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시민 사찰

-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감시는 단지 개인의 프라이버시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정의에 대한 문제이다.”
– David Lyon, “Introduction”, Surveillance as Social Sorting, Routledge, 2003, p1.

지난 달 28일 헌법재판소의 ‘허위의 통신’ 위헌 결정이 논란거리이다.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제1항 소위 ‘허위의 통신’ 조항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반(反)사회 인터넷 유언비어가 ‘면죄부’를 누리게 되었다며 ‘법치공백’을 막기 위한 ‘대안입법’이 절실하다고 성화다.

사실 인터넷이 인류 역사에 등장한 이후로부터 이런 논란이 계속되어 왔다. 전세계가 인터넷을 둘러싸고 전쟁에 가까운 설전을 벌이고 있다. 최근 ‘위키리크스’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전쟁은 각국 정부 대 세계 시민 간의 전쟁이다. 정부는 말한다. 표현수단은 그것을 표현할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런데 인터넷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예술성을 판단할 몫이 없는 이들에게 주어졌다. 인터넷에는 몫 없는 자들이 양산한 허위사실이 판을 치고 있다. 이것은 과분하고 우려스런 사태라고, 그들은 말한다.

한국에서는 이명박 정부 전후로, 이 논쟁에 한 층을 더해 왔다. ‘인터넷’에 대한 정치적 ‘색깔론’이 그것이다. 2008년 촛불시위 이후로 많은 이들이 거리로 몰려나온 시민들을 설명하는 언어를 찾아 왔다. 국무총리실을 비롯한 이 정부의 세력 일각은 그 배후를 특정한 정치 세력으로 밝히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은 시민들이 인터넷에 떠돈 ‘괴담’에 현혹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에게 있어 정부의 의견과 다른 서술은 ‘괴담’, 곧 ‘허위사실’이었다. 정부가 인터넷 괴담을 ‘허위의 통신’ 조항으로 의율하려 들고, 인터넷 게시물에 대한 처벌 수위를 한층 높인 ‘사이버 모욕죄’의 도입을 밝힌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사찰. 누가 어떻게 허위사실을 배포하는지, 그들은 감시할 필요가 있었다.

정치권 사찰에서 민간인 사찰로

지난 해 국무총리실의 사찰 파문이 한국사회를 뒤흔들었지만 사찰은 정치권의 정적(政敵)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몇 년 동안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사찰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국무총리실 사찰 논란의 출발이었던 김종익씨 사건에 ‘민간인 사찰’이라는 부제가 붙었지만, 그가 민간인 사찰의 유일한 당사자도, 처음도 아니었다.

광우병 괴담, 조중동 광고지면 불매운동, 미네르바, 회피 연아, 천안함 괴담, 연평도 괴담까지. 대개 고소고발이 있기 전에 당국이 먼저 ‘인지’하고 사건화하였다. 과거에도 ‘막걸리 보안법’이나 일반 시민이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이 횡행하기도 하였지만, 이렇게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일반 시민 다수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아우른 적은 없었다.

이명박 정부의 공안 통치를 지켜보며 많은 이들이 ‘과거 회귀’를 말한다. 토건국가식 경기부양책이나 경찰의 고문 수사에서, 박통이나 전통 등 과거 권위주의 정권과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스타일 간에 유사점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공안 탄압은, 매우 치밀하고 집요하게, 그리고 치사하게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르다.

일반 시민에 대한 공안 탄압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인터넷 사찰이다. 인터넷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시민 누구에게나 주어진 표현 수단이고, 그만큼 일반 시민에게 주류 매체 못지않은 권력이 부여되었지만, 일반 시민에 대한 권력의 감시에도 그만큼의 기술적 역능이 부여되었다.

인터넷 사찰은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발생하지 않는다. 당신의 글 안에 그들이 염두에 두는 검색어를 포함되어 있을 때 당신은 그들의 검색 엔진에 포착된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라면 경찰과 정부에는 ‘사이버 검색·수집 시스템’, 즉 맞춤형 검색엔진이 있다. 아고라건, 블로그건, 트위터건, 여러분이 올린 게시물은 모두 그들의 ‘검색’ 대상이다.

민간인 사찰에서 시민 사찰로

당국이 ‘검색된’ 게시물 작성자의 신상정보를 알아내기란 식은 죽 먹기이다. 현행 법률에서는 수사기관이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등 ‘통신자료’를 요구하는 데 영장을 요구하지 않는다(개정 전기통신사업법 제83조). 방송통신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집계하여 발표하는 통계만으로도 인터넷 통신자료 제공의 규모가 2008년 119,280건(문서), 2009년 143,179건(문서)이다. 2009년의 경우 하루 근 문서 400개 꼴로 인터넷 이용자의 신상정보가 제공되었다는 말이다. 방송통신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문서당 평균 12.7개의 아이디가 포함되어 있으니 하루 약 5,000개 아이디의 신상정보가 제공되고 있다.

