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두리반 전투: “함께 우리의 싸움을 싸우자.”

- 김강기명(카이로스)

두리반 전경

1년 가까이 이어가는 지난한 철거 투쟁, 그리고 단전. 여느 철거 투쟁의 현장과 비슷해 보이지만 홍대 앞 두리반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음악회와 다큐 상영회, 강좌가 매주 이어지고, 또 작가들의 낭독회와 영어공부 모임까지, ‘투쟁’과는 잘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프로그램들이 공간을 채우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공간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12월 24일, 투쟁 1주년 기자회견에서 인권활동가 박래군이 말한 것처럼, 두리반은 한국 사회에 새로운 투쟁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는 현재 두리반에 들어와 상근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활동가들의 눈으로 바라본 두리반 투쟁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함께 이야기한 사람 :

진행: 김강(연구집단 CAIROS)

대담: 류수사(다큐멘터리 감독), 경찰서(청소년 활동가), 주플린(청소년 활동가), 푸른비(대학생 활동가, 음악가)

그들, 이렇게 모였다.

김강: 두리반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정말 한 공간에서 보기 힘들 것 같은 다양한 사람들이 이 공간을 통해 만나고, 또 그것을 통해 두리반의 투쟁이 정당성과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상근자들 역시 그런 것 같다. 어떻게 이 투쟁을 함께 하게 된 건가?

푸른비: 성공회대에 입학해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소선 어머니께서 강연을 오셨다. 강연을 들었던 저녁에 지금 전태일 거리 만들기 하고 있는 음악가들이 공연을 했고, 그들을 통해서 두리반 소식을 듣고 칼국수 음악회에 참여하게 된 게 시작이었다.

유수사: 나는 비교적 초창기에 함께 하게 되었다. 1월 말? 솔직히 말하면 내가 어떤 능동적인 기획을 가지고 두리반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당시에 용산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던 문정현 감독님 조연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용산과 같은 일이 두리반이라는 곳에서 또 벌어지고 있다고 해서 함께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를 카메라로 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경찰서: 나는 그 이전에 어떤 단체에 소속되거나, 인권활동을 했던 적은 없다. 친구들과 함께 촛불시위를 나가면서 눈을 뜬 정도? 두리반에는 하자센터의 친구로부터 51+공연 이야기를 듣고 스텝으로 참여하면서 오게 되었다. 그리고 상근을 하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때 일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플린: 51+공연 스텝을 하면서 두리반과 연을 맺게 되었다. 그 전엔 청소년 인권활동, 촛불집회 등에서 조금씩 활동하면서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김강: 단순히 이 현장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농성장의 상근자로 뛰어들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무엇이 이 투쟁을 “나의 투쟁”으로 만들게 했던 것인가?

푸른비: 고등학교 때 중요하게 배웠던 게 머리, 가슴, 손의 조화였다. 학교에서 사회 문제가 어떤 것들인지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분노하는 법을 배웠다면 이제 사회에 나와서 실천을 해야 할 때인데, 두리반이 바로 그 ‘손'(실천)이었던 거다. 게다가 이 문제는 곧 나의 문제이기도 하지 않나. 나도 가난한 세입자인데.

유수사: 나는.. 신앙적인 선택이 컸다. 이전에 매체를 통해서만 보았던 철거 현장이나 투쟁의 모습과 달리 실제로 경험하는 건 굉장히 다른 거였다. 예수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내가 이 공간에 함께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주플린: 나에게 학교는 정말 억압적인 곳이다. 나에게는 이곳이 어떤.. 대안공동체였다. 유채림, 안종려 두 분이 정말로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여기에 오면 자유롭고, 평화롭고, 음악이 있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게 그냥 생각없이 즐거운 게 아니라 투쟁 현장이라는, 그 고통의 무게감이 녹아 있는 진중한 즐거움이 있었다. 그래서 여기가 진짜 좋았다.

경찰서: 음.. 주플린 말대로 여기가 대안 공동체의 의미를 갖고 있는 곳이고.. 그래서 또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있는 거지만, 또 그래선 안 되는 게 여기는 빨리 없어져야 하는 곳이기도 하잖나. 내 경우도 여기가 좋아서 들어왔다. 한편으로는 책임감도 갖게 되고, 부담도 많이 갖게 된다.

