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불란서 향기보다 더 좋은 향기 -김민수님께

- 고병권(수유너머R)

이번호 표제로 올린 글은 김민수님의 <청년노동잔혹사>입니다. 지난호의 ‘신선한 커피’에 이어 이번호 ‘극한의 감정이입’도 진한 욕설로 끝내셨군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이 욕설들이 신선한 것은 물론이고 읽는 사람을 꽤나 울컥하게 합니다. 특히 이번호에는 지난 번 제가 쓴 편집자 말에 적은 스피노자의 ‘정서적 모방’까지 끌어들이셨어요. 저는 투쟁하는 이들과의 연대를 주창하기 위해 그 표현을 썼는데, 김민수님은 사장님과의 열렬한 연대를 표명한 불쌍한 영혼들을 비꼬며 그것을 썼더군요.

사실 김민수님의 말은 스피노자의 철학적 화두이기도 했지요. 사람들은 왜 자기를 망치는 일을 대단한 명예나 되는 양 열렬히 수행하는지. 한마디로 왜 사람들은 자기 죽음을 욕망하는지 말입니다. (물론 그것도 정서적 모방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서적 모방은 말 그대로 ‘기초’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절망할 것은 아닙니다. 정서적 모방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이해하고 또 이용할 수 있어야 하지요. 우리의 상상적 동일시 능력을 잘 알게 되면 그것이 또한 우리의 대단한 능력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스피노자의 답은 이렇습니다. 정신이 외적 원인의 지배를 받을 때, 한마디로 제 정신이 아닐 때, 사람들은 자기 본질인 코나투스를 배반하게 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기 정신이 자기를 배반하는 게 아니라, 정신 줄을 놓고 남의 정신으로 살 때, 자기를 배반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스피노자도 김민수님에 동감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이런 사람을 노예라고 불렀거든요. 그러고보니 중국의 이탁오 말도 생각나네요. 그는 그런 사람을 개에 빗대었지요. “나이 오십에 이르기까지 나는 정말 한 마리의 개와 같았다. 영문도 모르는 채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뿐이었다.”(<<분서>>) 그러니까 김민수님이 말한 댓글 속 인간들은 결국 둘 중 하나군요. ‘노예새끼’이거나 ‘개새끼’이거나.

참 이러다가 저도 욕 배우겠습니다^^. 사실 <청년노동잔혹사>를 읽으며 예전에 좋아했던 시집 <인부수첩>(김해화)이 떠올랐습니다. <청년노동잔혹사>의 다른 이름이 2000년대판 <인부수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인부수첩>을 떠올린 건 김민수님이 커피숍의 ‘신선한 커피’에 대한 독자의 비위를 시험한 대목에서였습니다. ‘잔혹사’라는 코너 제목만큼이나 절절한 내용이었는데요. 그런데 바로 그때 80년대 ‘미장이 박씨’의 어떤 복수가 생각났답니다(제가 범죄 부추기는 건 아닙니다. 맹세코^^). 한 때 저는 꼴불견 자본가들이 제 속을 뒤집어 놓을 때마다 ‘미장이 박씨’의 복수를 생각하며 맘을 달래곤 했답니다. <저기압이 몰려 올 때마다 자본가들의 안방에는 불란서 향기보다 더 좋은 향기가 퍼져나간다>라고 말이지요. 아래 시는 김민수님께 보내는 제 작은 위무와 감사의 선물입니다.

아파트 보고서 2

김해화

사흘째 비가 내려 잠도 바닥나고
어젯밤 마신 깡소주에 쓰린 속
아침도 생략했으니 따끈하게 라면이나 끓여
해장이나 해볼까
찾아간 함바
낯익은 미장이 박씨가 손짓을 한다
혼자서 해장을 하던 참이라며 권하는 막걸리 한 잔을 시작으로
술판이 벌어졌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들
세상 살아온 이야기들 주고받다가
박씨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하겠단다

아파트 미장일만 10년째라는데
조그만 서민 아파트, 임대아파트야 그런 일 없지만
고급 맨션아파트 일을 하다보면
미장일 들어갈 때 쯤이면
분양 받은 놈들이 어느 동 어느 호가 즈그것인지
다 안다 이 말씀이야
세상 일 돈이면 다되는 줄 아는 요것들이
즈그 집이 몇 동 몇 호니 일 좀 신경 써서 해 달라고
술값이라고 봉투를 준다 이거야
그러면
갑자기 뱃속이 이상해지지
그땐 슬그머니 *몰탈 반죽하는 통에다
궁둥이를 까대고 실례를 한다 이 말씀이야
날 좋은 날은 잘 모르지
궂은 날, 오늘같이 한 사흘 즘 비가 내려봐
불란서 향기보다 더 좋은 향기가 솔솔 풍기지

자본가들의 안방에서
이렇게 저기압이 몰려 올 때마다
은근하게 퍼져나갈 똥냄새를 생각하며
쉽게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내게
박씨는 그만 웃으라며 막걸리를 권한다

그래, 우리들의 증오는 어디에고 있지
우리들이 철근과 함께 칼같은 분노를 엮듯이
벽돌 하나, 못 하나에도
착취자들에 대한 증오가 묻어 있어
저들의 호화로운 성
고급아파트 은밀한 침실에서도
우리들은 언제나 저들의 심장을 겨누고 있지

아 술맛 나는 날
우리들 승리의 그날을 위해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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