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공방 통신

영화 속 식탁 이야기 – 산다는 것은 먹는다는 것

- 제비꽃달팽이

영화도 많고 음식도 많은 세상, 음식을 다룬 영화도 많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등장하는 장면은 그 영화에서 다루고자하는 중심 메타포가 숨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리포터의 콧물맛 풍선껌에는 환상적인 세계에 대한 이미지가, 빠삐용의 바퀴벌레에는 절박한 세계에 대한 이미지가 담겨있듯이 말입니다.

휴먼네이쳐

미셸 공드리 감독의 2001년 작 ‘휴먼 네이쳐’ 중 쥐들에게 테이블매너를 가르치는 장면입니다. 팀 로빈스가 연기한 나단이란 캐릭터는 엄격한 가정환경 속의 입양아로 자랍니다. 그는 테이블매너에 익숙해지지 못해서 어린 시절 식탁에서 식사를 재대로 끝마치지 못하고 항상 혼나게 됩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 동물 실험실에 들어갔고 실험용 쥐에게 테이블매너를 익힐 수 있도록 만드는 전기자극 실험을 벌입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죠.

‘문화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가? 테이블매너에서 시작된다. 쥐에게 테이블매너를 익히도록 한다면 쥐도 문화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이없긴 하지만 실험은 성공했고, 쥐들은 치즈를 먹을 때 포크와 나이프를 쓰면서 컵에 물을 따라 마실 줄도 알게 되었죠. 코미디 같은 이 상황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이 실험을 통과한 쥐는 야생의 쥐와는 다른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서양식 테이블매너라는 특정 문화를 습득하고 그에 따라 야생에서 탈사회화되고 인간화하는 형식으로 재사회화 된 것이지요.

노리코의 식탁

이런 재사회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다른 경우로 소노 시온 감독의 2005년 작 ‘노리코의 식탁’을 들 수 있을 겁니다. 제목은 ~의 식탁이지만 정작 음식은 거의 나오지도 않고, 별로 음식이 중심 소재도 아닌 영화입니다만,(어이! 그렇게 말하면 휴먼 네이쳐도 마찬가지잖아!) 절정 부분에 나오는 식사 장면은 특정 테이블매너에 담겨있는 사회적 의미를 살펴보게 해줍니다.

테츠조의 두 딸 노리코와 유카는 인간의 관계가 ‘만들어진’ 연극 같은 관계일 뿐 진정한 관계는 없다, 는 생각에 집을 떠납니다. 그들은 역할놀이를 하는 집단에 들어가 돈을 받고 소비자가 요구하는 특정 역할을 연기해주죠. 진짜보다 리얼한 애인도 친구도 되어줍니다. 아버지인 테츠조는 집을 나간 두 딸에게 자신의 집과 꼭 닮은 세트장에서 ‘자신의 두 딸’을 연기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때 무대의 중앙에는 일본식 커다란 앉은뱅이 식탁이 놓여있고 그 위에는 전골냄비가 올려져 있습니다. 이때 전골냄비에 담긴 테이블매너는 화기애애한 가족의 저녁식사, 정도의 느낌이랄까요. 두 딸 노리코와 유카는 그 역을 자연스럽게 수행하려고 노력합니다. 가족의 밥그릇에 고기를 담아주고, 웃으면서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이상한 느낌을 받겠죠. 노리코가 노리코의 역할을 수행해야하고, 유카가 유카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 끝에 노리코는 다시 전골냄비가 있는 가족 안으로 돌아옵니다. 유카는 아침 식사가 시작되기 전인 이른 새벽에 집을 나오면서 과거의 유카로 돌아오기를 거부하죠. 이렇듯 식탁에는 앉는 사람들은 특정 역할을 연기해야하고, 그 연기가 자연스러워지는 순간이 사회화의 순간일 겁니다.

음식남녀

음식과 관계가 얽힌 영화로는 이안 감독의 1994년 작 ‘음식남녀’를 빼놓을 수 없겠죠. 중국 전통음식의 최고 권위자인 주사부는 세 명의 딸을 둔 아버지입니다. 그는 매 주말마다 완벽한 솜씨를 발휘해 상다리 부러지게 상을 차리고 딸들과 식사를 즐깁니다. 그러나 너무 완벽해서일까요. 그의 가족들은 그와 진심으로 대하지는 않습니다. 첫째 딸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절제된 식탁에서 생활하고, 둘째는 성공한 사회인으로 서양식 식탁에서 생활하며, 셋째는 패스트푸드가게에서 알바를 하고 밥을 먹는 학생입니다.

자신만의 삶이 있는, 자신이 포함된 관계에서의 테이블매너를 지켜야하는 세 명의 딸들은 주말 아버지와의 정찬을 마뜩찮아 합니다. 이런 딸들과의 생활에서 아버지 주사부는 자신이 식탁을 지켜야하는 이유를 점점 잃어버리고, 그에 따라 미각도 점점 잃어버립니다. 요리사인 아버지가 미각을 잃는 것은 큰 문제임에도 딸들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아버지, 간이 안 맞네요.”

이들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각각의 식탁이 더 완벽해져서도 아니고, 새로운 식탁을 차려서도 아닙니다. 되려 서로의 삶이-식탁이 무너지는 와중에 서로는 화해할 수 있게 되죠. 다시 한대 모인 식탁은 예전처럼 완벽하진 않습니다. 요리를 돕겠다고 나선 사위는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막내딸이 낳은 손녀는 울며 보챕니다. 요리도 이래저래 엉망입니다. 그러나 이런 완벽하지 않은 식탁이기에,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은 편하게 웃으며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주사부도 미각을 회복해가죠. 먹는 일이 즐거워졌기 때문일까요.

먹는 일이 편안하고 즐거워진다는 것은 그 테이블과 관련된 삶의 영역들이 살만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지도 모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편해지면 식탁도 즐거워지게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식탁이 즐거워지면 하루에 세 번은 즐거움이 찾아오죠. 그리고 하루 세 번의 즐거움이면 뭐, 이래저래 치이면서 살아가는 나날도 버틸 만 할 겁니다.

바베트의 만찬

식탁은 그 식탁이 놓여진 사회적 배치를 수동적으로 보여주지만, 또 한편으론 식탁이 능동적으로 사회적 배치를 재구성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식탁위엔 음식이 놓여있고, 그 음식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그 감각에 의해 생긴 만족감은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부드러운 양념을 쳐주기도 하니까요. 달팽이공방통신 40호에 썼던 가브리엘 엑셀 감독의 1987년 작 ‘바베트의 만찬’은 식탁 위 음식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영화였죠? 펄떡이는 개구리 같은 재료들을 보곤 마을사람들은 바베트가 준비하는 음식이 악마적인 음식이라 평합니다. 그러나 음식은 차려졌고 맛있는 냄새에 이끌린 사람들은 하나 둘 테이블에 모여듭니다. 달콤한 케이크에 사람들의 꿍한 표정이 풀리고, 향기로운 와인에 홍조가 돕니다. 개구리 요리가 나갈 즈음에는 이미 유쾌한 웃음이 식탁 가득합니다.

이렇듯 식탁은 그 식탁이 놓여진 사회를 보여주고, 한편으론 사회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식사 때마다 뭘 먹을까, 누구랑 먹을까 고민하는지도 모르죠. 맛있는 것을 즐겁게 먹는 것 만한 행복이 흔치는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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