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를 그리며.

- 김융희

다시 새 해를 맞았다. 지난 해를 생각하면, 뿌듯하여 좋은 기억보다는 아쉽고 안타까웠던 일이 앞선다. 지난 해의 일로 아직도 마음에 남아 아쉬운 일들은, 서해의 잔학 무모한 북측의 도발 행위와 반달곰의 동물원 탈출, 그리고 오지의 땅 수단에서 아름다운 봉사를 펼치다 선종한 이태석 신부를 떠올리게 된다.

천안함의 폭침과 연평도의 무차별 투폭사건은 지울 수 없는 아픈 상처로 남는다. 그같은 동족의 짓을 떠올리기 조차 저주스럽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벌벌 떨린다. 자유가 그리워 호강과 극진의 대우를 마다하고 우리를 탈출한 서울공원 반달곰의 이후 소식이 궁금하며, 그토록 무사 탈출을 기원했건만 끈질긴 인간의 그물망에 걸려들었다는 아픈 소식이 애잔으로 계속 마음에 남아 안타깝다.

새해의 시작부터 이런 저런 우울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부담스럽다. 아쉬운 마음에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를 그리며 새 해의 덕담으로 삼을까 싶다. 지난 4월에 KBS스페샬 프로로 방영 되었고, 극장가에서는 벌써 지난 9월에 상영이 되었다는데도 나는 이태석 신부를 도데채 모르고 지냈다.

친구의 안내로, 지난 11월 30일에야 영화를 관람했다. 그리고 12월 6일에 다시 보았다. 생전에 얼굴은커녕 이름도 몰랐던 그의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리며 떠오른다. 지난 년말에는 KBS에서 올 해의‘감동 대상’으로 수상하는 등, 계속 그의 모습이 방영되고 있다. 영화도 벌써 2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 했으며, 관객이 계속 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어려운 살림에 많은 형제 자매와 함께 살았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와했으며, 공부도 잘했다고 한다.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공부하여 1987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는 1992년에 다시 광주 카톨릭 대학에 입학, 1997년 로마 유학, 2000년에 종신 서원과 함께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1999년에 남수단의 톤즈을 방문한다. 오랜 전쟁으로 주민들은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해 뻐만 앙상하다. 계속된 전쟁의 상처는, 수족이 없는 장애인들과 거리를 누비는 헐벗는 사람들,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만 앙상하다. 한 동이의 물을 얻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야 하는 아낙네와 어린이들, 학교가 없어 하루 종일 거리에서 빈둥거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에 큰 충격을 받는다. 오랜 전쟁에 시달리며 병원도 없는 가난하게 사는 이들과 함께, 이곳에서 일을 하기로 결심을 한다. 버림받는 그들을 위로하며 함께 하는 예수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보았던 것이다.

그는 학교도 없이 버려진 청소년을 위해, 비행기로 씨멘트를 사오고 맨손으로 강변의 모래를 나르며 주민과 함께 전쟁중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을 되살려, 학교를 짖고 병원과 병동을 지었다. 꼭 필요한 전기도 없어 손수 태양열 발전기를 설치하여 치료에 절대 필수품인 백신과 의약품을 보관하였다. 그는 사랑을 가르치는 성당과 같은 학교, 내집처럼 느껴지는 정이 넘치는 학교를 원했다. 만일 이 상황에서 먼저 학교를 새울까, 성당을 세울까를 하나님이 결정해야 한다면 분명히 학교를 먼저 선택하시리란 신념을 밝히기도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업으로 생각하며 초등학교에서 중고등학교를 만들었고, 절대 부족한 선생으로 영어 수학을 손수 가르치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땅 수단, 남북의 계속된 전쟁으로 200만이 넘는 사망자를 낸 참혹한 현장에서 손수 병원을 짖고 학교를 세워 병을 치료하고 청소년들을 위해 공부를 가르치고, 최악의 열악한 환경에서 매일 2~300백명의 환자를 돌보며, 도로가 거의 없는 오지를 손수 운전을 하며 의약품을 싣고 순회 치료를 다니는 기적의 놀라운 일을 감당한 것이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위한 사랑만이 희망임을 믿고, 그들의 진정한 친구임을 몸소 실천하면서 보여준 성자인 것이다.

문명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아이들에게 비디오 감상실을 지어준다. 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읽찍부터 음악을 좋와했고 음악에 소질이 있었다. 그렇지만 의사요 신부인 그가 학생들을 동원하여 35인조 브라스밴드를 만들고, 대통령 앞에서 연주를 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같기만 하다. 설명서를 읽으며 악기의 기본 스케일과 다루는 요령을 터득하여 단기간에 대원들에게 모든 악기의 레슨을 끝내며, 훌륭한 브라스 밴드를 만들었다. 그는 스스로 놀라면서 오히려 모두 것을 학생들의 공으로 돌리지만, 모든 악기를 혼자서 초보인 그들에게 가르쳐 이처럼 훌륭한 악단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를 않는다. 총을 녹여 악기를 만드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꿈을 갖고 매사를 진행하였기에 이루어진 기적이라고 믿어진다.

