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커밍아웃, 나는 보수(保守)다!

- 오항녕

생각나는 노인네

처음 《논어(論語)》〈자로(子路)〉편에 나오는 대목, 정치를 하면 가장 무엇을 먼저 하겠느냐는 질문에, 공자는 “반드시 해야 할 게, 이름을 바로잡겠는 거겠지![必也正名乎]”라고 대답했다. 그때, 뭐 이런 대답이 다 있어!, 하며 시큰둥했던 기억이 있다.

이 대목이 아니더라도, 배우고 때맞춰 공부하면 즐겁다느니,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꽁하지 않으면 군자라느니, 별로 다가오지 않던 내용이 이 노인네 말씀에는 무척 많았다. 친구가 멀리서 오면 즐겁다는 말은 그래도 수긍이 갔다. 술 한 잔 하는 날이니까. 대부분 근사한 말은 없고, 대부분 뭐 일상 얘기고, 친구, 부모, 배움, 몸가짐 이딴 거만 얘기하고 … .
‘때맞춰’가 ‘리듬 있게!’라는 뜻이고, 그렇기에 배우는 게 춤추듯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스스로 뿌듯하기 위해서는 내공이 필요하고, 잘은 모르지만, 그래서 아마 군자 정도의 내공은 되어야 남이 몰라줘도 혼자서 뿌듯할 듯하다고 짐작하게 된 것 역시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친구가 멀리서 오는 게 즐거운 것은 단지 술 한 잔 때문이 아니라는 건 비교적 오래 전에 알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 보온병 폭탄으로 히트를 친 집권당 대표 안 뭐가 전직 대통령 김 뭐를 만난 자리에서, “요즘 도에 지나치는 일이 많다”고 해서 또 한 번 네티즌들을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그가 바로 며칠 전 ‘자연산 운운’ 발언의 주인공이었던 바, 이쯤 되면 우리는 ‘도(道)’가 뭔지에 대해 심각한 혼란에 빠진다. 정말이지 길 가다보면 나를 붙잡고 ‘도를 아세요?’라고 묻는 그 분들을 붙잡고 ‘도’에 대해 묻고 싶을 지경이다. 어찌 공자가 생각나지 않겠는가.

반동? 보수?

정작 ‘정명(正名)’이 생각났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프레시안〉에서 추천하는 책을 보다가,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엘버트 허시먼 저)라는 책이 눈에 띄어 사보았다. 허시먼은 ‘보수’의 수사학(修辭學)을 역효과론(Perversity), 무용론(Futility), 위기론(Jeopardy)으로 요약하고 있다.

비꼬기는 일종의 역효과론인데, 해봐야 역효과만 난다, 취직공부 안 하고 길거리 나와 촛불시위 해봐야 저만 손해다, 이런 논법이다. 무용론은, 그 놈이 그 놈이다, 해봐야 안 바뀐다, 그게 그거다, 라고 암시하는 논법이다. 위기론은, 무상급식은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식으로 문제를 체제위기로 비약하는 논법이다. 쉬운 듯하면서도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걸려드는 프레임에 대한 비판이지라 유익하겠다 싶어서 구입했다.

그런데 책을 사고 원래 제목을 보니 “The Rhetoric of Reaction”이었다. 원래 ‘Reaction’이 ‘보수(保守)’였나? ‘반동(反動)’ 아니었나? 그렇다. 보수는 ‘Conservative’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원래 제목은 《반동의 수사학》이었던 셈이다.

내가 시시하게 영어 단어 틀리게 썼다고 따지는 거 아니다. 오히려 ‘Reaction’을 ‘보수’로 번역하게 만드는 데 한국 사회 정치지형의 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치지형의 특성 이전에 보수/진보라는 이름 자체의 모호성을 문제 삼아보자는 의미에서 걸고넘어진 것이다.

