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카페

체육대회와 건강미녀 선발대회 사이, 아이돌을 보는 시선

- 안티고네

긴 설 연휴가 끝났다. 명절 연휴에 주말이 이어진, 그야말로 황금연휴가 아닐 수 없다. 3년째 시댁에서 맞는 설. 이제는 제법 요령도 생겼다. 시댁에서 나는 ‘전 부치기’ 담당인데, 미리 신랑에게 신신당부를 해 두었다. 거실에 요리판을 펼치면 너는 재빨리 TV 리모컨을 확보해서, 내가 좋아하는 각종 버라이어티쇼 혹은 아이돌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틀어 놓으라고 말이다.

기름 냄새 맡으면서 전 부치는 것만으로도 허리 아프고 어깨 아프고 가슴 답답한 일인데, 심지어 TV마저 취향에 안 맞으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다. 토론 끝에 싸움의 여지가 있는 뉴스, 축구 중계, 잔잔한 감동 추구하는 다큐멘터리는 시댁에서 일할 때만큼은 절대 사절. 다행히 이번 설에는 신랑의 나이스 플레이가 이어졌다. 시아버님과 도련님을 제치고 리모컨을 확보한 것은 물론이고, 미리 일러 둔 대로 시부모님 몰래 내 눈치를 살짝살짝 보면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주기까지! 정말 어메이징한 내 남자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일하는 틈틈이 살짝살짝 명절 특별 프로그램들을 눈팅하다 보니, 숙고하고 분석하지는 못했지만 이건 꼭 얘기하고 넘어가야 해, 싶은 얘깃거리가 떠올랐다. 바로 아, 이, 돌. 대부분의 명절 프로그램들의 포맷은 대동소이하다. 팀을 이뤄 게임을 진행하고, 퀴즈를 풀고, 노래와 춤 등의 장기자랑을 보여준다. 명절이니만큼 출연진은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도록 구성된다. 그리고 출연진 중 일부는 비쥬얼을 담당하는 예쁜 아이돌로 채워진다. 그런데 이런 익숙한 포맷 속에서 눈길을 끈 2개의 쇼가 있었다. 하나는 이미 많이 화제가 된 마봉춘사의 ‘아이돌 스타 육상, 수영 선수권 대회’(이하 체육대회)고, 또 다른 하나는 ‘아이돌 건강미녀 선발대회'(이하 미녀대회)다.

이 두 대회는 모두 아이돌의 건강/건강미를 소재로 다룬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아이돌과 건강이라는 키워드에 접근하는 두 프로그램의 시선의 차이다. 감히 이렇게 말해봐도 될까? 이 두 시선이 교차되는 영역, 이 두 시선이 열어 놓는 공간 속에 대한민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핵심인 아이돌이 놓여있고 그들이 유통 소비되는 방식이 감춰져 있다고.

이번 연휴를 보내며 알게 된 사실인데, 한국에는 약 140여명이 넘는 아이돌들이 있다. 놀랍지 아니한가. 아무리 한국이 아이돌 왕국이라도 그렇지, 어떤 기준으로 계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돌이 140명이 넘다니. 숫자가 꼭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아이돌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문화적 현상이다. 참고로 아이돌을 정의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다. 우선 위키피디아를 참고하자. “아이돌idol이란 본래 우상(優像)을 뜻하는 영어이고, 어원은 그리스어로 ιδειν이며, 이후 ειδo에서 idola로 변천 되어 최종적으로 idol로 변천되었다. 현재에는 아이돌 가수 등 십대 스타들을 말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아이돌은 그냥 어리다거나-데뷔 때부터 십대가 아닌 아이돌 스타도 흔해졌다. 애프터스쿨의 가희나 브아걸의 나르샤를 보라-, 댄스음악을 한다는 뜻만은 아니다(씨엔블루처럼 밴드를 해도 아이돌이다). 십대 스타를 가리킨다는 위키피디아의 말처럼, 아이돌은 딱히 가수를 지칭하는 말도 아니다. 체육대회에 참여한 100여명의 아이돌들은 대부분 다 걸그룹/보이그룹 출신이지만, 또한 대부분 뮤지컬은 물론 연기나 예능을 병행한다. 이처럼 아이돌이 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들의 스타성이라는 정체성이 기획사에 의한 트레이닝과 팬덤문화의 절대적지지 속에서 온 점이라는 외연만 뚜렷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돌’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코드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전성기 때에는 딱히 아이돌임을 강조하지 않았던 왕년의 스타들 또한 ‘원조돌’이나 ‘군필돌’이라는 신조어들로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아이돌이라는 말은 만능 엔터네이너를 가리키는 또다른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정의하기 어려운 모호성만큼이나 아이돌은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된다.

예컨대 ‘아이돌 스타 육상, 수영 선수권 대회’(이하 체육대회). 처음엔 이걸 왜 보나 싶었다. 그런데 연예기사가 하도 호들갑스럽길래 뭔가 있겠지 싶은 마음이 들어 봤다. 아이돌들이 나와서 50m달리기 하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다. 뭘까, 왜 재미있다고 느끼는 걸까. 우선은 체육대회라는 포맷이 주는 친숙함이 있다. 어렸을 적 운동회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한국인들은 대부분의 운동경기를 시즌별로 다 챙겨서 보는 습관들이 있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내가 다소 삐딱한 아이라는 걸, 소위 정상적으로 직장생활 하면서 살지는 못할 거라는 걸 2002년 월드컵 당시에 깨달았다. 모두가 축구 경기에 열 올리고 있을 때, 나는 아무 관심도 없었고 어떤 애국심도 들끓지 않았던 것. 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체육대회를 ‘아이돌’들이 한다는 게 아무래도 중요할 성 싶다.

