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글러브: 장애를 동원해 경쟁 이데올로기를 휴머니즘으로 포장하기?

- 황진미

<글러브>는 청각장애인야구단의 실화에 70년대 청소년영화나 80년대 만화방에서 즐겨보던 스포츠만화의 온갖 클리셰를 덧입힌 영화이다. 그 결과 <라디오스타>+<말아톤>+<맨발의 꿈>이 되었다.

가톨릭계 청각장애인학교인 충주성심학교에는 고교야구부가 있다. 2002년 9월, 조일연교감의 설두로 창단되어, 제일은행실업팀선수였던 김인태감독과 프로야구쌍방울의 선수였던 박상수코치의 지도아래, 수화통역 선생님을 두고 10명의 선수가 연습에 돌입하여 2003년 봉황기대회에 출전하였다. 전교생과 학부모로 구성된 150여명의 응원단과 청각장애인 서포터즈의 응원 속에 전국4강인 성남서고와의 첫 경기 끝에 10: 1로 패하였다. 이후 해마다 봉황기대회와 친선경기에서 더 나은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2005년에는 이들을 다룬 KBS 다큐멘터리 <그 아이들의 홈런>과 <태양을 행해 쏴라>가 방영되었고, 아동서<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야구부입니다>와 조일연교감의 저서<태양을 향해 쏴라>가 있다. 여기까지가 실화이다.

강우석 감독은 여기에 여러 영화와 만화의 설정들을 버무린다.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였으나, 폭력사건으로 KBO제명위기에 놓인 김상남이 매니저의 주선으로 충주성심야구부로 내려온다. 처음엔 시큰둥하던 김상남은 자신이 진심으로 야구를 좋아했던 초심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들에 이끌려 차츰 애정을 쏟는다. 그러나 봉황기 1승이라는 목표에 비해 실력과 사기가 형편없다. 김상남은 새 투수를 영입하고, ‘파이팅’을 고취시키기 위해 ‘뺑뺑이’를 돌린다. 군산상고와의 연습경기에서 무참하게 패한 선수들을 학교까지 뛰게 하며, 분노와 투지를 일깨운다. 그는 ‘진심으로 이기려는 마음’이 있어야 야구를 즐길 수 있으며, 동정 받지 않기 위해 이기려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김상남은 영구 제명되고, 학교운영위원회는 야구부의 존폐를 논의한다. 그러나 어쨌든 대회는 열리고, 이하 생략.

영화는 자동생산라인을 거쳐 나온 기성품마냥 익숙한데다, 강우석표 영화답게 설명적이다. 후반부는 아예 야구해설가를 통해 코멘터리를 곁들인다. 물론 영화의 재미나 만듦새는 나쁘지 않다. 단순하나마 감동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장애와 스포츠와 승부욕과 상업영화가 어떻게 결합되고 배치되는지를 곱씹어보면 개운치 않다. 스포츠는 온갖 장르적 클리셰를 통하여 상업성을 보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스포츠의 많은 정신 중 오직 승부욕만이 강조된다. 경쟁위주의 자본주의적 삶에 반성이 촉구되는 지금, 승부욕은 대놓고 부르짖기 민망한 덕목이 되었지만, 상대가 장애인이기에 정당한 양 외쳐진다. 즉 서사를 통해 승부욕을 강조하고, 장르를 통해 상업성을 지향하는 이 영화에서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이며, 장애는 이를 정당화시키고 휴머니즘이라는 당의를 입히기 위해 동원된 알리바이이다. 뭘 또 그렇게 심하게 말하냐고? 이러한 판단이 모함인지 아닌지는 영화가 장애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명확해질 것이다.