노자(老子)가 벌떡 일어날 오역

우리는 ‘Reaction’을 ‘반동’이라고 부르는데, ‘반동’은 한자로 ‘反動’이라고 쓴다. 이 번역 역시 일본 메이지 시대 이후 번역되었으리라 추측하는데, 사실 나는 이 번역이 기가 막힌 오역이라고 생각한다. ‘反動’은 어원상 《노자(老子)》 40장에 나오는 ‘反者, 道之動’, 풀자면, ‘돌아가는 것이, 길의 움직임이다.’라는 말에 나왔다. 피가 내 몸을 돌듯이, 사계절의 순환이 있듯이, 사람이 태어나면 흙으로 돌아가듯이, 그것이 우주의 길이 움직이는 양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초 ‘Reaction’은 어떤 작용에 대한 반발을 의미하며, 추세에 대한 거스름을 의미한다. reagere라는 동사에서 온 중세 라틴어 react(done again)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17c 무렵에 영어에 등장했다. 이 말은 점차 변화해야할 시점에서 변화하지 않는 태도를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짐작하듯이, 바로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체제나 가치를 유지하려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수라고는 불러도 반동이라고는 부르려고 하지 않는다. 잘 이해가 가지 않으면, 영화에서처럼 ‘보수반동’이라고 한 번 발언해보기 바란다.

허시먼은 프랑스 혁명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며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했던 사람들’이 ‘반동파(Reactionary)’였다고 정확히 관찰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가치 판단 없이 ‘반동’이란 말을 사용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그건 가능하지 않다.

선형적 역사관과 보수/진보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싫겠지만, ‘Reaction’은 자꾸 ‘보수반동’으로 사용된다. 사전에도 ‘Reaction’ 표제어를 보면 반동이란 뜻과 함께, 보수의 뜻도 같이 나온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보다 더 슬픈 건 노자 자신일 것이다. ‘反動’이 21c에는, 아니 19c 이후로는 ‘반동분자’로 쓰인다는 걸 노자가 안다면 표정이 어떨까.

이렇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열쇠는 선형적(線型的) 역사관. 자유든, 민주든, 생산력이든, 역사가 뭔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지금은 그 과정이라는 세계관과 맞물려 있다. 과거는 현재나 미래보다 항상 열등하다. 물론 선형적이라고 하다 보니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역사의 경험도 많은지라, 종종 나선형의 전개니 뭐니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코젤렉이 《개념사사전》- ‘진보(Fortschritt)’에서 지적했듯이, 근대의 진보 개념은 이전 종교적 진보 개념에서 보여준 세상의 종말에 대한 기대를 열린 미래로 바꾸었다. 자연에 대한 지식의 증가와 함께 비로소 역사적 시간이 진보한다는 해석이 가능해진 것이다. 삶의 개선이라는 목표! 그걸 종종 2만불, 4만불로 표현하기도 한다. 내가 어렸을 때는 천 불 소득이 화두였던 것처럼.

그러니 보수 아니면 진보 밖에 없는 것이다. 가만있든지 앞으로 가든지 둘 중 하나. 진보 아니면 보수=반동이기 때문에,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합리적 보수니, 중도 보수니 한다. 그러나 원래 이 선형성에 중도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에 대한 태도가 가치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어떤 미시적 시간 동안은 가능할 수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술 마시다가 대통령 욕했다고 잡아가는 군사독재 치하에 있다거나, 아이들 밥값 예산을 삭감하고 강산(江山)을 불도저로 도륙하는 폭정 아래 있다고 한다면, 이 폭정을 종식하는 어떤 미래의 시점을 목표로 설정할 수가 있다. 그럴 때 지금에 만족하고 사느냐, 아니면 설정된 미래에 더 가치를 두느냐는 가치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중첩된 혼돈, 혹세무민

그러나 이런 구분이 모든 역사의 시간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른이 되기 위해 아이가 있는 것이 아니듯이, 또 죽기 위해 사는 게 아니듯이, 모든 시간에는 그 시간 또는 시기의 존재이유, 즉 생명의 작동이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중용(中庸)은 언제나 시중(時中)이다.) 위의 사례에서처럼 목적론적 시간관이 이해되는 경우에도조차도 그러하다. 결국 미시적 시간에서만 가능한 개념을 무한한 시간의 영역으로 확장되어버린 게 근대의 진보/보수이라는 게 내 판단이다. 그런 만큼 당연히 허술하기 짝이 없는 개념일 수밖에.

