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지난 한 해를 회고한다.

- 김융희

지난 해는 내 생애에 대단히 중요한 잊지 못할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이제까지
나만이 감춰두고 읽을 나의 일기마저 쓰지 않고 평생을 지내온 나였다. 그런 내가
감히 여러분 앞에 글을 쓴다는 일은 아직껏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전혀 있을
수 없는 그 꿈같은 일이 지금 나의 현실이 되어, 벌써 일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재주도 능력도 없는 내가 “위클리 수유너머”의‘여강 만필’이라는 고정란에 지금까지
거의 50여 회를 계속 쓰고 있는 것이다. 이 일로 나에게 지난 해는 가장 신나는 해로
영원히 기억될 것 같다.

편집장인 고병권님의 처음 권고가 있어, 펄쩍 나는 아니라며 못한다는 뜻을 고수했다.
지금이기에 말이지만, 처음엔 편집장이 공연히 해본 소리겠지 여겨, 나는 진담으로
받아드리지를 않았고, 오히려 내가 진짜 쓰겠다면 어떡하겠나 싶은 생각도 했었다.
그래서 어설픔으로 우물쩍 넘겨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오해가 있었을 수 있었다.
나는 말도 안된 소리라며 애매한 답변이였고, 편집장께서는 의사를 받아드린 것으로
알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한참 후에야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하는 일도
없는 백수인 내가, 그동안 함께 해 온 우리 연구실 내의 식구들 끼리의 일인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원고를 써보았다. 그럭 저럭 어렵게 하나를 써서 보냈더니 금방
이름과 함께 내 글이 실려 있었다.

처음 생각과는 달리 실린 내 글을 대하고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마음의 교차로 착잡
미묘했고, 무언지 모를 마음의 조짐이 일었다. 두려운 마음을 갖고 조심스럽게 이어
두 번, 세 번,.. 계속 쓰게 되면서 일상이 조금씩 달라지는 변화를 느끼게 되었다.
차츰 두려움이 줄면서, 원고를 하나 둘 완성할 때마다 내가 무슨 큰 일이라도 이룬 듯
마음이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처음에는 도대체가 쓴다는 것이 두려웠고, 쓴 원고를
읽으면서는 어쩐지 부끄럽고 챙피한 생각에 재주없는 나를 원망하기도 했다.

쉽게 쓸거리의 소재가 잡히지 않으면 다소 불안하기도 했지만, 쓸거리가 있어 너무
쉽게 쓰고 나면 오히려 싱거운 마음에 허전함이 들기도 했다. 지금은 오히려 이 일이
없으면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며, 어떻게 마음을 달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나에겐 잘, 잘못 쓰는 것이 지금은 별로 의미가 없다. 다만 쓰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중요하며, 적당한 긴장으로 나를 신나게 하는 일상이 되어 좋을 뿐이다.

자기 자신의 관리 능력 한계는 어디까지 일까? 차차 안정된 마음은 뿌듯한 만족감에
공연히 우쭐해 보기도 하면서, 차츰 무슨 대단한 글쟁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이 들어
남들에게 알려 자랑으로 삼고 싶은 충동마저 갖게 된다. 어쩌다 칭찬이나 공감의 뎃글
이라도 올라오면 그 기쁨이라니! 이 어리석은 자의 좁은 소견머리를 누가 막을 것인가?
업무차 중요한 남편의 골프 모임에 따라나선 어느 주책 바가지 사모님의 그린에서 있었
다는, 언젠가 누구에게서 들었던 얘기이다.

“주책없는 사모님께서 처음 잡는 골프채로 친 공이 운좋게 홀에 바짝 다가서 멈춘 것을
보며 곁에서 박수를 쳤던 모양이다. 영문을 모른 그녀에게 공이 홀인을 하면 최고라는 것을
알려 주었더니,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며 불평을 했다는 주책바가지가 저지른 해프닝이라니,
얼마나 사실인지, 누군가 웃기려고 지어낸 말인지 그린에 경험이 없는 나로써는 알 수
없으나, 그런 주책 없는 푼수짖이 행여 나에게도 있지 않을까 싶어 가끔 떠올리곤 한다.
재주도 능력도 없는 내게 기회를 마련해준 편집진에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다시 밝히거니와, 요즘도 뿌듯한 마음에 신나는 일이 ‘여강 만필’을 계속 쓰고 있는
일이다. 비록 힘은 들지만 그 고마움에 보답을 위해서도 더욱 최선의 노력을 다 할려는
생각이다. 내가 계속 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능력없는 나”라는 사실을 내가 잊지 않고
지키는 일이라 믿고 있다. 어떻게 써야 여러분들께 폐가 되지 않는 훈훈한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여러분과 더불어 이 일로 보람을 갖게 되기를
열심히 골몰하고 있다.