영화에서 김상남은 학교에 오기 전/후의 거취가 명확하다. ‘프로’야구 선수이고, 슬럼프를 극복하고 해외로 나간다. 반면 학생들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이후의 삶은 영화의 관심 밖이다. 영화는 이들이 야구를 하는 게 옳은지 공부를 하는 게 옳은지 하는 문제를 대사 한 줄로 지나간다. 공부라면 어떤 공부를 하는지, 진로는 무엇이 있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딱 한번 수업 장면이 나왔는데, 하필 음악 수업이었다. 이 장면은 아이들의 장애를 두드러져 보이게 하고, 나선생의 아이들에 대한 태도를 매우 온정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 결과 김상남이 나선생에 대해 호감을 느끼게 하는 장면으로 기능한다. 반면 <말아톤>에서 초원이가 계속 마라톤을 할 것인지, 직업훈련을 받는 것이 좋은지는 훨씬 심도 있게 다루어졌으며, 초원이가 공작기계 앞에 시무룩하게 서있는 장면이 중요하게 배치되었다.) 이들이 갈 실업팀이 없으므로, 야구는 진로가 될 수 없고, 이들에게 야구는 ‘아마추어’의 그것이어야 한다. 즉 ‘야구를 통한 인성함양’이 목표가 돼야 한다. 그런데 왜 김상남은 승부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분투하는가? 진정으로 이기려는 마음이 있어야 야구를 즐길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아마추어 스포츠에서 통용될만한 상식은 아니다. 그가 승부욕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것은 승부욕이야말로, 그들이 야구가 아닌 다른 일을 하는데도 매우 필요한 인성의 덕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들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불쌍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파이팅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영화는 장애를 ‘불쌍해 보이는 어떤 것’으로 특화시키며, 장애에 대한 문제를 ‘불쌍하게 보는 시선의 극복’ 문제로 환치시킨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실력을 쌓아 상대를 눌러주어야 한다는 것이 김상남(혹은 강우석)의 주장이다. 영화는 장애가 불쌍해 보이는 것이라는 전제가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장애를 불쌍하게 보는 세상의 시선’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차명제를 놀리는 아이들, 중도실청인 차명제 어머니의 선천성 농아에 대해 경멸을 담아 내뱉는 말들, 군산상고 선수들의 노골적인 봐주기 경기에 대한 영화적 묘사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청각장애인에 대한 시선은 ‘불쌍하게 보는 시선’으로부터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는가? 아이들에게 우호적인 인물들인 나선생과 교장은 “우리 아이들은 제 한 몸 챙기는 것조차 힘들다”, “가뜩이나 힘든 우리 아이들이 다치기라도 하면…”이라 말한다. 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 공의 방향을 감지할 수 없고, 팀플레이에 어려움이 있다”는 ‘(야구를 하는데 있어서의) 장애’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와 매우 다른 언술이다. 무엇을 할 수 없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구분치 않고, 굉장히 많은 일들을 할 수 없는 이들로 일반화시키는 것이다. 영화는 애초 이들을 아무것도 할 수 없거나, 할 의욕이 없던 이들로 그리고 나서, 김상남이라는 승부욕의 전도사가 나타나 혹독한 훈련을 거치게 한 뒤, 이들이 강화된 전투력으로 살벌한 경쟁사회에 나서도록 하는 것을 과제로 삼은 듯 보인다.

물론 장애인들에게 스포츠를 통하여, 진취적인 기상이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신체적 단련, 성취감 등을 고취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 김상남의 막가파식 ‘이기는 훈련’ 이전에 ‘장애인스포츠교육’이 약 100년의 역사와 취지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 영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이, 야구를, 그것도 ‘이기는 야구’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우문(愚問)을 던지고 쫓아가지만, 진정으로 고찰되어야 하는 것은 ‘특정한 영역의 장애와 이러저러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자신에게 맞는 스포츠를 즐기면서 협동심이나 자긍심 등 ‘건전한 스포츠 정신’을 기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실제로 세계농아인올림픽이 4년마다 육상, 축구, 농구, 태권도 등 20개 종목으로 열리고 있으며, 1985년부터 참가한 한국은 2009년 3위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영화는 “벙어리가 아니라, 청각장애인”이라는 용어를 반복함으로써 정치적 올바름을 표방하는 듯하지만, 장애를 철저한 무능력으로 사고하고 있으며, 일반인들에게 폐기되어야 할 경쟁과 소외의 가치를 장애를 빌미삼아, 마치 휴머니즘인 양 포장하여 쏟아 붓는다. 마치 장애가 ‘미개발의 식민지’라도 되는 듯이.

