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정유미 론

- 황진미

2010년 한해 동안 네편이다. 정유미 주연의 영화 <내 깡패 같은 연인>, <옥희의 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 <카페 느와르>가 연이어 개봉하였다. 2009년에는 주연작 <차우>, <첩첩산중>, <그녀들의 방>을 비롯해 무려 9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장편, 단편, 주연, 조연, 카메오 가리지도 않는다. 정유미는 근래 충무로에서 가장 많이 캐스팅되는 여배우일 것이다.

청춘의 찰라적 떨림을 잘 포착했던 김종관 감독의 단편<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에서 해사시한 얼굴로 앳된 눈망울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라 연신 뺨을 발그레 물들이던 그녀를 잊을 수 없다. 흡사 다큐멘터리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그녀의 눈빛은 수줍고 서툰 짝사랑의 설렘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정유미가 아니었던들 아스라한 봄 햇살 같던 그 느낌을 어찌 전달할 수 있었으랴.

책갈피 사진 같던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소녀’ 이미지는 <사랑니>(2005)에서 두께를 얻었다. 서른 살의 주인공의 회상인 듯 존재하던 17살 조인영이 현실에 불쑥 나타났을 때, 관객들은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은 첫사랑을 추억하며 활용하는 말랑한 장르물 인양 진행되던 영화가 기실은 첫사랑 판타지를 거부하고 불온한 현재의 욕망에 대해 말하는 성숙한 영화임을 알아챈대서 온 게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안온한 상상의 시공간에 있을 법한 소녀가 갑자기 과거/현재, 상상/실제의 장막을 뚫고 현실로 뛰쳐나온 듯한, 그녀의 불안하고 상기된 표정에서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정말 세상 끝 어디에선가 뛰어 온 것처럼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우왕좌왕 자주 핸드헬드 카메라의 프레임을 벗어났다. 관객들은 살짝 현기증을 느끼며 소녀의 낙망에 아찔하게 교감하였다. <사랑니>는 정유미에게 신인여우상(영화평론가협회상/백상예술상)을 안겼지만, 그때만 해도 정유미가 이렇게 많은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랑니

정유미의 해맑은 눈매는 <미술관 옆 동물원>시절의 심은하를 떠올리게 하고, 귀엽게 삐죽 내미는듯한 윗입술은 <고양이를 부탁해>시절의 배두나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예쁘면서도 일상적인 느낌이 난다. 이는 양날의 칼이다. 정유미의 외모는 주목성이 없고, 관능성이 없고, 정형성이 없다. 그녀의 얼굴은 주위를 집중시키거나, 한번 보면 잊히지 않는 아우라를 발산하지 않는다. 말간 얼굴과 여린 몸매는 성적인 매력과 거리가 있으며,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또한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기대되는 안정감이나 노련함이 없이, 불안스럽게 흔들리고 꽉 채워지지 않은 여백이 느껴진다. 그런 탓에 신인으로서의 풋풋함은 느껴지지만, 주연급 여배우의 위엄을 갖출 수 있을지는 불확실해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들은 그대로 장점이 되기도 했다. 주목성이 없는 얼굴은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고, 관능적이지 않은 외모는 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정형화되지 않는 그녀의 이미지는 비주류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겨, 엉뚱하고 특이한 캐릭터와 잘 어울렸다. 그 결과 <가족의 탄생>(2006)에서 배타적인 이성애관계에 묶이지 않는 ‘헤픈 여자’라는 비전형적인 인물이 재현될 수 있었다. 그녀는 어디서 본 적도 없고, 상상된 적도 없는 캐릭터였지만, 정유미의 채연은 세상 어딘가에 저런 여자가 있을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가족의 탄생>이 핵심적으로 제시하는 ‘기이한 대안성’이 그녀의 몸을 통해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가족의 탄생

<가족의 탄생>에서 정이 많으면서도 자아가 굳건한 외유내강의 이미지는 이후 좀 다르게 변주된다. 여리면서도 강단 있어 보이는 그녀의 외모는 사회 변두리의 소외받는 루저이면서도 자신만의 꿈이나 오롯한 자존감 하나만으로 버텨내는 캐릭터들과 잘 맞는다. <좋지 아니한가>(2007)에서 원조교재로 생계를 꾸리면서도 발레리나를 꿈꾸는 소녀나, <그녀들의 방>에서 고시원 쪽방에 살면서 번듯한 집을 꿈꾸는 학습지교사나,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캐리어우먼의 꿈을 놓지 않는 취업준비생의 모습은 모두 정유미의 외유내강의 이미지가 활용된 예이다. 정유미는 <그녀들의 방>에서 노숙자와 같은 위상에 놓이고,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3류 건달과 나란히 놓이지만, 그것이 무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안쓰럽게 매달린다. 그러하기에 그 꿈들은 허황되게 느껴지기보다, 현실을 지탱해주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보인다.