앞서 말했듯이 아이돌의 정체성은 그들이 뭘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걸 하게/할 수 있게 되었느냐가 더 중요하고,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얼마나 예쁘장하고 끼가 있는가에 달려 있다. 평소 멋지거나 예쁘거나 재미있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던 그들이 단지 50m 달리기에 그토록 진지한 모습을 보여줄 때 수많은 팬들은 ‘그들의 색다른 모습을 봤다’고 느낀다. 게다 아저씨팬이나 누나팬이 사회현상으로 당당히 자리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하는 그들의 모습을 시청하는 건 왠지 ‘공정한 소비’라는 이상한 자부심을 안겨준다.

다음으로 ‘아이돌 건강미녀 선발대회.’ 여러 명의 여자 아이돌들을 줄지어 앉혀 놓고 미리 진행한 이런저런 건강검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최고의 건강미녀를 뽑는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킬힐과 과격한 안무, 일상적인 메이크업과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는 그녀들의 건강을 체크해준다는(?) 배려 넘치는 프로그램.

글을 시작하면서 밝혔지만, 나는 문화이론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명절음식을 준비하면서 건성건성 프로그램을 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녀대회가 던져준 질문은 묵직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여성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보여주는거 같아서 말이다. 다시 말해 여성의 건강을 뭘 기준으로 판단할까, 지식은 어떻게 몸을 구석구석 파헤치는가, 여성 아이돌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상품화될 수 있나, 지식-들여다봄-권력-소비가 섹슈얼리티와 얼마나 손쉽게 이어지는가, 등. 피부 나이를 체크하고 두피 건강을 확인하는 것, 척추 상태를 진단해서 S라인의 퀄리티를 확인하고, 허리 둘레 대 골반 둘레의 비율로 한국의 마돈나가 누군지를 가리는 것.

이제 소비자들은 단지 누구누구가 예쁘다, 꿀피부다, S라인이다 하고 떠드는 걸로 만족하지 않는다. 실제로 피부 나이를 책정하고, X-레이 사진으로 척추 상태를 확인한다. 그녀들의 몸은 무대 위에서 퍼포먼스를 펼칠 때와는 달리 조각조각 해부된 채로 보여지고, 판매된다. 흔히 미술계에서 여성/몸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2가지이다. 강간당한 몸 혹은 자본에 포섭되지 않은 여성의 몸을 덤덤하게 보여주기 같은 류. 하지만 이번 미녀대회를 보라. 이미 자본은 몸을 그렇게 통으로, 덩어리로 소비하지 않는다. 건강이 아니라 사실은 외모를 따지는 문화자본은 외모의 면면을 마치 생선 발라먹듯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까발리고 난 뒤 그걸 건강이라는 이름으로 얼버무린다.

체육대회와 미녀선발대회는 아이돌을 소비하는 양대 산맥이다. 아이돌 중 대다수는 스무 살이 넘은 어른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늘 건강한 청소년 같은 모습을 요구받는다. 그들은 항상 꿈을 향해 노력하는 예쁜 아이들이어야 한다. (어느 연예기사에서 읽은 구절. ‘소녀시대’ 왈, “언제까지 막대 사탕을 흔들 순 없잖아요”) 50m달리기를 질주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가수라는 꿈 하나를 이루기 위해 수년간 고된 연습생 생활을 견뎌온 그들의 노력을 보고는 감동받는다. 그래, 멋져, 순수해. 하지만 동시에 아이돌이란 기획사를 통해 혹은 팬들을 위해 자신의 그 어떤 것도 다 상품화 하도록 요구받는다. 노래, 춤 뿐 아니라 성격, 재능, 끼 그리고 운동신경, 피부 세포, 혈액 상태까지도 말이다. 관음증적이라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아이돌을 향한 과열된 상품화. 대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정말 이토록 누군가를 다 파헤쳐야만이 그를 알고 보고 그를 좋아한다고 믿을 수 있는걸까. 누가,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노예라는 말이 떠오른다.

응답 2개

  1. 사루비아말하길

    ‘생선 발라먹듯’이라는 표현이 확 와닿는구료!!
    나이 있는 연예인을 대상으로 하는 이런 프로그램에서는 별 거부감이 없었는데, 아이돌을 대상으로 하니 뭔가…이상하다고 느꼈던 걸 짚어줘서 속이 시원~
    잘 읽었어욤 ^_^

    • 안티고네말하길

      ‘생선 발라먹듯’은 제가 평소에도 종종 쓰는 말이에요
      세미나 할 때라든가~^^ㅋㅋㅋ
      어감이 재미나죠~

      사실 저런 류의 프로그램은 나이든 연예인을 상대로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저에겐 충격과 공포가 오고간 프로그램이었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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