당신에 대한 다른 정보도 비교적 손쉽게 알려진다. ‘통신사실확인제공요청서’만 있으면 통화내역 조회도 어렵지 않다. 널리 애용되는 방법은 이메일 압수수색이다. 이메일 압수수색에는 법원의 영장이 필요하지만 법원이 그 견제 역할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2009년 주경복 전 교육감 후보의 7년치 이메일이 압수수색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었고, 검찰은 압수한 PD수첩 작가가 대통령이 싫다고 쓴 이메일 내용을 공표하기도 하였다. 2010년 5월 경 천안함 사건에 대해 의견을 올렸던 네티즌들 다수가 사건 발생 시점보다 훨씬 전인 2009년 1월부터 이메일이 압수수색되었다고 증언했다. 경찰은 이들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이메일에서 나타난 사상을 검증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른바 ‘사상 검증’, 곧 사찰이다.

이메일만 검증되는 것이 아니다. 2010년 벽두에 우리를 놀라게 했던 민주노동당 압수수색 사건의 경우에는, 경찰이 PC방으로 갔다. 민주노동당에 가입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들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하나씩 입력하는 방식으로 민주노동당 서버에 그 사람인 척 인증해서 해당인의 투표 기록을 열람했다고 한다. 경찰은 이것을 ‘원격 압수수색검증’이라고 불렀고 법원은 영장을 내주었다. 이런 방식이면 투표 기록만 볼 수 있겠는가. 메일도 열어보고, 쪽지도 열어보고, 구매내역도 보고, 신용카드 사용내역도 볼 수 있다. 인터넷 시대에 원격으로 보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당신의 인터넷 생활 그 자체가 사찰의 대상이다. 그렇다고 인터넷을 빼놓고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시대이니, 바야흐로 상시 감시사회의 비극이 이렇게 도래하게 되었다.

일상적 사찰

사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국내 포털이 아니라 외국 포털로 옮겨가면 상황이 더 나아질까? 확실히 이메일 계정은 다소 보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정부가 소셜네트워크를 사찰하여 시민별로 프로파일링한 문제가 논란이 된 마당이다. 나의 흔적은 게시판, 카페, 블로그, 소셜네트워크 등 인터넷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이 모든 족적이 인터넷 시대 사상을 검증당하는 소스이다.

단언컨대, 사찰은 이명박 정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는 정치권 내부의 공방 거리에 그치지도 않을 것이다. 사찰이 이명박 정부로 인해 정치적인 사건으로 불거졌지만 그 이후로도 구조적이자 일상적 문제로 계속될 것이라는 데 이 문제의 진정한 심각성이 있다.

대응은 좀더 정치적이어야 한다. 예컨대, 그들의 의도에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찰하는 이유는 대상을 위축시키고, 통제하기 위해서이다. 시민들이 농담처럼, 나도 사찰의 대상이 될까, 한번씩 생각할 때마다 공포는 조금씩 커진다. 공포가 커지면 ‘위축 효과’도 커진다. 정부에 비판적인 글을 올릴 때 느끼는 심리적인 위축은 민주주의 위축으로 이어진다. 소리내어 비판할 수 없다면, 비판할 때마다 감시의 시선과 그로 인한 댓가를 셈해봐야 한다면,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결국 문제는 민주주의에 대한 싸움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프라이버시’론의 재구성도 생각해 봐야 한다. ‘프라이버시권’은 ‘사생활’에 대한 권리로 출발하였지만 작금의 시점에는 ‘누구의 사생활’이냐가 문제시되고 있다. CCTV, 인터넷 메일, 인터넷 검색, 네트워크 구조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감시 기술 앞에서 세계는 두 계급으로 갈려 왔다. 감시하는 계급과, 감시받는 계급. 국가와 국민, 사측과 노측, 기업과 소비자, 시민권자와 이주민, 남성과 여성, 간수와 죄수, 교사와 학생… 여기서 감시는 철저하게 ‘권력관계’를 반영한다. 위기에 처한 ‘사생활’은 엄밀히 말해 ‘감시받는 계급’의 사생활뿐이다. 반면 그들의 많은 것들은 비밀 장막에 가려져 있다. 그러니 프라이버시 투쟁은 결국 몫없는 자들의 싸움일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여기서도 꿈꾸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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