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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거 기적입니까? 확실해요? -드라마 «시크릿 가든»-

- 안티고네

«시크릿 가든»이 끝났다. 이 드라마 덕분에 주말을 기다리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한동안 제법 아쉬울 거 것이다. 어제 일요일 밤, 가슴을 졸이며 «시크릿 가든» 마지막 편을 봤다. 혹시나 또 어떤 이변이 벌어질지도 몰라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결국 해외로 떠난 천재 음악가 썬을 제외하고는 모두 해피엔딩이었다. 김주원(현빈)과 길라임(하지원)은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 셋을 지닌 5년차 부부로 잘 살고 있었다. 오스카(윤상현)는 드디어 윤슬(김사랑)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김비서(김성오)와 아영(유인나) 또한 무르익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모두에게 행복한 결말. 하지만 과연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왜 가슴 한 켠이 찝찝한 걸까.

미리 밝혀둔다. “나는 정말 해피엔딩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내가.” 새드 엔딩이 더 깊이있고 있어(?) 보인다는 말은 내게 안 통한다. 한국 드라마의 특성상 주인공들은 드라마 내내 몸고생 마음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집안의 반대, 계급 차이, 사소한 오해와 깊어지는 갈등, 친한 친구의 배신, 생명의 위기-자동차 사고나 백혈병-, 복잡한 족보 등으로 주인공들이 사랑을 이루려면 넘어야 할 산이 몇 개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드라마 내내 고생을 했으니, 마지막에는 좀 행복하고 희망적으로 끝났으면 싶은 소박한 바램을 갖게 된다. 현실에서의 사랑도 너무 힘겨운데, 드라마 속에서 만이라도 좀 행복하면 안되겠니? 사랑하니까 보내주는 거야, 혹은 꼭 결혼이나 어떤 결실을 맺어야만 사랑인가, 이런 말은 이제 그만. 보내주는 사랑, “그거 자꾸 하면 습관 된다.”

그런데 «시크릿 가든»을 보면서, 특히 마지막 편을 보면서 처음으로 해피엔딩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김주원은 어머니의 허락 없이 길라임과 혼인신고를 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 대가로 그는 어머니에게 백화점 사장 자리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긴다. 평창동 어머니의 집은 예쁜 손주들에게만 허락될 뿐, 여전히 주원-라임 부부에게는 굳게 닫혀있다. 이야기 속에서 주원의 어머니는 악역 담당이지만, 나는 그녀가 아들에게 했던 충고만큼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살다보면,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 것에 더 반하게 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건 잠시 뿐이다. 결국 버림받고 남겨지는 쪽은 오히려 그들같은 부자들(혹은 주원의 표현을 빌자면 ‘사회지도층’)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계급이었던 사람들은 결국 지쳐 나가 떨어지고 만다, 등. 대개의 드라마 속 재벌집 사모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면 코웃음을 치며 비웃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 만큼은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시크릿 가든»만큼, 계급차이에 대해 여실하게 잘 보여주는 드라마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대다수의 한국 드라마에서 재벌은 희화화의 대상이었다. 그/녀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에 뭐건 자기 맘대로 해야 하는 고집쟁이인데다, 돈쓰고 애인 만나는 거 말고는 별다른 특기가 없었다. 재벌에 대한 희화화가 잘 드러나는 점 중 하나는 바로 그/녀들의 옷차림이다. 특히 부잣집 딸내미는 전형적인 머리 빈 미인으로 그려진다.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다 못해 핑크빛으로 질식할 거 같다던가 혹은 레이스에 휘감기거나 혹은 명품을 치렁치렁 들고 거는. 그런데 «시크릿가든»에서야 비로소 미국 유학 다녀와서 이론도 실무도 완벽한 재벌 2세가 등장했다. 그는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기획력으로 거의 아버지뻘에 가까운 임원진들을 휘어잡는, 특기가 돈 잘 버는 김주원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주인공이 책 읽는 장면을 이렇게 강조하는 드라마도 처음인 듯. 자연광 잘 드는 멋진 서가에는 각종 책이 벽 한 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김주원은 꽃으로 장식한 작은 티 테이블을 옆에 끼고-그래, 나도 김주원이 마시는 홍차와 마카롱이 먹고 싶었다- 여유 시간마다 독서를 즐긴다. 드라마 초반,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배경에나 나올 법직한 집에서 사는 길라임을 이해하기 위해, 계산이 칼같은 그가 선택한 가장 빠른 방법은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고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예술 쪽으로도 취향이 고상하시다. 고급 AV가 설치된 거실에서 쇼팽을 즐겨듣고, 오페라 감상을 다니며, 때로 큐레이터를 집으로 불러 회화 작품들을 사 모은다. 한 마디로 김주원은 제대로 된 귀족이었다.