자동차도 귀했고 운전도 생소했던, 40여 년도 전의 일이였다. 나는 운전 면허 시험이
도데채 자신이 없었다. 시험날이 되어 시험장에서였다. 상경하여 택시기사를 하고 있는
고향의 선배가 문득 떠올랐다. 겨우 한글을 깨우치는 정도의 고향 선배는 모범운전자였다.
그 선배도 운전면허를 따서 모범운전사인데, 나인들 못 할게 없지,란 생각을 했던 것이다.
자신감을 갖고 나는 시험에 응했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때 학력이 낮은 선배를 비하했음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 채, 미안한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 때는 면허증 얻기가
매우 어렵게 생각됐고, 실제로 한 번에 따내는 확률도 매우 낮을 때였다.

나의 글쓰기에 웬 운전 면허시험 이야기인가? 좀 창피스러운 이야기지만, 원고를 쓰면서
나는 가끔 그 면허 시험장의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두려움보다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나는 남다른 지식도 재주도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경험은 있다. 경험이
지식이란 말이 있지 않는가? 더구나 만필이란 학문적 지식보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일상사
주변 이야기를 쓰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문제는 글쓰기의 재주, 재능은 부족하지만
있는 그데로의 경험을 진솔하게 쓰면 남들도 편하게 받아 드리리란 생각에 감히 용기를
갖게 된다. 망설이고 두려워하면 쓸 수 없다. 하면 된다. 이는 글쓰기의 해답이면서
세상살이 모든 삶의 요채라 믿고 싶다. 나는 용기를 갖고 쓰기를 계속할 것이다.

인제는 그린에서 있었다는 주책없는 사모님의 해프닝도, 모범 운전자인 고향 선배를
다시 떠올리거나, 나의 운전 면허시험 치룬 이야기는 모두 지우려 한다. 더 좋은 생각으로
새 길을 열어 가겠다. 그 길의 지침으로, 쓸 때면 먼저 꼭 낭송을 하고 있는“시 한 편”을
소개하면서 나의 못난 넉두리를 이만 접으려 한다. 나의 길을 열어가는 새로운 다짐을
하면서, 새 해에는 작년보다 더 좋은 일이 있기를 기원한다.

끝으로 윤재철 시인의 시,“창의력” 전문이다.

창의력.

창의, 창의 하자 마라

책상 앞에 앉아 머리만 굴리며

창의, 창의

아이디어니 디자인이니 하지 마라

창의도 눈물에서 나오는 것

허리 꺾어지도록 끝없이 반복해서

풀리지 않는 그 고통에서 나오는 것

어느 날 에잇!

다 뒤집어엎고 싶을 때

그 끝에서 창의도 나오는 것

단지 양복 뒷면을 하나로 나누었다가

둘로 나누었다가 통으로 만드는 것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IT 신기종

그것이 창의인가

(아 참으로 가벼이 몸 바꾸어

돈을 버는 자본주의여)

창의는 어느날

괭이날을 내리꽂다가

흙 속에 파묻힌 바위에 부딪치다가

불꽃 튀듯 생겨나는 것

힘의 반작용

그것이 문명의 바퀴를 덜컹 굴린다.

응답 2개

  1. 은유말하길

    망설이고 두려워하면 쓸 수 없다. 맞습니다. 사는 일과 쓰는 일이 다르지 않음을 선생님 글에서 배웁니다. 돌잔치에 낭송해주셨던 멋진 시, 곱씹을수록 좋네요 ^^

  2. 말하길

    괭이날이 바위에 부딪혀 불꽃 튈 튀듯 생겨나는 게 ‘창의’라는 시구, 참 와 닿습니다. 글쓰기란 게 어떤 건지, 글쓰기와 삶의 관계에 대해, 글이 성숙해진다는 게 어떤 건지, 팍팍 와 닿는 글, 잘 읽었습니다. 샘, 항상,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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