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내가 지금 미쳤다.

- 김융희

한 주일을 주말까지 잘 보내고는, 월요일만 되면 마음이 잔뜩 긴장되고 신중하다. 좀더 일찍 준비하고 미리 대처할 일을, 그냥 미루다가 월요일인 오늘에사 원고를 마련하기 위한 것 때문이다. “여강만필” 원고를 늦어도 월요일인 오늘 이내에 보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미리 쓸거리라도 생각해 두었으면 그리 긴장되거나 서성거리지 않아도 될 일을 무작정 미루다가 꽉 막히면서 끙끙데기 일수다. 재주도 없으면서 성실성도 부족하고 지혜도 우둔함이 정말로 한심해, 이런 내가 미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은 마침 고향의 겨울 바다를 다녀왔기에 고향 다녀온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제법 쓸거리가 있다싶어 금방 쓸 수 있으리라 믿고 비교적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오후에 쓰면 되겠거니 싶어, 늦장을 부리면서, 잔뜩 추운 날씨에 실내에서 굴구이를 점심으로 준비했다. 갯마을을 지키며 굴 재배를 하고 있는 친구가 준 것을 이번 고향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오늘 원고 쓰는 일에 차질이 생겼다. 점심의 이색 메뉴인 굴구이가 문제였다. 보리싻 된장국에 새파란 봄동 배춧잎 쌈거리가 있어 막걸리를 곁드리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막 밭에서 캔 여린 배춧잎에 누르스름 잘 익은 굴구이쌈으로 막걸리를 들다보니 아무러치도 않던 옆자리가 자꾸만 허전해 지면서 마음이 스멀스멀 동요를 한다.

밖엔 지금 설원을 햇빛이 찬란하게 비추인데도, 기온은 영하 15도를 밑돌고 있다. 어제까지 몰아치던 칼바람도 오늘은 숨을 죽이고 있으며, 새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집 지킴이 건우, 분이, 재동이만 햇빛의 양지 바른 곳에서 졸다가는 가끔씩 먼 산을 바라본 채 제들끼리 짖기도 한다. 나역시 무료와 추위를 달래려고 굴구이를 시도하면서 막걸리를 마신 것이다. 두 잔을 비우고 셋 째잔도 벌써 반을 비웠다.

나는 지금 미친 것 처럼 느껴진다. 엉뚱한 짖거리에 마음이 쏠린다. 무심결에 마누라에게 전화를 했다. 뚜렷히 할 말이 없어 머뭇거렸더니, 하는 일이 있어 끊자면서 금방 전화가 끊긴다. 공연히 전화를 했다는 후회도 들었다. 알 수 없는 착잡한 심기가 점점 불편해 지면서 쎈티멘탈 그레이가 된다. 외롭다는 생각에 제법 삶이 허무하다는 우울증세도 보인다. 조용필의 한오백년이 듣고 싶어 CD를 찾으나 눈에 띄질 않는다. 대신 같은 곡이 있는 김영님의 민요집을 올렸다.

창부타령 방아타령 매화타령 몽금포타령 새타령 신고산타령 민요 타령에 이어, 양산도 태평가 풍년가 노들강변 늴리리야 성주풀이 한오백년이 힘차고 구성지게 넘어가면서 다시 마음이 동요된다.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심정에 임장현의 대금소리로 항아의노래 유인일기 흥 꽃상여 가락이 비장하다. 장사익의 찔레꽃 하늘가는길의 애곡을 듣는다. 너무 슬퍼 모나코 프로아트 오케스트라의 아베 마리아를 들으며 마음을 달렜다. 한참의 이런 주책 망나니 짖에 머쓱해하며 혼자 웃기도 했다.

누구와도 많은 말을 실컷 나누고 싶다. 생각나는 떠오른 이들께 전화를 했다. 몇 사람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받는 몇 사람은, 뜬금없는 전화에 딱히 용건도 없어 의아해 하기도 했다. 나도 민망해져서 우물쩍거리다 말고 끊기도 했다. 이런 전화질이 금방 모두 끝나버리며 더 할 곳이 없다. 엉뚱한 짖에 박대도 좋으니, 오늘 종일 많은 이들과 전화질을 하여 반가운 목소리를 실컷 들었으면 싶다. 그런데 몇 곳에 전화질이 끝나고나니 더 이상 떠오른 사람이 거의 없다. 내가 썩 떠올리지 못한 사람이면 그들도 나를 떠올리지 않을 것을 생각하니 내 주위가 너무 허전하여 외롭다는 생각에 비참하다.

그렇고 보니 그동안 소식이 끊긴 인연들이 참 많다. 벌써 세상을 뜬 인연도 썩 있다. 모두가 새삼 그립다. 전화질을 할 수 있는 소중한 인연들이 이렇게 적을 줄은 미처 상상도 못했다.

그동안 나는 무엇에 매달리며 살았기에 이런 소중한 내 인연들에게 관심을 두지 못하는 채 짧지 않는 삶을 살아 왔을까? 그동안을 어떻게 지내 왔던가?

오늘도 겨우 술기운에 전화질을 하면서, 그것도 아주 어색해져 민망해 하면서, 미친 척 우물거리는 내 꼴이 새삼 부끄럽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늘 여나믄 사람이 약간 넘게 통화를 했던 것 같다. 주제도 없이 횡설수설로 들러덴 전화질에 지금은 후회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속시원하기도 하다. 이색 식단의 굴구이가 아니었더라면 내 소중한 인연들께 이런 철없는 소통의 기회가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깨름한 어색함도 지우며,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으로 오늘 나의 거의 미친 짖거리에 위안을 삼고 싶다.

눈 쌓인 한촌에서 혹독한 살인 추위로 한 때의 광기였을까?, 한풀이의 술주정이였을까?, 아님… 나는 아직 잘 몰겠다. 어떻든 평소에는 전혀 않했고, 할 수도 없었던 가까운 인연들을 기억하면서 나는 오늘 전화질을 했다. 내 소중한 인연들이기에 목소리도 매우 반가웠다. 오늘 내가 통화를 했던, 하지 못했던, 이 모든 이들도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싶은 바램이다.

쓸려고 했던 겨울 바다의 갯마을 소식은 다음으로 미루며, 이런 오늘의 엉뚱한 주제로 횡성 수설 했음에 여러분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라면서, 모두의 건강과 기쁜 일들로 새 해의 행복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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