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易地思之의 기술

- 달맞이

-『룰루』그레고와르 솔라타레프 글, 그림 / 최윤정 옮김 / 웅진주니어

작은 부평초로 뒤덮인 호수에 붉은 낙엽 한 장이 누워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녹색 천지인 세상에 너무도 편안히 누워 있는 붉음. 그 파격이 어찌나 눈부시던지!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눈부심이란 다름 아닌 이질적인 존재들의 만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책『룰루』는 서로 다른 두 개체에 대한 이야기다. 판이한 두 개체가 만나 친구로, 혹은 연인으로 묶이는 판타지는 그동안 수많은 이야기의 소재가 되어왔다. 따지고 보면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이 책이 흥미로운 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선입관을 전복시켰다는 데 있다. 작가는 엉큼하고 잔인하고 무섭다고 여겨져 왔던 늑대를 겁이 많고 마음 약한 존재로, 약하고 순해 착한 동물의 대명사처럼 여겨져 왔던 토끼를 정 많은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또한 독자들에게 익숙한 옛이야기 타입(‘옛날 옛날’이라는 어구를 사용함)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자연스럽게 읽는 이의 흥미를 유도한다. 늑대와 토끼, 전혀 다른 두 존재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주제적 측면에서 보면, 이 작품에서 말하는 ‘옛날’은 단순한 시간적 과거가 아니라, 기원의 자리라는 의미가 강하다. 파스칼 키냐르이 말하는 “모든 것이 유래하는 궁극의 지점”이며, “뿌리 없이 떠도는 현대인들이 가야할 방향을 붙잡아 주는 삶의 기원”과도 같은 옛날 말이다. 커다란 늑대와 작은 토끼가 손을 꼭 잡고 낚시를 하러 가는 그림이 상징하듯이, 부조화스러운 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사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옛날의 모습일 테니 말이다.

늑대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토끼와, 토끼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아기 늑대의 만남은 불현듯 이루어진다. 같이 사냥을 가던 아저씨 늑대가 갑작스런 사고로 죽게 되자, 혼자 남겨진 아기 늑대는 막막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아기 늑대는 땅속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난생 처음 보는 토끼에게 도움을 청한다. 정 많은 토끼는 스스럼없이 도움을 요청하는 늑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다. 둘은 힘을 합쳐 아저씨 늑대를 산에 묻는다. 아기 늑대가 이름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토끼는 ‘룰루’라는 깜찍한 이름까지 지어준다. 토끼를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건만, 토끼는 아기 늑대가 조금도 무섭지 않다.

둘은 그렇게 친구가 된다. 각자 가지고 있던 지혜를 나누어 갖는다. 토끼는 룰루에게 구슬치기와 책 읽는 법, 숫자 세는 법과 낚시를 해서 물고기를 잡아먹는 법을 가르쳐 주고, 룰루는 토끼에게 다른 토끼들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법을 알려준다. 그러는 동안 룰루는 점점 더 크게 자란다.

룰루는 토끼에게 무서움이 어떤 것인지도 알려 준다. 룰루가 토끼에게 무서움에 대해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은 자신에 대한 공포심을 유발시키기 위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룰루에게는 그저 하나의 놀이였을 수 있다. 그러나 룰루가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똑같은 겁내기 놀이임에도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체감도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룰루에게는 단순한 놀이에 불과했던 것이, 토끼인 톰에게는 생명에 대한 위협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룰루에게 질릴 정도로 무서움을 느낀 토끼는 결국 굴속에 숨어 나오지 않는다. 룰루가 순박한 눈으로 절대로 잡아먹지 않겠다고 맹세를 해도,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라고 고백을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토끼는 룰루가 자신을 잡아먹는 꿈까지 꾼다.

이쯤 되니, 토끼 집 앞에서 며칠을 기다리던 룰루 역시 토끼와의 우정이 끝나버렸다고 생각해 보따리를 싸들고 산 속으로 들어간다. 룰루가 찾아간 곳은 자신의 종족인 늑대들이 사는 산이다. 그러나 종족들은 정작 룰루를 알아보지 못한다. 토끼인 줄 알고 습격까지 한다. 그제야 룰루는 ‘늑대’가 얼마나 두려운 대상인지 깨닫는다. ‘늑대 겁내기’가 토끼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이해한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있다. 그의 처지가 되어 봐야만, 易地思之해 봐야만 그 사람의 입장을 알 수 있다. 그래야만 진정한 공감이 이루어질 수 있다. 죽을 고비를 넘긴 룰루의 절절한 고백과 맹세는 결국 토끼의 마음을 움직이고, 둘은 관계를 회복한다. 둘은 옛날처럼 손을 꼭 잡고 낚시를 하러 간다.

진정한 친구를 사귀는 법에 대한 이야기는 많고도 많다. 그러나 ‘易地思之’의 기술이야 말로, 잊지 말아야 기술임에 틀림없다. 친구를 만들지 않아, 벼랑 끝에서 잠을 자는 나그네처럼(바스크) 고단하고 처량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응답 2개

  1. 둥근머리말하길

    컥.. 어려운 책 같어요. 덕분에 조금씩 힌트 얻어가며 읽어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요.

  2. 말하길

    그런데 왜 늑대무리는 룰루를 토끼로 여겼나요? 그리고 토끼와 친구가 된 다음 룰루는 뭘 먹고 살았나요? 궁금하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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