더욱 문제인 것은, 한국 사회는 20c에 겪은 적지 않은 굴곡 때문에 그나마 보수/진보 개념이 한층 뒤틀렸다. 그러나보니, 지네 나라 군사작전을 지네 맘대로 하자는 전시작전통제권조차 딴 나라에 맡기자며 벌건 대낮에 시청 앞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것도 보수, 공영방송 앞에서 가스통을 놓고 불을 당긴다며 행패를 부려도 보수, 서울시 겉치레할 돈은 있어도 아이들 밥 좀 그냥 줄 돈은 없다고 버텨도 보수가 된다. 간단히 말하면, 매판, 부패, 후안무치가 보수의 탈을 쓴다.
이렇게 보수가 애매하고 ‘폭 넓게’ 규정되다보니, 진보의 스탠스가 덩달아 모호해졌다. ‘이런 보수’와 구별하려다 보니 정작 보수인 사람이 진보에 들어가 있고, ‘이런 보수’에 섞여 있는 사람은 ‘이런 보수’와 자기를 구별하려고 진짜 보수라는 뜻에서 합리적 보수니, 중도 보수니 하나보다.(말하는 나도 헷갈린다.) 그 태생적 선형성 때문에 답답하고 협애한 개념인 진보/보수의 성격이 이런 모호함으로 인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군자/소인, 왕도/패도

보수/진보라는 구분은, 선형적 역사관과 거리가 멀었던 과거 동아시아에서 정파를 구분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우선 시간이 2010년 다음에 2011년, 이런 식으로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즉 ‘반동’이야말로 ‘길[道]’였기 때문에 시간의 선후로 정파가 구분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동아시아에서는 공동체의 삶에 대한 기여 여부, 제도나 형정(刑政)과 인간의 자발성에 대한 태도에 따라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고, 그에 따라 군자당, 소인당으로 나누는 방식을 취했다. 예컨대, 공직에 있으면서 자기 기업에 혜택을 주거나 자기 딸을 취직시키면 소인배, 안 그러면 군자, 이런 식이었다. 대개 소인은 소인끼리 군자는 군자끼리 어울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물론 어중간한 사람들도 있었고, 또 대개 소인당이 이기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잘 알려진 사례가 중국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을 둘러싼 논란이었다. 흔히 왕안석 연구의 권위자라고 하는 제임스 류 이래로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진보적 개혁으로, 사마광(司馬光) 등 구법당(舊法黨)을 보수 진영이라고 불렀다. 명칭 자체가 ‘구’법당이니 당연히 우리에게는 ‘보수 진영’으로 각인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제임스 류는 송대 성리학자들의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태도를 잘 몰랐기 때문에 왕안석의 정책에 대한 당시의 논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주자(朱子)는 왕안석의 청묘법(靑苗法. 농민을 고리대에서 보호하려는 취지에서 만든 법)에 대해, “청묘법은 … 백성들에게 곡식이 아니라 돈을 지급하며, 처리 단위가 현(縣)이지 향(鄕)이 아니다. 그 자리에 관리를 임명하지 지역사회의 사군자(士君子)를 임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 읍에는 시행할 수는 있지만, 천하에 시행할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주자에게 ‘현(縣)’은 중앙 정부의 연장이자 국가권력의 표현이었다. 일견 긍정적인 것으로 보이는 국가에서 고리대에 시달리는 농민들에게 돈을 지급하는 것조차, 국가 중심의 해결방식이라는 이유로 비판되었다. 돈은 국가에서 통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그러므로 주자는 시폐(時弊)를 국가 중심으로 해결하려는 시도, 즉 지역(향촌, 마을)의 자발성에 기초하여 해결하지 않는 시도를 거부하였다. 왕안석의 개혁은 곧 국가권력의 강화, 법제의 강화를 의미하였고, 패도(覇道)로 가는 길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나보다 오른쪽은 없다

왕안석의 신법을 둘러싼 당대의 논쟁을 보자면, 변화에 대한 철학에서 작금의 보수/진보가 송나라 지식인들보다 깊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뿐만 아니라, 변화나 개혁이 보수/진보 어느 쪽의 전유물인 것도 아니다. 더욱 문제는 이 혼란스러운 보수/진보 용어를 계속 써야하는가 하는 점이다. 불행히 일단 당분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최소한의 줄을 그어놓는 편이 좋을 듯하다.