<그녀들의 방>에서 정유미는 자기 주검이 방치되는 것이 두려워 노숙자와 그녀를 집에 들인 친절한 아주머니의 죽음을 방기한 채, 시체와 더불어 큰집에 사는 것을 택한다. 그녀의 ‘징그러운’ 욕망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던 건 정유미가 온몸으로 뿜어내는 절실함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내 깡패 같은 애인>의 다소 동화적인 해피엔딩도 흠결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정유미는 가난한 청춘의 표상으로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더 큰 공로는 3류 깡패 박중훈과의 언밸런스한 로맨스를 설득력 있게 만든 데 있다. 연배와 계층차가 큰 남자가 품는 미묘한 애정이 희화화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보이게끔 하는 여배우가 정유미 외에 누가 있을까. 이런 ‘정유미 효과’는 <차우>에서도 발휘된다. ‘B급 감수성’으로 충만한 엉뚱하고 괴팍한 영화 <차우>에서 윤제문이 정유미에게 반하는 것이 사심 없고 심지어 귀엽게 느껴졌던 것은 정유미가 지닌 맑고 편견 없어 보이는 특이한 이미지 덕분이었다.

내 깡패같은 애인

그녀의 편견 없어 보이는 해맑음을 짓궂을 정도로 뒤집어 활용한 예가 <첩첩산중>과 <옥희의 영화>이다. 정유미의 예쁘면서도 일상적인 얼굴은 어느 집단에나 한두 명씩 있는 ‘얼핏 보면 평범하지만, 가만히 보면 참 예쁜’ 여자를 표상한다. 그녀의 주위엔 ‘그녀의 예쁨을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무구한 남자들이 꼬인다. 직선적이고 저돌적인 대학생 진구가 옥희에게 “네가 제일 예쁘고, 제일 똑똑해. 다른 애들은 다 유치해”라고 말하며 들이댄다. 왜 아니겠는가? 문제는 그걸 아는 사람이 진구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학교에 무슨 약 탔나봐. 다들 나만 좋대”) 그리고 그녀의 “유치하지 않은 똑똑함”이 바로 유치한 또래 남자들이 아닌, ‘나이 든 남자’를 향하게 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문 앞에서 밤을 샌 진구를 이부자리로 불러 안아주면서, 동시에 송교수와 속 깊은 정을 나눈다. 그녀는 오는 남자를 막지도 않지만 그 마음을 다 주지도 않는 다면적인 욕망을 지닌 여자를 구현한다. 그녀의 다면적 욕망은 로맨틱코미디에 등장하는 ‘내숭’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녀는 매순간 자신의 욕망에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게 몰입하며, 가식이나 계산 없이 자신의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최근작 <조금만 더 가까이>는 순간적인 감정에 몰입하는 캐릭터의 끝을 보여준다. 그녀는 변심한 남자에게 스토커처럼 나타나, 모든 여자들이 속으로는 골백번을 더 되뇌었으나, 자존심이 상하고 망가지는 것이 두려워 감히 해보지 못한 모든 ‘진상’ 발언들을 토해낸다. “나 연애 불구됐어. 넌 벌 받아야 돼”라고 말하며, “밥 사 달라, 같이 자자”고 매달린다. 그녀는 새로 만난 애인이 있지만, 그가 자신에게 ‘올인’하지 못하자 옛 애인에게 “너 때문”이라고 말하는 중이다. 이토록 모순된 욕망 앞에서 그녀는 거짓이 없다. “걔랑 안 되면 나 또 괴롭히러 올 거야”라고 말하는 그녀의 솔직함 때문에 오히려 미워할 수가 없다.

순간적인 감정에 몰입하고 자기 감정에 솔직해서 아무리 이상한 소리를 해도 현실감이 있는 캐릭터, 가만히 보면 참 예쁜데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린 이미지, 하지만 마음 속에 몇명의 다른 남자를 품고 있는지 잘 모르겠는 중층적인 느낌, 등등이 어우러져 <카페 느와르>의 불가해한 여자, 선화의 리얼리티가 구축된다. 정성일은 처음부터 정유미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말하며, 정유미가 아니고서는 자신의 대사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를 상상할 수 없었다고 첨언하였다. 과연 그러하다. 정유미는 무려 12분에 달하는 ‘나홀로 롱테이크’의 대사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치는가 하면, 느닷없이 인도음악에 맞춰 진지한 춤을 춘다. 영화에서 정유미는 실존하는 인물이라기보다 텍스트가 말하려는 모든 이미지들이 총체적으로 육화된 캐릭터이다.

그녀는 (정성일의 표현을 빌자면) ‘책의 리얼리즘’을 충실히 구현한다. 정유미는 19세기 상트뻬째르부르그를 걷던 나첸스카의 신명이 지핀 듯, 등불을 들고 총총이 2008년의 청계천을 걷는다. 그곳에서 깡그리 말소된 과거가 희미한 등불처럼 되살아나 강팍한 현재와 중첩된다. 그녀는 절박하고 아득한 심정으로 상실된 과거를 가까스로 끌어당기고, 마침내 그 품에 안긴다. 그녀를 잃은 신하균은 망연자실. 죽을 수 밖에 없다!

카페 느와르

충무로는 지금 ‘얼핏 보면 평범하지만, 가만히 보면 참 예쁜’ 정유미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다. 오직 ‘나만이’ 그녀의 예쁨을 알아보았다고 착각하는 무수한 ‘진구들’이 그녀의 문 앞에 줄을 서는 중이다. 자, 줄을 서시오~

응답 2개

  1. 유미찡말하길

    직장의 신 보고 정유미에게 빠져들었는데…

    알아가면 알아 갈 수록 더 깊게 빠져드는거 같다

  2. 일월애말하길

    정유미는 정말 사랑스럽고 기대됩니다~ 얼핏 보면 평범하지만 가만히 보면 참 예쁘다. 정곡을 찌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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