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사교육에 흔들리지 않겠다

- 최경화(세 아들의 엄마)

아들이 셋 있다고 하면 “밥을 안 드셔도 배부르시겠어요.” 하며 부러워했던 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다. 요즘은 대놓고 안됐다는 표정을 짓는 건 물론이고 아들 하나당 돈이 얼마인데 하며 빠르게 셈을 하느라 눈동자가 흔들린다. 유치원부터 시작하는 사교육비용에 여차하면 보내야하는 어학연수 혹은 조기유학, 게다가 결혼자금까지 생각하면 아이하나도 등이 휠 지경인데 셋이라니 어찌 흔들리는 게 눈동자뿐일까. 하지만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과 게으름으로 주위의 염려보다는 한결 맘 편하게 세 아들, 찬찬찬(이름이 모두 찬으로 끝난다)을 키웠다.

지금은 대학생인 큰 찬은 어려서부터 유난히 고집이 세고 조심스러운 면이 있었는데, 말은 청산유수로 하면서 그림책의 토끼를 가리키며 “이게 뭐야?” 하면 도통 대답을 하지 않았고 놀이터에 가도 선뜻 뛰어들어 신명나게 놀지 않고 그저 그네 지지대를 붙잡고는, 가만 놔두면 1시간도 좋고 2시간도 좋고 아이들 노는 것만 뚫어져라 보곤 했다. 남다른 아이의 행동에 큰 아이를 키우는 많은 부모가 그렇듯이 꽤 애를 태웠었다. 그러나 연달아 태어난 두 동생과 특히 둘째 녀석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아픔 후에 난 몰라보게 여유로워졌다. 아이들이 저마다의 성장 시계와 욕구를 갖는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된 것도 이때부터고, 유아기 때부터 인지공부에 열 올리는 부모들 틈 사이에서도 그리 불안하지 않았었는데 공부는 집중력이고 그것은 정서의 안정에서 온다는 것을 둘째로부터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큰 놈은 왜 토끼를 토끼라 하지 않느냐고 꽤 시달림을 받았을 거다.

둘째 덕에 우리 아들들은 누구보다 편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치원도 또래보다 늦게 가고, 집에서 하루 종일 노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는데도 눈치도 빨랐다. 어린 녀석이 친가에 가서 할머니께서 “아침 먹었냐?” 하시면 “네” 하고, 외가에 가면 “아니요‘ 라고 답하질 않나, 학교에서도 알아서 행동을 잘해 친구한테도 인기가 좋았다. 난 사회성이 꼭 큰 그룹 안에서만 배워 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린 시절의 편안한 성장이 오히려 더 영향을 주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터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의 그 설렘과 긴장을, 고개를 쳐들고 창문 넘어 본 첫 수업, 도화지에 자기 이름을 크게 쓰는 거였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이름 쓴 종이를 칠판 가득 붙여 놓았는데 우리 아들의 이름이 선명하게 내 눈에 들어왔다. 삐뚤빼뚤 자신 없어 꼬딱지 만하게 적어 놓은 이름! 그렇게 한글을 모르고 입학한 아이의 고군분투가 시작된 것이다. 왜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지 않는지 화도 나고 살짝 아이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큰 아이는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여 한 달이 가기 전에 한글을 떼었다. 그러나 그것도 아이 나름이다. 막내 녀석은 여름방학이 다가오도록 예쁜 짝꿍이 알림장을 써줘도, 받아쓰기를 10점을 받아도, 늘 여유롭게 학교를 다녀서 오히려 태평한 엄마가 살짝 걱정을 할 정도였다.

큰 아이는 학원은 다니지 않았어도 몇 번의 사교육 경험이 있다. 4학년 때인가, 같은 반 친구들 서넛이 그룹이 되어 글쓰기 수업을 했었다. 두어 달 재밌게 하는 것 같더니 하루는 오더니 도저히 못하겠단다. 시간마다 그 날의 주제에 맞춰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단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쌍문동 작은 산 밑에 있었고 학교가 끝나면 산을 놀이터 삼아 싸돌아다니는 게 일이었던 아들놈이 그날 도토리를 구워 먹겠다고 산에다 불을 낼 뻔했던 어마어마한 일을 겪고는 그 흥분을 꼭 글로 옮겨야 했는데도 담 주에 있는 독후감 대회에 대비해 독후감을 써야 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뒤에도 한 번의 경험이 있다. 아는 분이 역사 수업을 해 주시겠다고 하여 역시 친구들 몇이서 시작했는데, 수업내용이 궁금하여 물어 보면 계속 문제를 풀었단다. 눈치가 보여 한 달을 채우기는 했는데 그렇게 기계적으로 문제를 푸느니 무식한 게 났겠단 생각이 들었었다.