나는 사회적, 생물학적 재생산단위인 가족의 존재를 중시한다. 적어도 현재의 생물학적 진화 수준이 유지하는 한 새끼의 양육을 위한 안정적 기본 단위는 가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지구상에, 그리고 한국 땅에 인간의 개체수가 넉넉해졌으니만큼, 재생산구조를 갖춘 가족이 유지되는 한 굳이 여러 가지 변형태의 가족을 부정하지 않는다.

한편, 그 가족의 유지, 사회적 재생산의 유지를 위해서 사회가 안정되기 바란다. 예측할 수 있는 경제활동이 보장되지 않으면 사회를 전복하려는 불안세력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노동자 같은 월급쟁이, 농사를 짓거나 구멍가게를 하는 자영업자들이 이만하면 살만하다는 느낌이 드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그렇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련의 정책을 방해하는 불순세력은 교육을 통해 교화하고, 그래도 안 되면 법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

그러자면 당연히 손상익하(損上益下), 많이 버는 사람들에게 덜어서 많이 못 버는 사람들에게 보태주어야 한다. 그래야 재정이 안정된다. 재정=세금 말이 나왔으니, 군대 얘기도 하고 가자. 당연히 보수는 군대를 가야한다. 아파서, 집안이 어려워서 군대를 못가면 안타까운 마음에 규정된 방법으로 다채롭게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특히 아프다든지 하는 사소한 이유로 군역을 회피한 경우, 공직 진출에 심각한 페널티를 매겨야 한다. 종교, 사상 등의 이유로 군역(軍役)을 거부하는 성원에게 군역을 강요하는 것은 보수다운 태도가 아니다. 기꺼이 내 자식을 대신 보내고, 다른 방식으로 그 성원이 사회에 기여할 길을 찾는다.

무엇보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살면서 축적한 공통의 느낌, ‘그러면 못 쓴다’에 들어가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거짓말을 하지 말되 어쩌다 하게 되었으면 뉘우친다.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되 어쩌다 하게 되었으면 뉘우친다. 없는 사람이라고 깔보지 않고, 못 가진 사람이라고 업신여기지 않는다.

몇 년 전, 가까운 후배는 내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형은 보수인데, 남들은 형을 진보로 알고 있어요.’ 한동안 부정했는데, 이제 그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한다. 난 보수다. 난 인간들이 수천 년 쌓아온 삶의 지혜와 가치를 신뢰한다. 여기서 출발한다. 그러니 앞으로 위에 정리한 정도가 안 되는 자들은 제발 보수라는 말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수’인 내 자존심이 상한다.

추신 : 이미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위의 글은 그 자체로 질문이다. 그런데 질문 하나 더 얹어야겠다. 명색이 역사학자인데, 자신이 책임질 답변을 떠넘기는 듯해서 죄송하다. 그제 전주에서 올라오는 길에 버스가 천안삼거리휴게소에 멎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시는데, 옆에서 초등학생 몇이서 오뎅을 먹으며 떠들고 있다. 여행을 다녀오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가 내 귀에 들어왔다. “니들 구제역이 왜 자꾸 퍼지는 지 알아?” 그중 한 아이가 심각하게 물었다. 마음이 무겁던 차에 호기심을 자아내는 질문이기에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 “이게 다 쇠고기, 돼지고기 수입해올려고 그러는 거다. 우리나라 소, 돼지 다 죽어버리면, 수입해오는 수밖에 더 있냐! 미국에서 수입해올려고, 그래서 퍼져도 놔두는 거야!” 단호한 그 아이의 해석도 해석이지만, 다른 애들 반응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아이의 해석이 사실(fact)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 초딩들의 민심 자체는 사실로 보아야할 듯한데,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신지. 그런데 이런 역사학자의 직업적 질문 말고, 정말 인간이 다른 동물에게 이래도 쓰는 걸까?

응답 2개

  1. 퐁티말하길

    저도 보수하고 싶어집니다. ㅎㅎ 인간들이 수천 년 쌓아온 삶의 지혜와 가치를 구수한 말투로 전해주셔서 잘 읽고 있습니다.

  2. 어진맘말하길

    지극히 상식적인 가치와 행동들이 진짜 보수라는건데 우리사회는 이걸 진보라 착각했네요…그럼 지금 보수라고 지껄이는 저 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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