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진정 친숙한 자유는 무엇일까?

- 이상미

얼마 전 자유시장경제 연구기관(이 기사가 나올 때까지 있는 줄도 몰랐..)인 자유기업원의 김정호 원장이 힙합 앨범을 냈다는 기사를 봤다. 김 원장은 힙합 그룹 ‘김 박사와 시인들’을 결성, 오는 21일 디지털 앨범인 ‘희망의 메시지’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번 앨범에 수록된 ‘개미보다 베짱이가 많아’, ‘똥파리들’, ‘챔피언 한국’ 3곡은 김 원장이 직접 랩을 맡은 곡이다. 그 중 타이틀 곡 ‘개미보다…’는 경쟁을 피하고 삶에 안주하려는 세태를 비판했다고 한다. 가사 인트로만 간략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바바밤, 바바밤…우리들의 일자리는 언제쯤…만들 사람 없고 달라고만 하니 있을 리가 있나”(코피 터지게 공부했는데 줄줄이 취업에서 낙방하는 젊은 사람들 앞에 놓고 불러 봐라. 대략 어이 상실.)

김 원장(이하 김 래퍼)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우리나라의 여론은 ‘생산성’, ‘경쟁성’ 같은 단어 대신 ‘복지’, ‘공정’, ‘상생’이란 말만 가득하다”며 불평을 토로했단다. 거기에 우리나라에 좌편향 분위기가 강하다는 코멘트까지. 그렇다면 개인의 자유로운 경쟁을 독려한다는 ‘자유 시장경제’,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보장해왔는가? 그렇진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생산물을 취득하는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을 착취해야만 가질 수 있다. 자유롭게 자신의 부를 축적할 권리가 인정되므로, 자유롭게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방식도 용인된다. 이런 게 김 래퍼가 말하는 자유의 실상이라면, 일전에 맑스를 읽을 때 조금 공부했던 공산주의에서의 ‘자유’가 훨씬 본래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자유’를 담보하지 못하는 자유주의

맑스주의의 역사를 다룬 책 『맑스주의 역사강의』에서는 자유 경쟁체제(자본주의) 안에서 별로 ‘자유’롭지 못한 두 삶의 예가 등장한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 단순노동에 종사하는 저임금 노동자의 경우. 그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옷 몇 벌과 배우자, 자식, 그리고 약간의 돈이 전부다. 교양과 지식을 쌓거나 취미활동을 할 여유도 없다. 그저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 바쁠 뿐이다. 자유 경쟁을 독려하면 더 많은 풍요를 얻을 수 있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대로라면, 이 노동자는 자유롭게 일했으니 더욱 더 많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하면 일할수록 빈곤해진다. 자유로운 경쟁은 오히려 소수의 힘 있는 자본가들이 부를 독식할 명분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힘없는 자들에게는 돈을 뺏길 자유만 있다(자유롭게 경쟁해서 얻은 돈인데, 뭐라 딴지를 걸 것인가).

또 하나의 예. 자본가들은 지적 재산에 대한 소유권이 개인들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오히려 지적 재산에 대한 소유권이 개인들을 더 빈곤하게 만든다. 신종 인플루엔자의 유행 당시 백신에 대한 특허권을 가진 특정 회사에서 이윤을 독점했다. 특허권을 가진 회사는 점점 돈이 많아지는데, 몸이 아픈 사람들은 돈이 없어 약을 사기 어려웠다. 돈이 없기에 자신의 건강을 지킬 권리도 없다. 자기 몸을 지킬 권리를 결정하는 권한에 대해 주체인 자신이 소외된다(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이런 종류의 자유만 허락한다). 어째서 이렇게 비상식적인 상황이 벌어질까?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사회의 재산은 부를 가진 소수가 독점한다. 그렇기에 이 또한 자본주의 안에서 살아가는 모두의 ‘자유’가 아니라,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들의 ‘자유’다. 이때 ‘자유’라는 말은 특정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행태를 용인하는 말로 쓰인다. 맑스는 사적 소유권이 자유롭게 보장되면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유권을 박탈당하고 소수의 소유만 늘어날 것을 간파했다. 자유주의(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맑스식의 접근이 좌편향적이라며 한마디 하는 분도 있겠지만, 전혀 운동권 출신이 아닌 내 눈에도(난 맑스 책을 출근길에 잠깐 끄적거리며 볼 수준일 뿐이고) 맑스가 이해한 자본주의의 착취 메커니즘은 매우 유용해 보인다.

맑스의 공산주의가 말하는 자유

김 원장이 싫어하는 ‘복지’, ‘상생’, ‘공생’이란 말은 상당 부분 맑스가 말하는 공산주의 사회의 미덕과 맞닿아 있다(공산주의식 ‘자유’로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라, 어째 본래 의미의 자유를 맑스의 공산주의가 더 잘 설명하고 있다고 느껴진다는 거다). 공산주의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이지만 – 반동분자를 색출해 강제수용소에 보내거나, 정부가 모든 산업기관을 독점해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재산을 분배하다보니 사람들이 일 안 하고 게을러진다던가 – 그것은 실제 맑스가 언급한 공산주의와는 상당 부분 다르다. 맑스는 사회의 재화를 만들어내는 생산수단을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 공산주의에서처럼 국가 독재도 아니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게을러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진행되면서 생산수단의 독점이 와해되고, 그로 인해 착취 구조가 만연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복된다고 봤다. 생산력도 자본주의에서보다 더 발전해 더 풍요로운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예상했다.