남편과 나는 참 여러 면에서 다르다. 남편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함에 모든 일을 치밀한 계획 하에 진행하는데 비해, 나는 늦게 자고 잘 안 일어나며 무조건 일을 저지르고 후에 셋팅해 나가는 무모함이 있다. 또 남편은 돈 계산이 엄청 빠른데 난 항상 좀 느리고 셈법이 이상하다. 그래도 우리 둘이 의기투합 하는 것은 아이들 교육 문제다. 우린 부모가 좀 모자라도 아이들에게 훌륭한 선생님이 될 수 있다 생각하고, 내용이 설혹 완벽하지 않더라도 아이들과 논쟁하길 즐겨한다. 아이들과 규칙을 정할 때도 우린 어른이란 특혜를 과감히 벗어 던지고 동등하게 해왔다. 가끔 이것이 괴롭긴 하다. 드라마를 마구 보고 싶을 때나 강아지 산책을 빼 먹고 싶어도 요놈들 눈이 무섭다.

그래도 아이들이 우리의 이런 노력을 알아주긴 한다. 공부에 초연하던 큰 아들이 고2가 되어 갑자기 대학을 꼭 가고 싶다고 그래서 자기도 학원을 가야겠다고 했을 때 우린 고민하다가 한번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어 허락했었다. 그리곤 “기초부터 시작하면 돼, 짧게는 6개월, 길게 1년 노력하면 공부가 진짜 너의 것이 될 거다, 아빠가 도와줄게.”라고 격려해 줬고, 학원대신 아빠의 말을 믿고 스스로 공부하는 길을 택했다. 그럼 난? 나는 내심 아이가 학원을 다니길 바란 적도 있다. 일단은 불안감에서 벗어나고도 싶었고 정말 아빠가 1년 동안 아이를 봐 줄 수 있을지 살짝 의심도 갔다. 그런데 결과는 부자의 승리였다. 사실 아빠가 한 것은 별 거 없다. 아이가 계획을 세울 때 도움을 주고 기간별로 실행 내용을 체크하고 수정하는 걸 도와준 정도, 허긴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건 잘 안다. 내가 한 것은 가끔 아이랑 아빠가 사이가 안 좋을 때 얘기 들어 주는 것, 장단 맞춰 주는 것 정도였다. 아이는 1년 후 정말 성적이 많이 오르고 자신감을 회복하더니 우린 고3때 가장 사이좋게 1년을 보냈다. 친구 수학도 가르쳐 주는 대견한 행동에 참 행복했었다. 모두 서로 신뢰하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한다.

사교육이 다 나쁘지 않다는 것은 모두 알 것이다. 공정한 룰을 무시하고 내 아이만 출발점 앞에 세우겠다는 것, 내 자식이 주류사회에 들지 않으면 낙오자가 될 것만 같은 끝 모를 조바심은 개인의 책임만이 아닌 것도 잘 안다. 그러나 독선적인 정책과 상술에 나를 맡기는 순간 우리 아이에겐 승자 아니면 패자 외엔 선택의 폭이 없어진다면? 게다가 스스로 힘을 쌓아갈 수 있음에도 기회를 주지 않았을 때 아이의 미래는? 답은 명백하다. 난 가끔 똑 같은 과정을 밟으며 최고만을 향하여 달려온 우리 아이들이 주인이 되는 날을 생각하면 온 몸이 스멀스멀 불안해진다. 아이들과 함께 다양함이 공존하는 사회를 꿈꾸고 싶고 같이 만들어 가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은 평균수명이 늘어난 이 시대에 나머지 수십 년을 함께할 훌륭한 동지 아닌가.

이제 막내아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큰 아이 때와 마찬가지로 주변에선 매우 염려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시대가 변했다고, 그렇게 땡 고집 피우다가는 아이 고생만 시킨다고….

그래도 우린 여전히 사교육에 아이의 미래를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가 스스로 힘을 얻도록 도와줄 훌륭한 멘토가 하나 더 늘었으니까. 형 말이다. 수학문제 풀이를 도와준다고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형제의 모습처럼 좋은 그림이 없다. 게다가 막내는 타고난 여유까지 선물로 가지고 태어났다. 혹 더디게 나아가도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다.

응답 2개

  1. 어진맘말하길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것을 스스로 배울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그자체로 완전한 존재라 했거늘,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이 불안한 학벌사회에서 초심의 마음을 지켜내기가 힘듭니다…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맘이 든든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2. 남매엄마말하길

    아름다운 가족이야기.. 가슴 뭉클하면서 반성하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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