두리반농성 1주년 기자회견

단전, 그들은 인간의 존엄을 밟았다.

김강: 경찰서 이야기 들으면서 느껴지는 건데, 이곳이 한편으로는 51+을 기점으로 몰려드는 젊은이들의 대안문화의 공간이고, 또 욕망이 분출되는 공간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현재 대한민국의 모순이 아주 한 공간에 집약된 철거 현장이고, 그래서 빨리 이겨서 끝나야 할 투쟁 공간이기도 한데 이런 분위기가 서로 충돌하지는 않나.

유수사: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게 극명하게 나타났던 게 단전 때였다. 사실 5월부터 단전되기 전까지는 두리반이 굉장히 에너지가 꽉찬, 매일매일이 축제라고 할만한 그런 시기를 보냈었는데, 갑작스럽게 단전이 되었다. 그러면서 아, 여기가 엄혹한 투쟁의 현장이다. 고통의 자리다 하는 게 다시금 확 다가왔었다.

김강: 단전 당시의 이야기를 좀 더 들려달라.

경찰서: 그날 단전된 걸 처음 발견한 건 나랑 주플린, 멍구였다. 아침에 들어와서 선풍기를 켜는데 돌아가지 않았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채림 선생님을 깨워서 “선생님 단전됐어요.” 말하고… 그게 시작이었다. 한 여름에.

주플린: 단전되고 한 달 정도는 지금 켜는 이런 전구도 없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게다 촛불을 켜면 금세 사우나처럼 변했고.

푸른비: 여름이라 더운 것도 그랬지만, 냉장고를 돌릴 수 없어서 계속해서 음식이 상했었다. 악취가 나는 죽은 쥐를 찾지 못해 며칠을 두어야 하기도 했고.

경찰서: 단전은 정말 사람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치욕적인 그런 경험이었다. 다들 예민해지고 사소한 일에도 많이 싸우기도 했다.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김강: 사장님은 그 날 통곡을 하셨다고 들었다.

푸른비: 사장님은 그날 저녁에 오셨다. 문이 열렸고, 누군지 확인하러 내가 돌아 앉았는데… 그 때 사장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몇 발자국 떼지 못하시고 그냥 쓰러지셔서 오열을 하셨다. 가서 사장님을 안아드렸지만… 화나셔서 다 나가라고, 사정이 이렇게 될 때까지 뭐했냐고, 나 혼자 기름 붇고 죽겠다고 하시는 사장님을 위로 할 수 없었다. 함께 싸워온 사람한테 그런 말씀하시는 사장님이 원망스러웠냐고? 안 그랬다. 우리한테 그러시는 게 아니라는 거 다 알았으니까.

주플린: 유채림 선생님은 단전 소식을 듣고 그냥 허허 웃으셨다. 그게 사실은 웃는 게 아니셨을 거다. 사장님의 오열과 하나도 다르지 않는…

김강: 그렇게 힘들었지만, 곧바로 마포구청으로 가서 투쟁을 시작했다. 사실 구청장은 후보 시절에 두리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약까지 하고 가지 않았나.

주플린: 완전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경찰서는 1인 시위하다가 구청장을 조우하기도 했다. 그 때 그 분이 뭐라고 했었지? “젊은 애들은…”

경찰서: “젊은 애들은 실속 있는 진실을 모른다.”

김강: 구청 점거 투쟁은 사장님의 결단이었나.

주플린: 처음엔 사장님이 혈혈단신으로 마포구청의 토지계획과에 가셨다. 그리고 우리도 따라 들어가고, 많은 이들이 연대하러 오고. 구청은 정말 관료적이었다. 누구한테 물어봐도 자기들 일 아니라는 식. 그래서 삼일을 구청에서 농성을 했고, 이후에도 573인 선언이나 작가선언 등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

김강: 전기를 다른 곳에서 끌어오지 않았다. 사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또 투쟁을 위해서는 전기가 많이 필요했을텐데.

푸른비: 선생님과 사장님은 그렇게 하면 우리가 저들과 다를 게 없는 것으로 비춰질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김강: 지금은 태양열 전지와 구청에서 준 발전기로 버티고 있다고 들었는데.

