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데이

아빠 사랑해?

- 매이아빠

“엄마 좋아. 아~잉. 아빠는 미워. 때~찌.” 요즘 매이는 흑백논리에 빠졌다. 좋은 건 꼭 나쁜 것과 함께 있어야 한다. 엄마가 좋으면 좋았지, 왜 그걸 꼭 “아빠 미워”로 확인하냐고~. “엄마 좋아” 하면서 엄마 뺨에 입을 맞추고는 예외 없이, 옆에 있는 내 뺨을 때리면서 “아빠 싫어” 한다. 2주일째 유나가 제주도에 내려가면서 저녁에 엄마와 노는 시간이 늘었다. 그래서 나오지도 않는 엄마 젖을 물고 빨거나 함께 동화 구연 쇼를 하거나 동요 메들리를 하는 게 새삼 엄마가 좋아진 이유일 터, 상대적으로 아빠에게서는 얻는 게 별로 없다고 여겨진 탓이다. 기껏 같이 논다는 게 만화영화 틀어주고는 자기 책 읽고 있거나 ‘아빠 친구’들 모임에 데리고 가서 꿔다 논 보리짝마냥 방치하는 거니 좋아할 리가 없다. 그래도 “아빠 싫어”가 반복되니 섭섭한 마음이 쌓였나 보다.

그저께 연구실 식구들과 저녁에 정호현 감독의 <쿠바의 연인>을 보기로 했다. 아내가 구해준 CD로, 최근에 구입한 빔 프로젝터로, 팝콘도 튀겨 먹으면서 오랜 만에 친구들과 함께 영화 볼 생각에 설랬다. 마침 내가 매이를 보는 날이라 어린이집에서 매이를 찾아와서 일찌감치 저녁을 먹이고 매이가 좋아하는 초코칩 쿠키랑 감자 스낵을 들리고 연구실로 왔다. 동욱이가 갖다 놓은 전자렌지에 안티고네가 팝콘을 튀기는 동안 빔 프로젝터로 ‘뽀로로’ 다섯 편을 보여줬다. 한껏 비위를 맞춰준 후 “매이야, 뽀로로 한 개만 더 보고 아빠 보고 싶은 거 봐도 돼?” 라고 물었다. 매이는 흔쾌히 “그래!” 했다.

드디어 정호현 감독의 <쿠바의 연인>을 틀었다. 쿠바에서 정열적인 연하남을 만나 한국에 와서 아기까지 낳은 정호현 감독은 일전에 연구실에 온 적도 있다. 그때 세살 난 남자아이와 매이는 장난감을 나눠주며 놀기도 했다. 물론, 영화에는 매이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그 곱슬머리 예쁜 눈의 남자동생이 안 나온다. 심지어 매이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말”만 나온다. 매이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연신 “뭐래? 뭐라는 거야?” 라고 물었고, 나는 첫 몇 장면은 자막을 읽어주기도 하고 장면설명도 해 주었다. 하지만 나의 ‘변사’ 노릇도 10분이 지나자 한계에 도달했다. 나는 점점 영화에 몰입했고, 매이는 점점 지루해졌다.

급기야 매이는 “집에 가자” 라고 했다. 나는 “약속했잖아. 매이 뽀로로 다 보고 나면 아빠 보고 싶은 거 봐도 된다고. 조금만 더 보자” 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매이로서는 컴컴한 세미나실에서 공주도 안 나오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말만 나오는 화면을 왜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칭얼거리면서 집에 가자고 졸랐다. 드디어 정감독의 연인 오리 엘비스가 등장했다. 나는 칭얼거리는 매이에게 정색을 하며 “매이, 아빠는 이거 보고 싶단 말이야. 좀 참고 있어” 라고 말했다. 하지만 매이는 어둠이 싫은지, 영화가 싫은지, 아빠가 미운지,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설득도, 영화도, 인내도 포기하고 매이를 들춰 안고 세미나실을 나왔다. 가방을 챙기고 차에 타는 동안, 뒷좌석에 매이를 태우고 집에 돌아오는 동안 한 마디도 안 했다. 반은 그동안 쌓인 섭섭함으로, 반은 이 기회에 아빠의 삐짐에 매이가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궁금함으로, 굳은 표정으로 매이를 향해 무언의 화를 퍼부었다. 차에서 내릴 때 매이는 아빠의 침묵과 굳은 표정이 이상했던지 “아빠, 왜 그래?” 라고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매이를 안고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뚱한 표정으로 매이가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틀어주고는 설거지를 하고 미역국을 끓였다. ‘자, 됐지? 필요한 건 다 해 줬지? 하지만 너와의 정서적인 소통은 안 할 꺼야? 너도 나한테 그랬으니까’ 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매이에게 전해졌을까? 매이는 한 동안 TV 만화영화에 빠져들었다. 정말 빠져든 건지 이 썰렁한 분위기를 달리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어서 그랬는지 가끔 만화영화의 대사를 따라 하기도 하고 나한테 와서 누가 어쨌다고 전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안 하고 하던 일만 했다. ‘이쯤 되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충분히 깨달았을 텐데….’

주방 일을 마친 나는 컴퓨터 책상에 앉아 카프카의 <성>을 읽기 시작했다. <성>의 K가 성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마을을 헤맬 무렵, TV 속 열 두 공주가 백작 부인의 꾐에 빠져 더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됐을 무렵 간헐적인 흐느낌이 들려왔다. 당장 달려가 “매이야, 미안해. 재미없는 영화 보게 해서. 괜한 자존심 때문에 아빠가 매이 힘들게 해서”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 감정교육의 끝마무리를 확실하게 해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해서 나는 모른 척하고 있었다.

급기야 매이는 설움과 회한의 울음을 터뜨리며 “아빠~” 하고 나를 불렀다. 나는 책을 덮고 매이에게 달려가 “매이야, 무서웠어? 아빠가 화나서 아무 말도 안하고 있어서 속상했어?” 했다. 매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안겼다. 나는 최종결론을 내리듯 “매이, 아빠 사랑해?” 하고 물었고, 매이는 그리 흔쾌하지는 않지만 “응~” 하고 대답했다. 유치한 공갈로 얻어낸 사랑이었다. 나는 매이를 꼭 껴안고 등을 토닥이며, ‘아이-되기’의 감정놀음이 무사히 끝났음에 안도했다.

p.s. 돌맞이 개편을 맞아 묵은 ‘매이데이’ 코너는 내리고 새롭고 참신한 일상코너가 올라갑니다. 그동안 ‘매이데이’를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매이를 만날 때는 몰라보게 커 있겠죠? “매이야 인사해야지. 안녕~”

응답 4개

  1. 아이자말하길

    아빠 엄마 사랑속에

    매이 자라는 모습,

    일상에서 가끔 볼 수 있기를…

  2. 배무늬말하길

    왠지 모르게 코끝이 시큰거리네요. ^-^
    매이 너무 사랑스러워요. 애독자였는데 이제 매이데이 만날 수 없다니 아쉽네요. ㅠㅠ

  3. 달타냥말하길

    그동안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4. 아기엄마말하길

    한복 입은 매이 참 예뿌다…무지 큰애 같아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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