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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인류란 어리석은 괴물입니다.’ – 오딜롱 르동의 회화 세계

- 유정아(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기묘한 것이 나타날 때

나는 악몽을 잘 꾸지 않는다. 머리를 베개에 대는 순간 잠이 들기 때문에 그 흔한 가위에 눌려본 경험 없고, 커피를 입에 대는 순간 졸리움이 몰려오기 때문에 스탠드는 종종 긴 밤을 홀로 지새운다. 불면증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쾌적한 수면조건을 부러워하겠지만, 난 가끔 그들이 부럽다. 세상에 얼마나 좋겠는가. 그 시간에 잠 안자고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만화책도 보고. 남들의 두 배를 사는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리도 지나치게 건전하고 평온한 나의 밤 생활 때문일까. 멀쩡하게 깨어있는 환한 대낮에 가끔 마음 저 밑바닥에서 무언가 꿈틀대는 소리를 듣는다. 징그럽고 요상하게 생긴 ‘괴물’이 햇빛으로 반짝이는 고요한 한강변에 다시 출몰할 것만 같은 그런 두근거림.

그 두근거림은 갖가지 증상으로 등장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기괴한 형상들에 자꾸만 눈길이 머문다는 것이다. 볼수록 새록새록 애정도 쌓여간다. 눈알이 둥둥 떠다니는 그림이라든가 목 잘린 몸통이 혼자 돌아다닌다든가 하는. 고고한 미술사를 전공하며 아름답고 우아한 명작들을 앞에 두고 강의하면서 뒤로는 기괴한 그림들을 몰래 좋아하다니, 취향 참 말하기 남부끄럽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건전한 생활 탓에 미처 출현할 기회를 잡지 못하는 내 마음 속 그 무언가가 타인의 손길을 빌어서라도 기어코 내 의식을 자극하고 말을 걸어보겠다는 강력한 의지표명 중인 것을. 오늘은 혼자 킬킬거리면서 감상했던 그림들을 소개해 보자.

左 : 르동, <웃는 거미>, 1881
中 : 르동, <늪에 핀 꽃, 슬픈 듯한 인간의 얼굴>, 1885
右 : 르동, <웃고 있는 흉측스러운 키클로페스의 일종인, 괴상한 폴립이 물가에 떠있다>, 1883

상징주의 vs 인상주의

세 작품은 모두 19세기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로 알려진 오딜롱 르동의 판화 혹은 목탄 작품들이다. 르동은 1840년 포도주 산지로 유명한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 젖이 잘 나오지 않아서 태어나자마자 보르도의 북서쪽인 메독 지방의 페일르버드 농가로 보내졌다. 페일르버드는 프랑스의 지롱드 강과 대서양 사이에 있는 포도의 산지 메독 지방의 한쪽에 위치한 광활한 대지였는데, 그는 이 고독하고 황폐한 곳에서 화가의 꿈을 키웠다. 아니 잠깐, 다른 예술도 아닌 ‘화가의 꿈’이 ‘고독하고 황폐한 곳’에서 자라났다고?

‘나는 내 예술의 근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독한 유배지인 페일르버드의 대지였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막막하고 황폐했던지… 내가 그 곳에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무언가는 들여놓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보는 즐거움은 아예 박탈당하고 없었던 그 곳에서는 정신력과 상상력이 분풀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르동은 눈 앞에 놓인 매우 아름다운 대상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특별히 볼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상상력으로 메워야 했다. 이 어린시절의 독특한 경험은 이후의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모네,, 1878

르동은 인상주의의 대표주자인 모네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두 화가는 모두 1840년생으로, 한 사람은 빛이 세상의 표면에 도달하는 그 접촉면에 광적으로 집작해 거의 눈이 멀어갈 지경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상상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내부 세계에 몰두했다. 한 사람이 이후 ‘망막 미술가’라는 다소 조롱의 의미가 포함된 별명을 얻으며 눈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보여주었다면, 다른 한 사람의 관심은 정확히 말해 눈이 아니라 ‘눈알들’에 있었다. 눈알들의 변용! ‘우리는 눈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실제로 르동은 스피노자의 범신론에 관심을 보였다.)

인상파시대를 살면서도 그들과 별다른 교류를 하지 않은 채, 초기에는 주로 흑색을 사용해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일구었던 르동이 ‘눈알들’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사실 인상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장님으로 태어나 나중에 갑자기 시력을 찾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대상에 관해 무엇 하나 아는 일 없이 온갖 외관 앞에 순진무구한 상태로 서 있을 수 있었을텐데…’라고 중얼거렸던 모네에 대해, 르동은 ‘인상파의 기법은 하늘 아래의 외적 사물의 표현에서만 정당하다. 사유하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그런 외부의 사물만을 관찰하지 않는다. 이런 기법은 예술의 가장 풍부한 자원을 거부한다.’ 라고 응수했다. 상상력을 절대 원천으로 내세우는 르동에게서 우리는 그 시대를 풍미했던 보들레르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상상력이 시인의 모든 기능들 중에서 가장 객관적인 것’이라고 보들레르는 <상응(Correspondence)에서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가!