푸른비: 태양열 전지는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실에서 힘써 주셨다. 평소에는 이걸 가지고 작게나마 불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발전기는 힘겨운 투쟁 끝에 마포구청에서 전기를 공급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구해 준 것이다. 그런데 이게 참…

김강: 용량이 적은가?

푸른비: 그 반대다. 정말 구청에서 구해다 준 경유발전기는 이 건물 3층까지 에스컬레이터 돌리고, 공연장 서치라이트 같은 것도 24시간 돌릴만한 거였다. 이 공간이 어느 정도 전기가 필요한지 전혀 검토해보지 않고 준 거다. 몇 시간 전기를 돌리면 기름 몇 만원 어치가 훅 날라간다. 기름값은 지원도 없고.

두리반텃밭

상근자들, 이렇게 살고 있다.

김강: 농성장 생활 이야기를 좀 해보자. 두리반에서는 매주 여러 행사들이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다. 상근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할 텐데, 역할분담은 어떻게 하나?

유수사: 상근자들은 청소 밥 같은 살림부터 각종 행사들을 진행하는 등 매우 많은 일들을 한다. 물론 상근자들만 이 일을 다 진행하는 건 아니다. 자립음악가들도 있고.. 두리반의 일들은 아주 자율적으로 이뤄진다. 물론 늘 잘 되는 건 아니라서 때로는 문제제기를 해서 고쳐가면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몇 가지 생활 규칙들을 정하기도 했다. ‘두 시 이후에는 2층(상근자 공간)에서 악기 연주 금지’같은.

김강: 장기 농성을 준비하는 건가.

푸른비: 사실 유채림 선생님만 해도 100일 넘기지 않을 거라고, 100일 때는 300일, 300일 때는 1년 안 넘길거라고 생각하셨다. 근데 이렇게 지났다. 이제는 예측을 못하겠다. 꽤 긴 싸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장님, 선생님은 GS건설의 하수인들이 주는 돈을 받고 타협하실 생각이 없으니까. 이 싸움은 이제 두리반만의 싸움이 아니니까. 저쪽도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버틸테면 버텨보라는 식으로 나올 것이다.

김강: 상근자들도 그렇고, 워낙 개성 강한 ‘요즘 젊은 것들’인데, 세대 차이라던가, 또 함께 생활하면서 부딪히는 문제는 없나?

유수사: 당연히 없을 수는 없다. 워낙 자기 에너지가 강한 사람들이 모여들고, 상하관계 없는 문화가 익숙한 사람들이 많고… 처음에는 그런 부분들에 있어서 갈등이 좀 있었는데, 막상 함께 생활하면서 이야기하다보니까 서로 이해하게 된다.

경찰서: 사실 선생님, 사장님 말고 젊은 사람들끼리는 아예 말을 놓고 지내기도 한다. 사실 난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두리반에선 이게 하나의 문화이기도 한데,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적극적일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런 거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청소년 활동가들의 활동에 대해 기본적으로 호의적이다. 나도 억지로 내 방식을 납득시키려 하지 않는다.

주플린: 오히려 나는 여기서 사회생활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을 많이 배운다. 생각이나 정체성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 같은 거…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힘들기도 하지만.

푸른비: 농성을 하다보면 프라이버시가 없는 게 조금 힘들다. 모든 게 다 공개되어 있고. 막 지쳐 있을 땐 근처에 사는 친구들 집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기도 한다. 그럴 땐 진짜 고맙다. 지금은 익숙해져서 낮에 사람들이 많지 않을 때는 책을 펼치기도 한다. 때로 갈등이 없지는 않지만 그럴 땐 이 싸움을 꼭 이겨야겠다는 각오가 그걸 극복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두리반 문제는 사실 모두의 문제니까. 우린 홀로일 수 없으니까.

51+음악회

두리반, 새로운 연대를 위하여

김강: 장기 농성이 힘들겠지만, 또 많은 이들이 계속 두리반을 찾고 있다. 공연 관객들도 늘어나고 있고.

주플린: 고맙지… 정말 고맙고 든든하다.

경찰서: 때로는 여기를 투쟁 현장, 철거 현장이라고 깊이 느끼지 않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또 투쟁의 새로운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결합하는 새로운 방식 아닐까?

