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유사-실비아 플라스’의 미친년 퍼포먼스, 그 갈급함과 체념의 순간들 «숨»

- 황진미

«숨»을 거칠게 읽는 다면 아마도 이런 것일 게다. 남편의 외도로 방황하던 유부녀가 우연히 자살을 기도하는 사형수에 관한 뉴스를 보고, 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을 느껴 ‘사계절’을 선물하고 사랑을 나눈다. 이를 안 남편과 실랑이를 벌이지만 남편은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사형수와 강렬한 교감을 나눈 후 가정으로 돌아온다. 한편 사형수는 시종 그녀와의 관계를 시기해오던 어린죄수의 손에 죽는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단순할까? «숨»을 ‘유부녀와 사형수의 불가능한 사랑’ 쯤으로 요약하기엔 석연찮은 점들이 꽤 많다.

첫째, 생판 모르는 사형수를 찾아가 기이한 퍼포먼스를 벌이는 그녀의 행동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 그녀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녀의 욕망이 무엇이고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더 논해야 하지 않을까? 둘째, 사형수는 어차피 죽을 텐데 왜 굳이 자살을 시도하는가? 그는 죽기를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이 연기되는 것을 원하는 걸까? 셋째, 그녀는 왜 남편과 함께 돌아가고, 사형수는 어린죄수에게 목을 졸리는가? 이에 대해 답해보자.

1. 그녀는 누구인가? 미친년, 예술가, 실비아 플라스

많은 평자나 관객들이 그녀를 ‘남편의 외도로 인해 상처받은 유부녀’로 파악할 뿐, 그녀가 예술가라는 점을 간과한다. 그녀는 조각가이고, 9살에 경험한 ‘죽음’을 주기적으로 재경험 하는 ‘미친년’이다. 그녀는 마치 최면상태 혹은 무당이 빙의되었을 때처럼, 그때의 기억으로 직접 들어갔다가 나와 “가끔 그런다”고 말한다. 죽음에 매혹된 (미친) 여성 예술가가 남편의 외도로 괴로워한다….이쯤에서 누군가 연상되지 않는가? 그래….실비아 플라스!

난 다시 했어./십 년에 한번/난 용케도 해내지.//(중략)//…/난 그냥 서른 살이지./그리고 고양이처럼 난 아홉 번 죽을 수도 있고.//이번이 세 번째야./십 년을 거듭 뭉개버리는 거/얼마나 하찮은 것인지.//(중략)//…./처음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난 열 살이었지./순전히 우연한 사고였어.//(중략)//죽는 것은/다른 모든 것처럼, 하나의 예술./난 그걸 유난히 잘해.//난 그것이 지옥같이 느껴지도록 하지./난 그것이 진짜같이 느껴지도록 하지./….//…./…../그건 연극적이야//(중략)//…/…/공기처럼 남자들을 먹을 테니까. -실비아 플라스 <여인 라자러스> 중-

실비아 플라스는 9살과 22살에 자살을 시도하였으며 31살에 시도한 자살은 성공한다. 위 시에서 보듯, 그녀는 죽음(자살)을 하나의 예술(퍼포먼스)로 인식하고 있으며, 반복해서 경험하고 시연한다. 그리고 말한다. 남자들을 먹겠노라고. 9살의 자살시도는 아버지의 죽음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후로도 아버지에 대한 상념이 많았고, <아빠>라는 시에선 아빠를 파시스트에 비유한다. 잘나가는 시인 테드 휴즈와의 첫 만남에서 뺨을 물어뜯었던 그녀는 결혼 후 남편의 외도로 깊은 우울증에 빠지고, 결국 가스오븐으로 자살한다.

«숨»의 그녀는 그림의 욕망을 아버지에게 제지당했던 예술가로 ‘날개 달린 자아상’을 빚는 다. 10년 전 예술가 남편과 단풍나무에서 “몸이 불타오르는”느낌으로 만나 사랑했지만, 남편의 외도로 허망해진다. 그녀는 죽음에 중독 된 예술가이자, 남편과의 강렬했던 만남을 복원하길 갈구하며, 남자들을 ‘먹을 듯이’ 달려드는 ‘유사-실비아 플라스’이다.

그녀가 실비아 플라스와 다른 점은 ‘죽음의 황홀경’이 자살을 통해선 얻어질 수 없으며, “어쩔 수 없을 때에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음 앞에 섰을 때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즉 그녀는 ‘자살이 아닌 죽음’에 매혹된다. 그녀가 사형수를 찾아간 이유는 사형수가 바로 ‘자살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와 ‘죽음을 직면한 느낌’을 나누고, 자신의 어린시절과 남편과의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서이다. 그녀는 사형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사형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형수는 그녀에게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죽음’의 표상이며, ‘미친년 퍼포먼스’의 관객이자, 자기-치유적 사이코드라마의 상대역일 뿐이다.

2. 사형수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죽음’인가 ‘죽음의 지연’인가?