르동의 다양하고 기발한 상상력은 ‘광학의 시대’에 발명된 여러 기구들과 만나면서 현실과 이성을 넘나드는 기괴한 형상들로 창조되었다. 초기 석판화집 《꿈 속에서》에는 눈알들의 향연이 펼쳐지는데, 이들은 풍선기구가 되어 어두운 바다를 날아다니고 불가사의한 꽃이 되어 시원적인 풍경 속에 꽃을 피우며 눈알들이 크게 부풀려져 박쥐처럼 날개를 달고 때로는 잘린 목이 되어 접시 위에 놓여 수수께끼 같은 표정을 띠면서 우리를 바라본다. 다윈의 저서들 또한 르동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었던 기폭제였다. <기묘한 것이 나타날 때>라는 작품에서는 진화론과 상상력이 결합되어 몸은 물고기, 머리는 인간인 기괴한 생물이 탄생했다. 르동의 작품은 이후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으며, 무엇보다 유화 물감 냄새 폴폴 풍기며 (머리는 텅 빈 채로) 눈에 의존해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경멸했던 현대예술의 아버지 마르셀 뒤샹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左 : 르동, <지구의 눈>, 1882
中 : 르동, <기묘한 것이 나타날 때>, 1883
右 : 마그리트, <집합적 창조>, 1934

그러나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은…

내가 좋아하는 만화 《사우스 파크》에는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상상 나라>라고 하는 특집편인데, 동화 속에만 존재하는 악역 캐릭터들이 담을 부수고 나와 현실세계를 침입해 잔인하게 공격한다는 내용이다. 그림을 넘겨 보며 쿡쿡쿡 몰래 웃음지을 수 있었던 기괴한 형상들이 우리의 현실공간에 침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건 상상해 본 가운데 가장 끔찍한 일이다. 괴물들은 동화 속에만, 그림 속에만, 상상 속에만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2011년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상상 나라’가 되어 버렸던가? 지금 이 순간 우리 영토는 어느새 악역 캐릭터들의 공격을 받은 것만 같다. 마치 주인공인양 활보하고 다니는 수많은 괴물들을 보는 이 순간들이 더 이상 즐겁지 않다. 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 상상 나라에서는 그 어떤 웃음도 지을 수 없다. 죽음을 맞이하기전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보았던 르동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매서운 추위다. 르동의 편지를 읽으며 애써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글을 끝맺는다.

‘봄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분명히 와 있는 것입니다. 참 묘한 얘기죠. 들어본 적도 없는 이성의 착란 때문에 인간적인 것이 모조리 반죽음을 당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우리들은 심연같은 입을 벌린 내일의 불안을 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의 괴로움입니다.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선언하십시다. 이런 불길하고 무섭고 추악한 시대에 살고 있으니, 그렇게 말해 버립시다… 정말 인류란 어리석은 괴물입니다.’

左 : 사우스 파크 <상상나라> 중 일부
中 : 경향신문 ‘김용민의 그림마당’ 중 일부 (2010. 12. 13)
右 : 경향신문 ‘김용민의 그림마당’ 중 일부 (2010. 12. 4)

응답 5개

  1. 연초록말하길

    머리를 베개에 대는 순간 잠드는 것은 같지만

    커피를 마시는 순간 잠이 든다는 것은 상상이 잘 되지 않아서

    고개 갸웃거리면서 글을 읽었습니다.

    좋아하는 화가라서요, 그런데 사실은 그의 묘한 색감에 관심이

    있었고, 눈알 그림에서는 섬뜩한 기분에 쉽게 다다가지 못하던

    그림인데 그의 성장 배경을 읽고 나니 아하, 그래서 하면서

    그림을 다시 보게 되네요

  2. 버들말하길

    그 괴물이라는 말, 의미가 아주 다층적이에요. 시대, 인류, 등등 전체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군요…흑.

  3. hermes말하길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림을 좀 크게 편집해야겠군요. 르동은 정말 흥미로운 인물예요. *^^*

  4. 북치는소녀말하길

    ‘내가 그 곳에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무언가는 들여놓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밑줄칩니다. 예술은 고독을 먹고 자라는 걸까요. 오딜롱 르동의 세계 잘 감상했습니다. 멋진 글입니다.

  5. 말하길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명색이 미술평론인데, 그림을 좀 크게 감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파일이 작아서 안 되나요? 암튼, 미술 감상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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