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인상주의, 현대적 삶의 회화

- 고봉준

「인상주의: 모더니티의 정치사회학」(생각의 나무, 2010)

예술과 모더니티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상주의 회화의 의미는 각별하다. 인상주의는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기, 즉 오스망에 의해 파리의 대규모 도시계획이 주도되었던 1800년대 중반의 도시문화를 배경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상주의는 비단 회화의 운동에 국한된 예술적 의미 외에도 모더니티의 등장이라는 사회사적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1874년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드가가 주도한 제1차 인상주의 공동전시회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당시 ‘인상주의’라는 세간의 평에는 인상주의자들의 회화를 곱지 않게 바라보던 시선이 포함되어 있었다. 19세기 중반 파리에서 인상주의자라는 명칭은 결코 영예로운 것이 아니었다. 로스 킹이 『파리의 심판』(다빈치, 2008)에서 상술했듯이 19세기 중반 파리에서 위대한 화가라는 칭호를 받기 위해서는 역사적 장면을 세밀한 필치로 그려내는 사실적 감각을 소유해야만 했다. 19세기에는 이런 위대한 역사적 장면을 그리는 한에서 화가는 고귀한 작업으로 평가되었고, 역사화는 프랑스 미술의 운명을 좌우하는 명망 높은 기관인 아카데미 데 보자르가 승인한 엄격한 위계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정점의 한 가운데에 메소니에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역사화의 쇠퇴와 인상주의의 등장이라는 예술사적 문턱은, 그러므로 실상 메소니에와 자유분방한 인상주의자들의 대결이었던 셈이다.

인상주의와 관련된 두 편의 인상적인 회화가 있다. 앙리 팡탱-라투르(Henri Fantin-Latour)가 그린 <들라크루아에 대한 경의>(1864)와 <바티뇰의 아틀리에>(1870)가 그것이다. 쿠르베에게서 그림을 배운 팡탱-라투르는 초상화와 정물화를 주로 그렸는데,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의 초상화는 당시의 유행과 달리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모델의 내면까지 드러내는 세심한 표현으로 유명했다. 그는 인상주의 서클에 가입하여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마네를 존경했고, 그 이유에서 인상주의자들의 집단초상화 두 점을 남겼다. 그는 쿠르베의 사실주의와 마네의 인상주의, 그리고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들라크루아에 대한 경의>는 이런 배경에서 제작되었다. 바티뇰은 마네의 화실이 있던 곳이었다. 당시 마네의 이 아틀리에에는 인상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인상주의자들과 교류했던 다양한 예술가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한 시대의 예술적 혁신을 도모했던 젊은 예술가 그룹의 아지트와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팡탱-라투르는 <비티뇰의 아틀리에>의 정중앙에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마네를 위치시켰다. 이 그림에서 마네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마네의 <튈르리궁의 음악회>에서 그림 왼쪽에 앉아 있었던 자키리 아스트뤼크이고, 왼쪽부터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는 사람은 독일 화가인 오토 숄데러, 액자 앞에 있는 사람은 르누아르, 나비 넥타이를 매고 정면을 보고 있는 사람은 에밀 졸라, 옆모습의 키 큰 남자는 프레데릭 바지유, 가장 오른쪽에 얼굴만 보이는 사람은 모네이다. 이들은 모두 카페 게르보아의 멤버였다. 그들은 낮에는 각자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렸고, 밤이면 카페에 모여 새로운 예술에 대한 열정을 공유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카페에서 밤을 새워가며 열띤 토론을 벌였던 새로운 예술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으며, 그 예술의 미학적 의미는 어떤 것이었을까? 홍석기의 『인상주의: 모더니티의 정치사회학』은 이 질문들에 대해 요약적인 대답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인상주의라는 회화사적 사건에 관한 저작들, 특히 인상주의에 대한 선구적이고 위대한 업적들의 경쟁에서 불리함을 극복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이 저자의 새로운 시각이 논증보다는 기존의 학설과 입장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인상주의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표현기법’과 ‘재현대상’의 양 측면에서 인상주의의 새로움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데, 두 측면 가운데 어느 쪽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인상주의의 범위와 의미는 크게 달라지기 마련이다. 어떤 연구자들은 인상주의의 특이성을 아카데미 데 보자르와의 갈등에서 추출하려 하는데, 이 경우 다수의 인상주의 화가들은 ‘인상주의’라는 명칭에서 제외되기 마련이다. 메소니에가 주도했던 미술전에 대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대응은 결코 동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화라는 주류 미술의 규범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전람회를 기획한 인상주의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몇몇은 끝내 메소니에가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술전에 출품하여 선정되려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인상주의 회화의 본질을 재현과 투시법에 대한 비판에서 읽어내려는 시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인상주의자들이 ‘사실’이라는 해묵은 미술적 관념을 포기하기보다는 더욱 사실적인 방식으로 도시 풍경과 제2제정 하의 일상을 회화 속에 담으려 했다는 의도를 망각한 결과이다. 특히 인상주의 특유의 표현기법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때, 우리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화화의 대상으로 선택했던 것들의 사회사적 의미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연구들은 마네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또 어떤 연구들은 표현기법의 차원에서 인상주의 회화를 설명하며, 또 어떤 연구들은 도시적 일상과 풍경이라는, 즉 역사화에 대한 반발로서의 도시와 일상이라는 제재를 중심으로 인상주의의 윤곽을 그리고 있다.

홍석기의 『인상주의: 모더니티의 정치사회학』은 이러한 반론과 비판을 의식하고 있는 듯하며, 이런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의 예술적 방점보다는 그것들의 사회학적 의미에 집중함으로써 ‘정치사회학’적 의미를 추출하는 방향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가 일종의 예술적 아방가르드였고, 국제적 양식의 일부였으며, 심지어 일본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저자의 지적은 아베 요시오의 『군중 속의 예술가』, 로스 킹의 『파리의 심판』, 무엇보다도 T.J.클락의 『현대적 삶의 회화(The Painting of Modern Life)』를 조금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인상주의가 국제적 양식의 일부이자 동시대 예술운동의 핵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요시오와 킹의 논의를 통해 증명되었고, 인상주의 회화가 근대세계에 대한 해석자로서의 역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클락과 보들레르의 논의를 통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회화와 모더니티의 연속성을 새로운 시각에서 살피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문법과는 다른 방식의 질문이 필요하며, 그것은 개론적인 수준의 정리와 요약이 아니라 인상주의에 대한 보다 폭넓은 방증과 새로운 해석의 틀이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홍석기의 이 책이 클락의 저서에 대한 번역이었거나 친절하고 상세한 주석서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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