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라 다시 제주도로 내려왔다. 아들 녀석에겐 마지막 초등 겨울방학이자, 나에겐 마지막 2개월 남은 휴직 기간이라 아무쪼록 뜻깊게 보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대개 그렇듯이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오히려 잘 보내기 힘들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기에 웬만하면 거창한 계획이나 기대 같은 것은 안하기로 했다.
하지만 마음 한켠의 찜찜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얼마 전 아들이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에게 책 선물을 받았다고 와서 자랑을 한다. 알고 보니, 자기만 유일하게 석 달 동안 학교 숙제를 빠지지 않고 다 한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그럼, 다른 친구들은 학교 숙제를 잘 안 해 온다는 말이니?” 그러자, “응, 애들은 숙제 잘 안 해오고, 수업 태도도 안 좋아.”한다. 며칠 후 선생님께서 아들 알림장에 붙여서 보낸 편지 내용을 보고 나는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해람아, 너는 다른 아이들이 중학 선행을 한다고 숙제도 잘 안 해오곤 했는데, 너는 한번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숙제를 해 와서, 선생님이 너무너무 기뻐.” 앗, 이럴 수가. 난 몰랐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중학 선행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 아들은 학교 다녀오자마자 학교 숙제 후딱 해치우고 잠잘 때까지 논다. 그게 정상이 아니었던 거다. 아무리 엄마가 사교육에 무관심하다지만, 현실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마음편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제주로 내려오면서 결심을 했다. 내가 가르치자. 지금 지내고 있는 곳은 산간 마을이라 주변에 가게도 없고, 학원은 더더구나 없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내가 아들의 영어와 수학, 기타 과목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함과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지만, 까짓거 어쨌든 다 한국어로 쓰여 있을 텐데(영어는 예외지만 이십 년 동안 영어 문법과 독해를 했는데 뭐), 그냥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에 한번 덤벼보기로 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도대체 어떤 책으로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무슨 문제집, 참고서, 자습서가 그리도 많은지 머리가 팽팽 돌 지경이다. 게다가 모두들 시리즈로 나와 있어서, 한 권으로 해결할 만한 책도 별로 없고, 책값은 또 왜 그리 비싼지. 단행본 책들이 잘 안 팔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겨우 몇 권을 골라잡았지만, 내가 고른 책이 과연 제대로 고른 것인지, 아들 녀석이 공부하기에 적당한 수준의 것인지 잘 판단이 안 선다. 게다가 요즘 책들은 왜 이리도 무겁고 두꺼운지 모르겠다. 글자도 작고, 색깔도 화려해서 정신이 없다. 내용이 지나치게 많을 뿐 아니라, 일관성이 없고 온갖 지식들로 꽉 차 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냥 사촌누나가 쓰던 수학, 사회 교과서를 그냥 읽기로 했다. 그런데 교과서 역시 분량과 내용이 만만치가 않다. 예전에 중1 학생들이 쓰던 교과서와는 천양지차이다. 물론 지금은 검정 교과서라서 더 예뻐지고 편집이 잘 되어 있다고는 하나, 너무 많은 지식을 잔뜩 집어넣어 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과 소리내어 천천히 읽다 보니, 내가 벌써 막힌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하겠다.
이쯤 되고 보니, ‘정말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교과서도 책이고, 문제집도 책이라면, 적어도 독자의 입장을 좀 고려하며 만들었어야 되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현행 교육과정이 자기주도적 학습, 문제해결식 학습을 강조한다면 적어도 중학생이 혼자서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자칭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내가 읽어도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는 것이다. 또한 내용이 어렵고 공부할 내용이 지나치게 많아서 책 자체가 아이들에게 성취감과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주눅 들게 만들어서 자신감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많은 지식이 간단하게 도식화, 요약되어 있어서 학생들로 하여금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문제는 책값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해가 바뀌어도 책 내용 자체는 그다지 바뀌지 않는데 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이제 알겠다. 왜 좋은 책이 잘 안 읽히고 잘 안 팔리는지를. 학과 공부에 치여서 책 읽을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학생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문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비싼 교재비를 감당하는 데도 급급한데 단행본을 사서 읽힌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의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겠다. 아이들은 그저 엄청난 양의 지식을 기계처럼 두뇌 속에 주입하고 있다. 나는 도서관에서 한 학생이 시험 기간에 영어 교과서에 빡빡하게 해석을 달아서 각장을 코팅한 채로 달달 외우는 것을 실제로 목격한 적이 있다. 책을 읽으며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나를 이해하고 확장하며 삶을 일구어 나가는 일이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는 엄두도 못낼 일인 것이다. 지금의 공부는 오로지 남보다 더 빨리 더 높은 점수를 받아서 더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 버렸다. 그러다보니, 책과 학습도 경쟁이 되어서 출판사는 더 많은 지식을 더 효율적으로 주입하기 위한 온갖 장치만을 개발해 오고 있으며, 학생들은 그저 주어진 지식을 주먹구구식으로 머리를 싸매고 외울 수밖에 없다. 학부모들은 학부모대로 남들보다 더 나은(더 비싼) 학원이나 교재만을 찾는 데 급급할 뿐 자녀의 수준이나 흥미, 심리 상태 등에 대한 고려는 별로 하지 않는다.