그래서일까? 라벤더 향 물씬 풍기며 액션 연기 펼치는 길라임에게 한 눈에 반한 김주원은 ‘노블레스 오블리제’, ‘사회지도층의 책임’을 운운하며 그녀에게 접근한다. 눈 내리 깔면 슬퍼보이고, 치켜뜨면 초롱초롱 하고, 까무잡잡하고 흉터 때문에 미스코리아는 못 나갈거 같은 길라임의 존재는 김주원에게 사회지도층으로서 온정과 관심을 기울여야 할 소외된 이웃이었다. 그는 자신과 길라임의 차이를 계급적 차이나 갈등의 문제로 바라보지 않는다. 사회지도층으로서 약자에게 온정과 선행을 베푼다는 설정이 지나치게 재벌들을 미화하고 있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에는 가진 자의 의무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재벌조차 상상하기 어렵고, 따라서 가진 자들이 말하는 그 ‘사회지도층의 의무’라는 게 사실은 착취에 기인한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아무튼 이 둘이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건, 그래서 처음에는 답이 없어 보였다. 고아인데다 고졸 출신으로 스턴트우먼이 되기 전까지 주유소나 편의점 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길라임과 12살 때부터 미학 교육을 받아온 김주원의 차이가 그만큼이나 크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촛불과 꽃, 와인이 기본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과일 안주에 맥주 세 병이 기본이다. 때문에 이 둘은 서로 대등하게 사귀기는커녕,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데리고 놀 처지도 되지 못했다. 길라임은 로얄그룹 회장의 외손자 김주원이 데리고 놀 수준의 여자도 아니었던 것이다. 계급차이란 이런 거다. 단지 돈이 많고 적고의 수준을 떠나 애초에 삶의 방식이 다른 것, 사고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

따라서 길라임과 김주원이 진지하게 만난다는 것 자체가 벌써 빅 이슈고 사건이 된다. 말했다시피 계급 차이는 재산이나 상속 여부로 결정되는게 아니라 삶의 방식과 무엇을 상식으로 여기는가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길라임의 상식으로 결혼이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었지만, 김주원에게 결혼은 인생을 건 인수합병 계약이다.(앗, 위클리 수유너머, 결혼특집을 다시 읽어보자!) 따라서 결혼과 연애, 인수합병 계약과 데리고 놀 여자라는 김주원식 두 개의 카테고리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항상 그 둘 어느 중간에 위치하게 되는 길라임은 인어공주밖에 될 수 없는 운명. 그렇기 때문에 김은숙 작가의 말처럼 이 드라마에서 두 사람의 영혼이 바뀌는 설정은 단순한 재미를 위한 장치가 아니라 극 전개에 필수적이다. 강조되어야 할 점은 두 사람이 영혼이 바뀌면서 겪게 되는 신비하고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아니라, 이제는 계급 간의 차이가 영혼이 바뀌는 것만큼이나 드라마틱한 계기 없이는 쉽게 소통되지 않는다는 것 아닐까.

영혼이 바뀌고 이를 통해 그 사람의 생활과 관계를 전적으로 경험해 보는 것. 이것만큼 확실하게 “이 사람이다” 하고 느낄 수 있는 경험이 또 있을까. 김주원과 길라임의 사랑은 요정할머니의 도움과 더불어 영혼이 바뀌고, 기억상실로 인해 13년 전 과거의 그를 만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나는 이 가슴 두근 거리고 예쁜 드라마에서 임상수 감독이 리메이크한 영화 “하녀”의 어두운 그림자를 엿보게 된다. 원작 “하녀”와는 달리, 2010년의 하녀 은이(전도연)는 복수하지 못하고 결국 불길에 휩쌓여 스스로 죽는 쪽을 선택한다. 은이의 복수가 결코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라임과 주원의 사랑 또한 기적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이처럼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게 아니고, 달려가고 또 달려가도 자꾸만 벌어지는 계급 차이를 뛰어넘은 «시크릿 가든»의 행복한 결말은 왠지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가 말하는 건 이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계급간의 소통이나 사랑은 불가능하다, 이것 뿐일까? 지금까지의 논조를 한꺼번에 뒤집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사랑’에 희망을 걸고 싶다. 사실 연애만큼 사랑만큼 타자에게 엄청난 집중력과 에너지를 쏟아붓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강렬한 창구고, 징하고 질긴 관계를 만든다. 목숨을 걸었던 이 둘의 사랑은 주원의 아버지가 계급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던 것과는 달리, 좀더 진전된 희망을 보여준다. 즉, 주원의 부모님이 불행했던 것에 비해, 주원과 라임은 처음의 사랑을 지켜가려고 노력할 것이고 아마 동화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해로할지도 모른다. 라임은 세 아이의 엄마가 된 후에도 스턴트우먼으로 계속 활동하고 있고, 무술감독이 되어 자기 팀도 이끌고 있다. 주원은 백화점 사장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 이들은 적어도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쉽사리 다른 한 쪽에게 자기처럼 동화되라고 강요하지 않는 지혜를 지녔으니 말이다.