맑스는 공산주의 사회가 물질적인 부의 확대가 전제되면서 감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풍요로운 사회임을 말한다.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연합체.” 한 사람의 자유가 모두의 자유와 연결되는 사회, 특정 소수가 아닌 모든 구성원에게 물질적 풍요의 자유가 주어지는 사회. 이것이 바로 맑스가 그린 공산주의 사회다. 개별 존재의 진정한 자유는 이런 사회에서 보다 활성화 될 것이 분명하다.

자본주의 구조를 넘어

자본주의가 개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방식을 맑스식으로 좀더 살펴보자. 맑스는 자본주의가 반복 재생산 되는 근거로 ‘잉여가치’를 들어 설명한다. 그는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붕괴할 거라 생각했는데(슬프게도 아직까지 굴러가고 있지만), 그 필연적인 이유가 잉여가치에 있다고 봤다. 잉여가치를 익숙한 단어로 바꾸면 이윤, 즉 기업이 얻는 이득이다. 이 이윤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핵심이다. 맑스는 이윤이 노동이 아닌 노동력에서 나온다고 봤다. 만약 이윤이 노동에 대한 대가라면, 노동자들은 자신이 일한 만큼의 결과를 모두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 결과에 대한 임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노동 인력에 대한 임금을 지불한다. 노동의 결과로 나온 수익의 일부를 임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는 자본가의 몫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이윤을 만들기 위해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지불하지 않는 부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맑스가 파악한 이윤(잉여가치)의 본질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아무리 착한 자본가나 똑똑한 노동자라 하더라도 착취 구조를 개선할 수 없다. 각자가 속한 사회 구조 자체가 착취에 기반 했으며, 착취를 기본 속성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 문제를 빈부격차의 문제로만 파악하려고 했다. 인간의 도덕성을 높이고 사회를 개량하면 사회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맑스에게 착취로 인한 사회문제는 도덕성 함양으로만 극복될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의 본질인 생산양식 자체가 착취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빈부격차를 줄인다고 문제의 본질이 해결된다고 보진 않았던 것이다. 맑스는 착취에 기반 한 생산양식의 존재 이유가 소수에게 생산수단이 독점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봤다. 이런 맥락에서 생산양식을 바꾸는 수단으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를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개인 소유권을 획득할 자유를 무시하지 않았다(이 부분은 아직도 상당 부분 맑스에 대해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 중 하나다). 맑스는 “공산주의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폐지하되, 사회적 생산물을 취득할 힘을 누구로부터도 빼앗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적 소유에 대한 통찰은 김 래퍼보다 맑스가 한 수 위다.

김 래퍼가 전하는 진부한 희망

사실 김 래퍼가 요즘 사회에 좌편향적 성향이 만연했다고 지적한 부분이 어느 지점인지, 내 부족한 머리로는 파악이 잘 안 된다.(무상급식부터 마음에 안 드남?) 전통적인 공산주의 성향을 보고 좌파라 하는 걸까, 아니면 우파라고 주장하는 세력에 반대하는 정책을 지지해도 좌파로 부추길 때의 그 좌파를 말하는 걸까. 확실한 것은 김 래퍼가 선글라스를 끼고 등장하던, 필 충만한 롸커로 등장하던 간에 요즘 젊은이에게 매우 촌스럽게 여겨질 거라는 사실이다. 이미 젊은이들은 자유주의 경쟁의 미덕이 만연한 사회에서 질릴 만큼 살고 있다. 체득한 진리를 또 한 번 말해봤자 잔소리로 들릴 뿐이다(그나마 아이유와 임슬옹의 ‘잔소리’처럼 사랑스럽게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입시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은 이미 질릴 만큼 자유 시장경제 논리에 길들어져 살아왔다. 그렇게 대학까지 다녔는데 졸업 후 취직은커녕 세상에 따귀만 맞고 산다. 무일푼인 젊은이들은 세상이 있는 자들에게만 너그럽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안다. 피 터지는 경쟁 속에서 서로 제 살 깎아가며 올라가는 게 진정한 자유라고? 아무리 김 래퍼 아저씨가 친절하게 자유진영의 전도사가 되겠다며 설쳐도, 랩 속의 메시지는 용도 폐기된 것으로 치부되는 맑스의 공산주의보다 공허하게 들린다. 이건 정말 맑스 공부를 안 하거나 손톱만큼 밖에 못했어도, 경험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응답 1개

  1. 지나가다말하길

    ‘개미보다 베짱이가 많아?” 정말 ‘주먹’을 부르는 노래네요….공산주의가 추구하는 풍요란 풍요로운 소유가 아니라 풍요로운 존재라는 의 말이 참 와 닿았었는데, 자유 역시 소유의 자유가 아니라 존재의 자유를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참, 좋은 서평이예요. 잘 보았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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