견디는 힘은 강한 발언과 힘찬 뜀박질이 아니다. 시간을 이기는 마지막 힘은 일상을 지키는 꾸준한 성실함과 성실함으로 엮이는 연대다. 기륭전자의 경우 그 상징이 단 하루도 빠뜨림이 없었던 아침 출투의 꾸준함과 말보다 먼저 손발이 가는 연대의 성실함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집단으로 발휘되기도 하지만 장투 노동자들 내부 인간관계에서도 일관되게 관철되는 원리다.

기륭의 김소연 분회장은 카리스마가 있다는 평을 많이 듣는다. 기륭에 지속적으로 알뜰한 연대를 해 주셨던 지역의 전교조 선생님의 말씀이다. 그분은 언젠가 식사를 시작하는 것도 분회장에게 묻는 조합원을 보면서 밥 한번 먹는 것까지 결정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해서 동료 선생님에게 그 상황을 말하며서 빈정거리는 투로 “기륭은 분회장의 지도력이 대단해”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다른 선생님이 “돈과 권력에 없는 카리스마는 오직 그 이전의 헌신으로 가능한 거래요.” 라고 대꾸를 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 온 시간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도력이 헌신이라는 것은 지도력의 반만 말해 줄 뿐이다. 그 헌신이 일관될 때 일상으로 헌신이 입증될 때 정말 어렵고 힘들고 난감한 사항에서 마지막 기둥이 될 수 있는 힘 = 지도력이 생기는 것이다.

오래가지 못하는 열정이 많다. 그리고 그 열정은 곧 냉정을 넘어 냉소가 된다. 그런 냉온탕을 오가는 공간 속에서 자기를 골동품으로 만드는 사람과 자학과 타학에 휘말려 자기와 동료 관계를 원망의 쓰레기장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 오래된다는 것은 자기를 힘들게 할 뿐 아니라 남들도 힘들게 한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긴 투쟁은 먼저 조합원들을 지쳐 쓰러뜨리고, 상급단위를 만성 피로에 빠뜨린다. 연대단위들에게 부담이 되고 다른 노동자들의 투쟁을 주눅 들게 한다. 이 무게가 워낙 대단해서 이것을 견디는 사람은 1/10도 안 된다. 문제는 그 하나가 있어 역사의 밑불이 살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밑불로 인식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눈앞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시작한 투쟁이 처음에는 실익의 문제로 되고 해결의 가능성이 있을 때는 대의도 쉽게 용인한다. 그런데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 생계와 주변의 개입이 노골화 된 후에는 뻔한 이야기, 현혹하는 말로만 들린다. 그래서 지금 자신의 투쟁이 역사를 만드는 투쟁이라는 자부심을 다시 가슴에 심지 않으면 장기투쟁을 감당할 수 없다. 그것이 종종 “그만두려면 벌써 그만뒀죠. 이제 억울해서 못 그만둬요.”라는 자조적인 표현으로 나오든 “우린 한 번도 진다는 생각을 안했어요. 연대하는 동지들을 봐서라도 반드시 이겨야죠.”하는 당당한 낙관으로 표현되든 자기 투쟁을 역사적 정치적으로 재정립하는 또 한 번의 내부 비약이 했다는 거다. 다시 말하지만 눈앞의 투쟁이 개인의 이해를 넘어 계급적 역사적 자부심으로 돌리는 과정이 없다면 장기투쟁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과정의 뿌리는 역시 일상의 꾸준함과 성실함이다. 승리하는 장기투쟁의 비밀의 오직 이것이다.

만사가 그렇지만 어떤 문제든 완전하게 해결되는 문제란 없다. 어쩌면 동일한 문제가 매일 번복되는 시간이다. 그런 시간을 담아내는 장기투쟁 사업장에서 인간관계도 매일 다투고 매일 삐치고 매일 화해하고 매일 다짐하고 또 다투고….. 그런다. 그 속에서 과정이 만성피로가 되어 투쟁하면 지긋지긋한 것으로 외면하고 간 사람도 많다. 반면에 이런 과정 자체가 권력과 자본이 파논 함정이며 이것을 견디는 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속에 숨은 권력과 자본의 탄압을 이기는 것으로 알고 더욱 단단하게 마음을 여미는 사람은 적다. 하지만 그 적은 사람들이 장기 투쟁의 시간을 자기를 조약돌로 만들고 투쟁을 골동품으로 만든다. 시간이 오래 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 골동품이고, 악취만 풍기는 것이 쓰레기다. 골동품이 되는 공간을 만드는 힘은 역시 대의를 품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성실함이다.

마음에 병이 들기 시작하면 깨복쟁이 관계가 발가벗겨진 관계로 전환된다. 친함이 지나쳐 간섭이라 생각한다. 그 악마의 시련이 매일 반복되는 곳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은 결단코 일방적으로 강해지거나 고상해 질 수 없다. 오히려 쉽게 자학과 가학을 오가다가 우울증에 또는 또 다른 고통으로 빠져 들어 간다. 오직 매일 축적된 일상의 신뢰, 매일 검증되는 손발의 신의가 고난의 순간을 조약돌, 골동품으로 만드는 힘이 된다. 그 힘으로 세월을 이기는 장기투쟁 노동자들의 하루하루는 위대한 시간이다. 비록 불가피하게 내상이 만신창이를 만드는 시간일 지라도… 그러니 결국 투쟁의 시공간이 단금질의 시공간인지 피폐된 풍화의 시공간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 무엇이 아니겠는가?

응답 4개

  1. 투쟁말하길

    시위할때 가장기억에 남는 사람이 송경동이었습니다.
    시인이라죠.

    대부분의 동지들이 연약한 여성이고 아이들의 엄마인데, 학생들도 있었는데, 시위할때마다 송경동씨가 피우는 담배때문에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때는 말을 못했지만. 정말 싫었습니다.

    본질에서 벗어난 내용같은데.. 시위할때도 에티켓이 좀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2. 박카스말하길

    ‘축적된 일상의 신뢰’ 부분이 참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3. 달타냥말하길

    투쟁이 단지 권력에 대한 저항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글을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힘들고 지치는 투쟁속에 자기를 단련시켜나가는 분들….참 대단하신 분들이군요. 글 잘읽었습니다.

  4. 퐁티말하길

    사람과 사람 사이 그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 글..여운이 많이 남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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