그러나 ‘불쌍하게 보는 시선과 그 극복’의 패러다임으로 보자면, 장애만이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적 경쟁으로부터 배제된 모든 소수자는 다 불쌍해 보이기 마련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모든 소수자들이 스스로 비상한 파이팅 정신을 구비하고 열나게 뛰어야 한다. 가령 당신이 ‘지잡대’를 나온 사람으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선, 당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성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고자 한다면, 당신이 유색인종이기 때문에 인종차별을 돌파하려면, 파이팅 정신을 가지고 더욱 경쟁적으로 유리한 조건의 다른 이들을 뛰어넘을 정도로 체제에 충성하며 자본주의적 성과를 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과연 이러한 논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네가 ‘정상인’이라면 필요 없겠지만, 네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악바리같은 근성이 필요한 거야, 이건 너를 그저 불쌍하게 보는 시선과는 달리 정말 너를 생각해서 하는 소리야, 네가 남자라면 필요 없겠지만 네가 여자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거야,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잖아? 네가 학벌이 좋아, 집안이 좋아 그러니까 그럴수록 악착같이 노력하고 아부해야지, 너는 더구나 못생긴 여자이니 싹싹하기라도 해야지 않겠어? 어?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말들 아닌가? 수많은 자기계발서, 혹은 언제나 내 등 뒤에서 나의 콤플렉스(장애)를 꼬집어 내고, 그것을 특화하여 나를 무능하다고 찍어 누르며, 조직에 충성하고 체제에 순응하길 지시하던 수많은 말들. 그냥 인생을 살지 말고, ‘프로 인생’을 살라고, 프로는 아름답고,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들이라고, 당신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신의 인적자산을 관리하고 몸값을 올리는 ‘프로’라고, 그러니 폐기되기 전에 조직에 돈값을 하는 인간이 되라고 닦달하던 그 수많은 자본주의의 명령들!

그러나 일찍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통해 박민규가 말하지 않았던가. ‘치기 힘든 공은 치지 말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 자신의 야구를 하자’고. ‘프로’ 따위는 절대로 되지 말자고. 그러니 (평론가의 본분을 잊고) 나도 감히 말하련다. 당신에게 장애가 있든 없든, 무슨 무슨 소수자이든 간에 (‘엄친아’가 아닌 이상, 세상에 소수자 아닌 사람이 어디 있으랴?) 당신을 불쌍하게 보는 시선이 있다면, 그 시선을 “반사!”하고 되돌려주면 될지어다. ‘미쓰 홍당무’처럼, ‘1등에 목을 매느니, 목을 매겠다.’고 자랑스레 써 붙여놓고, 자기계발 따위에 피 빨리느니, (모기에) 피 빨리겠다는 자세로, 자신의 삶을 살지어다. ‘프로’야구는 이겨야 즐길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냥’인생은 즐겨야 이길 수 있다.

응답 2개

  1. 덧붙여서 당연히 자신만의 야구에는 치기 힘들어도 쳐 볼려고 노력하는 상황도 포함이 됩니다(^^^) 올해 진행형이에요 화이팅의 입김을 불어 주세요!!

  2.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수유너머 위클리, 박제민. 박제민 said: 광고보고 저 영화 함 볼까? 했었는데.. 어쩌죠? ㅋㅋ 수유너머에 올라온 글입니다. "글러브: 장애를 동원해 경쟁 이데올로기를 휴머니즘으로 포장하기?" http://bit.ly/fMbxM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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