사형수가 그녀와의 관계에서 원하는 것은 그녀의 몸이다. 첫 장면에서 어린 죄수가 “엄마!”를 부르며 깰 때, 사형수는 에로틱한 꿈을 꾸는지, 자기 손으로 목덜미를 애무한다. 어린죄수가 그 몸짓에 응하자 애무를 하더니 깨어나서 그를 밀친다. 그가 원하는 것은 ‘여인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것을 말하라고 하자, 그녀의 머리카락을 하나 뽑는다. 그것을 자신의 이 사이에 끼워 보관하다 다음 면회 때 보여준다. 직접적인 신체의 일부를 취해 자신의 몸에 삽입하는 행위. 그가 원하는 것은 그녀와의 육체적 결합이다. 그녀는 그에게 ‘죽음’의 개념을 편취하고 판타지를 선사하지만, 그에게 그녀는 성(性)적 실체이다. 동상이몽. 이들의 동상이몽은 사형수가 실은 기꺼이 죽고자 하는 자가 아니라, 죽지 못하는 자라는 점에서 더욱 심화된다.

사형수는 가족을 죽이고 가족들과 한 방에 있다가 검거되었는데, 살해동기를 밝히지 않으며, 사형선고 후 여러 번 자살시도를 한다. 이 사실들은 TV화면을 통해 전해진 것일 뿐, 그의 입이나 영화적 재현을 통해 직접 전달된 사실이 아니다. 여기엔 오해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는 소위 ‘동반자살’이라 불리는 ‘가족살해 후 자살’을 하려다가 자살하지 못하고 발견된 게 아닐까? 애초부터 그는 자살 실패자였던 것이 아닐까? 그의 자살시도는 죽음이 아니라, 죽음(사형집행)의 지연으로 귀결된다. 그는 죽음을 원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선선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자살을 시도했던 건 아닐까? 즉 그의 자살기도는 죽음충동이 아니라 생의 욕망이었던 것인데, 이를 그녀와 세상 사람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한 게 아닐까? 그가 원해 온 성관계를 그녀가 아무런 판타지도 없이 선사한 뒤, 그녀가 진정으로 주길 원했던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 앞에 서는” 황홀경을 선사하자, 그는 숨을 헐떡이며 그녀를 떼어낸다. 이제 그도(관객도) 알았다. 그가 원했던 것이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지연이었음을. 그녀 역시 알았다. 그는 죽음을 원치 않으며, 그도 역시 그녀와 죽음충동을 교감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음을. (그녀의 표정에 주목할 것!)

3. 갈망에서 체념으로, 에로스에서 타나토스로.

그녀의 마지막 면회 전후에 두 번의 심경 변화가 있다. 그녀는 가을 퍼포먼스 후 그녀 몰래 따라온 남편이 “아까 면회실에서의 풍경이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라 말하자 핸들을 확 꺾어 버린다. 시종 겉돌기만 하던 남편과의 대화에서 처음으로 핵심에 다가간 것에 대한 폭발적 반응이다. 남편이 외도의 종식을 선언하고 그녀의 면회 길을 막고 아이를 환기시키자,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를 복원하리라 마음먹는다. 일상을 회복하는 의미에서 소조를 가마에 넣고, ‘일부로’ 떨어뜨린 셔츠를 쓰레기통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와 빤다. 사형수의 자살기도 소식을 차단하려는 미숙한 남편에게 물 컵을 집어던진 후, 그녀는 남편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건넨다. 그러나 ‘유사-실비아 플라스’ 인 그녀의 욕망은 너무도 강렬한 것이어서, ‘남자를 먹을 듯한’ 격한 키스에 남편은 그녀를 밀쳐낸다. 남편과의 소통불가능성에 실망한 그녀는 소조를 망치로 깨어버리고 다시 사형수를 찾는다. 이전과는 달리 어떠한 판타지적 장치도 없이, 그녀는 ‘실제 겨울’ 그대로 ‘실제 섹스’를 한다. 판타지를 경유하지 않는 실재의 만남. 섹스, 그리고 섹스보다 더한 실재인 죽음. 그러나 사형수가 죽음의 키스를 거부하자 그녀는 그와의 관계도 동상이몽이며, 실재의 교감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른바 “성관계는 없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눈싸움을 하는 남편과 아이를 보고 동참한다. 남편과 아이의 눈싸움 역시 그녀의 봄, 여름, 가을 퍼포먼스와 같은 일종의 겨울 퍼포먼스이며, 눈사람 일가족은 ‘스위트 홈’이라는 판타지를 완성하는 풍경-벽지이다. 그녀는 차안에서 ‘눈이 내리네’ 노래를 부르며 사계 퍼포먼스를 완결 짓는다. ‘판타지 없는 실재’ 의 불가능성을 깨닫고, 일상이야말로 거대한 판타지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재를 향한 갈급함이 체념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한편 그녀와의 숨 막히는 키스를 통해 자신의 욕망이 ‘죽음의 지연’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은 사형수는 어린죄수가 선사하는 죽음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처음으로 어린죄수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에로스가 아닌 타나토스에 자신을 맡긴다.

«숨»은 매우 ‘윤리적인’ 텍스트이다. 여기서 윤리란 (유부녀가 방황하다 가정으로 돌아가는 윤리가 아니라) 실재를 갈구하다가 그 불가능성을 깨닫고 일상적 판타지를 받아들이는 윤리를 말한다. 보안과장으로 직접 지시되는 ‘신의 자리’에 앉아, 윤리의 상상실험을 해 보인 김기덕 감독에게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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