섣불리 논지를 확장시키자면, 김주원과 길라임의 사랑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타자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모든 사랑은 위대하다. 법적으로 인정된 공동생활의 형태인 결혼을 예로 들자면, 너무도 다른 개인사를 지닌 두 사람이 만나 처음부터 삶의 ABC를 맞춰가는 과정이다. (참고로 나는 신혼시절, 수도꼭지를 샤워기 쪽으로 돌려놓는 것과 수도로 돌려놓는 것 중 어느 것이 ‘정상상태’ 혹은 ‘상식’인가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어디 비단 결혼 뿐이겠는가. 모든 연애, 우정, 동료와의 관계는 힘겨운 투쟁이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 소통하는 기적을 만들어내야 한다. 인권운동과 장애인 운동판을 기웃거리며 더욱 확실하게 느낀 거지만, 관계와 연대가 가장 큰 힘이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드라마를 인용하자면, 그래서 나는 길라임이 힘들게 몸으로 땀 흘려 만들어낸 관계들이 김주원과의 사랑보다 더 주목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중 길라임은 아주 어렸을 때 엄마를, 고등학생 때 소방관인 아버지를 잃었다. 고아인 그녀는 스스로 가족을 만들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아영과 월세를 반반 부담하면서 식구로 지내고, 액션스쿨 스턴트맨들과도 가족처럼 지낸다. 액션스쿨 임감독(최필립)은 그녀의 아버지였고, 오빠였고, 유일한 빽이다. 비록 어떤 관객도 알아주지 않는 스턴트 일을 하지만 동료들만큼은 서로를 기억해주고 알아보는 벗으로 지낸다. 소통하고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 서로 사랑한다는 놀라운 기적.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만 이런 소통과 사랑의 기적에 그토록 디테일하게 잘 묘사된 계급차이가 너무 쉽게 무화되는거 아니냐고 여전히 따지고 싶긴 하지만.

하지만 목숨도 거는 사랑, 계급차이를 뛰어넘는 사랑의 위대함을 증명하겠다고 굳이 재벌2세를 찾아나설 필요는 없다. 내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처럼, 우선은 주변을 좀 둘러보자. 윤슬의 말처럼 재벌들의 학연 지연 인맥이 지닌 힘은 진짜 짱이다. 살다보면 그런 힘이 필요할 날이 꼭 온다. 그러니 우리, 소통의 기적을 최대한 다양하게, 많이 만들어보자. 가깝고 유사한 것들로부터 김주원과 길라임의 사랑처럼 전혀 불가능한 관계에까지.

응답 2개

  1. 꿈꾸는나비말하길

    와우. 시크릿가든을 적극적으로 보아오던 저 또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이렇게 정리해주시네요! 결말에 대해선 형용하기 힘든 찜찜함이 남아있지만 기존의 ‘신데렐라’를 벗어나려는, 빤하고 싶지 않아 하는 작은 몸부림이 보여서 요리조리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최근 드라마를 잘 챙겨본 건 아니었지만시크릿가든은 그저 재벌2세와 서민여성의 연애놀음에서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이루어지는 소통의 문제에-그들의 현실감각 철철 넘치는 대화를 보세요!-대하여 더 집중했기에 할얘기가 많아진 것 같아요.~

  2.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기픈옹달 and 회색분자, 박제민. 박제민 said: "시가"좋아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전 이 드라마 지나가다가 한 10분정도밖에 안봐서 이 글이 이해가 안갑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사랑, 이거 기적입니까? 확실해요? -드라마 «시크릿 가든»-" http://bit.ly/hgzmk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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