푸른비: 투쟁과 운동이 제도화되고 일상이 되는 게 무섭다. 어쩌면 그동안의 진보운동이 그랬던 건 아닐까. 그런데 두리반 투쟁에 많은 사람들이 오는 건 이곳이 철거투쟁의 현장인 동시에 오늘날 시대에 필요했던 새로운 운동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지만 이 정도로 갈무리하도록 하자. 두리반의 고통과 투쟁은 어쩌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든 약자들이 겪는 공통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마치 우연처럼 보이는 철거투쟁 현장과 젊은이들의 만남은 사실 언젠가는 만나야 했고, 만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인 것이다. 두리반의 상근자들은 자기 밖에 있는 어떤 약자를 위해 싸우고 있지 않았다. 두리반에서의 투쟁도, 공연도, 삶도 모두 오롯이 자신들의 것이었다. 언제든, 우리가 두리반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우리는 이들이 건네는 환대의 미소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함께. 우리의 싸움을 싸우자.

*이 인터뷰는 두리반 점거농성 1주년에 발행된 소식시 “사막의 우물” 3호에 실린 바 있다.

칼국수 음악회

두리반 사태 일지

2005 3월 동교동 167번지에 칼국수, 보쌈 전문점 두리반 영업시작

2006 3월 마포구에서 두리반 일대를 지구단위계획지역으로 발표

2007 12월 두리반에 명도소송장 날아옴. GS건설의 유령회사 남전디앤씨가 시세의 열배가 넘는 가격으로 두리반 일대를 매입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짐

2008 6월 상가세입자들 임대차보호법 1심 소송에서 패소.(지구단위계획은 세입자를 보호할 의무가 없음)

2009 5월 항소심에서도 패소. 남전디앤씨는 이사비용 300만원, 100만원, 70만원을 이야기하면서 세입자들을 몰아세우기 시작 6월부터 9월까지 세입자들은 공동대처에 나섰지만 남전측의 분열공작으로 하나 둘씩 합의하고 투쟁을 접음

2009 12월 24일 GS건설의 용역 30여 명이 두리반에 들이닥치고 집기 들어내고 철판 팬스를 둘러침

12월 25일 밤 유채림 부부 철판을 뜯고 두리반 안으로 진입, 농성을 시작, 26일 오후 2시경부터 인천작가회의 이사들 찾아와 지지농성을 벌이기 시작, 28일 인천작가회의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성명서 발표 “소설가 유채림의 삶터, 두리반 식당을 빼앗지 말라’

2010 1월 11일 엄보컬, 김선수가 “하늘지붕음악회”를 시작하다.

2월 23일 독립영화집단 ‘푸른영상’에서 “화요 다큐상영회” 시작. 매주

2월 마지막 주 토요일 홍대 앞 자립음악가들 “사막의 우물 두리반” 공연을 시작하다. 매주

3월 둘째주 금요일 “칼국수음악회” 시작. 매주

5월 1일 “51+뉴타운 칼쳐 파티 두리반” 공연이 낮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진행 62개 밴드가 두리반 뒷마당, 건물 지하, 3층에서 동시 공연. 예매 1,175명, 당일 입장객 1,600여 명 등 3,000여 명이 공연 관람

7월 7일 한국작가회의 “두리반 문학포럼” 시작, 월 1회

7월 21일 두리반 단전

7월 26일 마포구청 도시계획과에서 단전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농성 시작

8월 1일 박홍섭 구청장, “두리반 사태 해결 때까지 전기 공급하겠다” 약속. 경유발전기를 보내왔으나 연료비 지급 불가 선언

8월 11일 두리반 농성 231일, 단전 22일을 맞아 국가인권위에서 기자회견 열고, 사무총장을 만나 조사관의 불성실을 질타함

8월 17일 전기공급을 촉구하는 573인 선언 의견광고를 경향신문에 개재

8월 27일 두리반 사태에 대한 111인 작가선언을 한겨레신문에 개재

8월 29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마포구당원협의회, 민중의 집이 공동으로 ‘살롱 드 마랑’에서 두리반 후원주점 개최

10월 21일 한용걸 신부 주관으로 목요 촛불미사 시작

11월 10일 69작가선언 주역들이 두리반에서 “불킨 낭독회” 개최. 월1회

11월 28일 “두리반 3층 강좌” 시작. 매주

12월 24일 두리반 농성 1주년 기자회견, 돌잔치, “두리반 36.5 막개발을 멈춰라” 음악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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