앞이 보이지 않아 지팡이를 짚고 걷는 한센병 환자의 발걸음엔 손과 발이 성한 곳이 없다. 다리가 부러진 환자 아이가 5일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10키로를 걸어서 병원을 찾았다. 또 환자를 위해 가족이 죽을 써왔는데 먹지를 않고 있어 이유를 물었더니 지금 아무 것도 들지 않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자기만이 들 수 없다는 8살짜리 어린이의 대답이었다. 없는 것이 전부인 이곳에서 한 식구로 살기를 바라는 신부님의 사랑과 정이 넘치는 마음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고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워서, 슬퍼서, 사람다운 삶을 보면서, 받는 감동은 종교의 영역도 무너 뜨린다. 상처 받고 버림 받는 그들을 보면서 사랑의 씨앗을 본다고 하는 그는, 특별한 의술도 없으면서 의술이 필요한 곳을 찾아 봉사하고 사랑을 베풀었을 뿐이라며 겸손해 한다. 그는 말기암의 투병생활을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이요 특은이라며, 자기가 세상의 모든 병을 앓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더 깊이 이해하기에 더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이 누리는 은총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 특별한 은총임을 강조한다. 그의 생활은 늘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 그리고 충만함으로, 오직 인간을 위해 스스로 자기의 몸을 내주고, 부활하신 그 분과 함께 하는 삶의 여정만이 진정하며 영원한 평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란 신념으로 일생의 숭고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그래서 죄악인 것이다. 그는 어쩜 예정된 길을 벌써 알았다. 초등시절 5학년 때였다. 형님이 시무하는 성당에서 기록 영화인 “다미안 신부의 일대기”를 보면서 자기도 그런 삶을 살겠다는 말을 했다고 그의 형님은 회고한다. 다미안 신부는 하와이 근처의 몰로카섬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도웁다가 자신도 한센병을 얻어 49세로 생을 마감했다. 톤즈의 한센병 환자들이 있는 라이촉 마을, 쓰러져간 초가에서 상처 투성이의 몸을 겨우 의탁하며, 자기의 병명도 모른 채 손발이 잘려 없으며, 상처가 심해도 약 한번 바르지 못한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며, 신발도 없어 피흘린 발을 보면서, 손수 일일이 발을 그려서 신발을 맞춰주었던 이태석 신부였다. 그는 48세를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지난 해 1월 14일에 선종하였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과 지금 함께 하리라 믿고 기원한다.

안식년인 그는, 2006년 고국에 왔다. 쉰다고 왔지만 그곳의 많은 것을 알려서 좀 더 도움을 구하고자 왔던 것이다. 너무도 많은 필요한 것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를 보면서 주위에서 건강 첵크를 권했으나 한사코 외면하는 그에게 결국 대장암 3기의 판정을 받았다. 남의 고통과 어려움을 위해 자기의 몸이 망가지고 있음도 몰랐던 것이다. 오히려 중병의 판정에도 그는 담담했고 빨리 톤즈를 돌아가야 한다며 톤즈를 걱정하였다. 그는 끝내 쓰러졌다. 그렇지만 홀로 감당하기는 도무지 상상이 안되는 헌신의 기적을 보여 주었고, 놀라운 한 사람의 힘이 미치는 결과는 역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함을 본다. 그는 쓰러지면서도 밝게 웃으며 할 일을 더욱 열심히 활동했다. 쓸쓸한 계절에 톤즈를 위한 자선 음악회를 열었다. 투병으로 수척한 모습을 감추면서 밝은 모습으로 부르는 그의 열창을 들으면서 나는 울고 또 울었다. 전혀 그를 만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 나는, 그 음악회에서 처음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어쩜 그리도 환하고 밝을 수 있을까? 이미 땅속에 묻힌 그였기에 비록 영화를 통해 본 그의 얼굴이었지만, 조금의 구김도 없이 보면 볼수록 편하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모습이다. 마치 형제처럼 느껴졌고, 소박한 친구처럼 지금도 곁에서 함께 있는것만 같다.

지금 톤즈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입원실은 잠겨있고, 병원문은 꼭 닫혀있어 먼지만 수북히 쌓여 있는데도 환자들이 계속 찾아와 병원을 멍하게 바라보며 서있다고 한다. 왜 그처럼 서있느냐고 물으면, 쫄리신부를 부르며 그져 눈물만 흘린다고 한다. 손가락도 없는 뭉퉁한 손으로 쫄리 신부의 사진을 쓰다듬으며, 차라리 자기가 대신 죽었으면 좋왔다며 이태석 신부의 얼굴에 계속 입을 맞추더라고 했다, 나이든 어느 할머니는 쫄리 신부만 생각하면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며 밤에 자다가도 깨면 쫄리 생각에 울면서 기도하며 밤을 세우기도 하고, 다시 잠이 들기도 한다고 했고, 다른 한센병 환자도, 쫄리(이태석신부)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며 또 눈물을 흘린다. 자기보다 더 젊은 신부를 아버지라 부르며 앞으로도 쫄리와 같은 아버지가 자기들에게는 다시 없다며 눈물을 흘린다.

말로 감동시키기는 쉬우나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의 삶 자체가 사랑이었으며, 그 사랑의 실천이 바로 일상이 되었기에 그들은 이태석 신부를 예수의 화신으로 믿고 따랐으며 깊은 영혼속의 눈물을 적신 것이다. 그는 고난의 슬픈 늪에서 피어난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과같이, 인간적인 동정심이 아닌, 그 안에 예수님이 살아 움직이는 신비의 힘을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준 것이다.

아름답고 숭고한 삶의 이태석 신부를 보면서, 나는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써 그동안 과연 무었을 했으며,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상심해 있을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와 가족에게 심심 위로의 말을 전하며, 쓸쓸한 이야기로 여러분께 새 해 인사를 드리게 되어 죄송함을 전합니다. 그동안의 성원과 관심에 감사를 드리며, 많은 기쁜 일들로 늘 웃는 새 해를 기원합니다.

응답 1개

  1. 퐁티말하길

    이태석 신부님의 삶에 숙연해집니다. 자분자분 이야기 들려주시니 더 와닿습니다. 새해 벽두에 귀한 분 알게해주어 고맙고요, 선생님도 건강하시길 빕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