사람을 등용한다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지금 과거에는 시체문장(時體文章)으로써 사람을 시험한다. 그런 문장으로는 위로 관각에 임용되어 자문에 대비할 수 없으며 아래로는 사실을 기록하고 정서를 펴지도 못한다. 어렸을 때부터 배워서 머리카락이 희어졌을 때에 비로소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합격한 그 날부터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죄다 버리게 된다. 정력이 이미 희미해졌으니 그 인물은 나라에 쓸모가 없다.
과거 문장에는 시, 부, 표, 책 등이 있다. 그리고 사서의, 오경의라는 것은 대개 진부하고 덩달아 같은 것이 많아서, 한 글자도 참다운 지식과 새로운 해석이 없다.
독서하는 자는 글자를 보면 운을 달 것을 생각하고, 글귀를 보면 시험 제목만을 생각한다. 그 말은 이용해도 그 사실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것으로써 사람을 뽑으니 허술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남의 글씨 솜씨를 빌기도 하며 남의 것을 대신 지어 주기도 한다. 요행을 바라고 무턱대고 과장(科場)에 나서는 폐단은 낱낱이 거론하지 않아도 족하다. 시골에서 보이던 하찮은 과시에도 시권을 바치는 자가 여차하면 천 명이 넘고 서울에서 보이는 대동과에는 가끔 수만 명씩 된다. 그런데 수만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의 시권을 어느 틈에 고사(考査)하였는지 반나절 안에 방을 걸기도 한다. 고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등급 매기는 붓을 잡기에도 괴로우면 눈을 감고서 퇴짜만 놓는다. 이런 때면 비록 한유가 과거를 주관하고 소식이 글을 지었다 하여도, 그렇게 빠른 동안에는 그 글이 과연 잘된 것인지 알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아, 당당한 선비를 뽑는 것이 도리어 제비뽑는 재수만도 못하니, 사람을 뽑는다는 방식은 정말로 믿을 수 없구나.
박제가의 『북학의』에 나오는 ‘과거론’의 일부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박제가의 ‘아아’하는 감탄사가 내게도 그대로 공명해서 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아줌마, 사회 과목 너무 재미없고 어려워요. 전 포기했어요.” 하는 이웃집 아이의 말에 중학교 1학년 사회 교과서를 펼쳐보니, 정말 재미없을 것 같았다. 처음 만나는 세계 지리가 딱딱함과 어려움의 과목으로만 여겨진다면, 어쩌면 이 아이에게 평생 동안 세계지리는 그런 이미지로 남아 있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아찔해진다. 몇 해 전, 나도 학교에서 강제적으로 실시한 윤독독서지도 때문에 그 해에 교내독후감 대회에 응모한 학생이 한 명도 없었던 절망적인 기억이 떠오른다. 부모와 교사, 출판사의 욕심 때문에 호기심과 공부의 즐거움을 일찌감치 포기하게 만든다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그래서 며칠 전부터 내가 선택한 방법이 책 소리내어 읽기이다. <살아있는 한국사교과서>(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현행 국사 교과서에 대한 대안교과서 형태로 만든 단행본이다)라는 책을 아들과 이웃에 사는 중1 여학생과 조카와 함께 하루에 네 쪽씩 소리내어 읽는다. 실제 읽는 분량은 매우 적지만, 그 내용에서 다루고 있는 시간은 수십년에서 수천년을 넘나든다.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분량이지 않은가? 한 단락씩 돌아가면서 소리 내어 읽으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그 과정에서 나도 배운다. 동굴 속에 살았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떤 고민을 하며 살았을까?, 아버지를 잃은 소수림왕이 원수를 갚기 전에 내부 체제를 정비할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이들도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겠지만, 옛사람들의 삶을 예전과는 다르게 상상해 보며 읽다 보니 그 시간이 즐겁다. 공부를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문으로 공부말고 삶을 위한 공부, 소리내어 읽기부터 다시한번해봐야겠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