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새해에 권하는 금욕주의

- 고병권(수유너머R)

닭고기를 끊은 지 9년이 되어갑니다. 어떤 일을 결심하고 군말 없이 그대로 행한, 제 삶에서 아주 드문 일 중 하나입니다. ‘내게 이런 힘이 있었다니’ 하고 나름 대견하게 생각하는 중입니다(^^). 그 계기는 사실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당시 수유너머 회원 모두가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던 ‘케포이필리아’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거기서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 고기의 대량 생산과 유통, 소비 시스템이 갖는 각종 폐해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기도 했습니다만, 제 결심을 추동한 것은 그런 사회과학적 분석이 아니라, 우리가 동물들에게 지옥 갈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동물들의 지옥이 곧 우리의 지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요. 당시 고기를 무척 좋아하던 저로서는 뭔가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마 수유너머 안에서 공식적으로 육식 요리가 금지된 것도 그 때 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 결심은 간단하고 소박했습니다. 제가 즐겨먹는 소, 돼지, 닭 중 하나를 끊겠다는 거였죠. 어느 것을 포기해야 하나 많이 망설였습니다(^^). 결단을 내리기로 한 주에 어느 패스트푸드점에서 먹은 닭고기가 계기였죠. 뼈도 까맣고 고기도 이상하고. 그때 닭을 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9년이 흘렀습니다. 사위에게 닭도리탕을 해주시던 장모님께 민폐를 끼쳤고, 저희 가족들도 저 때문에 식당에서 닭요리 시키는 걸 피하게 됐지요. 닭요리를 잘 하시는 저희 어머니는 타조나 하다못해 오리를 찍지 왜 닭이냐고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기도 하셨죠.

처음에는 맥주집에서 프라이드치킨을 뜯는 동료들 옆에서 군침 삼키며 핀잔을 들은 적도 있고, 뷔페에서 우연히 집어든 샐러드에 닭고기가 들어있는 걸, 일부러 고른 게 아니라며 스스로 위안을 하고는 기꺼이 먹기도 했습니다. 하여튼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처음엔 바늘로 허벅지를 찌르는 심정이었습니다만, 언젠가부터 닭고기가 그다지 당기지 않았고, 이제는 조금 싫기도 합니다. 몸의 판단이 바뀐 거지요. 욕망을 힘들여 억제할 필요가 없으니 닭고기에 관한 한 이제는 금욕주의라고 말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젠 닭 이후에도 애착이 여전한 돼지와 소 쪽으로 금욕주의를 옮겨볼까 하는 생각도 슬슬 해봅니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잘 보여줬습니다만, 사실 자기 욕망을 억압하고 부인하는 ‘금욕주의적 이상’은 곧잘 ‘세계로부터의 도피’로 이어집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에게 고통을 안긴 이 세계에 대한 심판의 날이 올 거라는 믿음 속에서 그 고통을 참아내기도 하고, 신에게 선택받은 자가 겪는 시험 같은 걸로 자기 정당화를 시도하지요. 또 어떤 이들은 구원의 세계에 대한 망상 속에서 현실의 자신을 마냥 부인해버리기도 합니다. 가령 아름다운 몸매라는 가공된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 몸이 지닌 현실적 역량을 포기해버리는 일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니체가 보여주듯이 결코 이 세상과 무관해지는 게 아닙니다. 금욕주의의 탈속적 지향은 지극히 세속적인 이해관계와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나 의사, 정치가, 자본가 등이 그것으로 자기 권력을 키워가니까요.

하지만 자기 단련과 수련으로서의 금욕주의도 분명 존재합니다. 건강을 되찾기 위한 단식과 연애인 몸매를 따라잡기 위한 다이어트가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푸코는 <<안전, 영토, 인구>>와 <<주체의 해석학>>에서 고대와 중세 코뮨들이 보여준 ‘자기배려’를 위한 다양한 금욕주의 수련법에 주목합니다. 서구 기독교 전통이 복종을 내면화하고 순환시키는 수단으로 금욕주의를 사용한 것과 달리, 고대와 중세의 몇몇 코뮨들이 보여준 금욕주의 수련법은 복종이 아닌 자기지배, 자기배려의 힘을 키우는 경험이었다는 겁니다. 니체라면 이것을 강자의 ‘고통 활용술’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떻든 푸코에 따르면 이들은 점점 더 어려운 것에 대한 도전을 통해 자기 한계들을 넘어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이런 내적 도전은 외적으로 부여된 것들에 대한 저항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푸코가 한 말은 꽤나 멋집니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유혹의 부재가 아니라, 유혹에 무관심한 곳까지 자기 지배력을 높이는 것이었다.”(<<안전, 영토, 인구>>) 돈이나 권력의 매수가 불가능하고, 공포나 위협을 통한 협박이 불가능한 곳에 자신을 이르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를 유혹하거나 억압하는 자들에게 놀아나지 않는 겁니다. 그런 것들로 자신을 망치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봅니다.

금욕주의라고 했습니다만, 이런 실천은 사실 욕망을 부인한다기보다 욕망을 가꾸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모든 욕망의 목표는 그 실현에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를 지배하는 욕망들이 모두 나를 배려하는 건 아니라는 거지요. 가령 흡연 충동은 흡연자를 배려하지 않습니다. 흡연 충동의 목표는 그 실현, 즉 흡연에 있을 따름입니다. 주체를 망쳐서라도 그 욕망을 실현하라고 명령하지요. 그러니 욕망을 잘 가꾸는 건 정말 중요한 자기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기배려는 사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배려하는 것과 통합니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인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이지요. 나를 매수하거나 협박하려는 온갖 욕망들, 한마디로 나를 노예로 길들이는 그 온갖 욕망들과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은 그것을 양산하는 공동체를 고치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의 욕망을 가꾸는 일은 우리 사회의 욕망을 가꾸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주인 행세를 해온 다양한 욕망들, 그 욕망들을 조장함으로써 대단한 실익을 챙긴 이들에게 이제 한마디 해주고 싶습니다. ‘이제 됐거든!’

새해 ‘끊는 결심’을 아직 못 세우신 분들, 이번주 <위클리 수유너머>에서 좋은 소재들을 제공합니다. 모두 어렵다면 그 놈들 중 하나만 찍어도 좋습니다. 닭고기에 기반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방법은 별 거 없습니다. 그냥 당장 시작해서 한 5년 되면 몸이 알아서 기특해집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 몇몇 되면 혹시 압니까. 세상도 기특해질지.

응답 1개

  1. 정재식말하길

    금욕주의의 핵심을 드러낸 고병권의 좋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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