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역사, 일상을 소중하게 담는 기록

- 풍경지기 박혜숙


『기록한다는 것』, 오항녕 지음, 너머학교

1. 일상을 소중하게 깨닫다

지난 가을 제주도를 여행했다. 어느 땐가부터 제주도에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곳이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귀에 익숙한 관광지 대신 올레길 몇 구간을 걸었다는 말을 했다. 나는 기대했다. ‘바다가 있고 억새가 있는 길을, 그리고 맑은 바람이 있는 제주길을 걷는다는 말이지…….’ 그래서 여행을 가기 전에 올레길 중 한 구간과 제주를 사랑한 사진 작가 김영갑 갤러리,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용눈이 오름을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금요일 저녁, 제주도에 도착했다. 다음날 오전에는 김영갑 갤러리에서 제주를 담은 풍경을 만났다. 카메라를 들고 풍경 앞에 선 작가의 마음이 읽혔다. 그리고 올레길을 걸었다. 쇠소깍에서 시작되는 구간이었다. 멋진 계곡이 이어지고 바다가 이어지고 마을길이 이어졌다. 마을길에는 낮은 돌담 울타리 너머 탐스런 감귤이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렇게 기대했던 올레길 여행이건만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함께 간 친구는 이 구간보다 외돌개에서 시작하는 구간이 더 멋진 구간이라 별 감흥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말로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머릿속에는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시골길이 떠올랐다. 가을학기가 되면서 이곳저곳 혼자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았다. 혼자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고 잠시 동안이라도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되면 서둘러 급식소에서 밥을 먹고 학교 근처 시골길을 걸었다. 언덕을 따라 논이 이어진 길이었다. 내가 그 곳을 걸을 때마다 농사를 짓는 어르신들을 만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연과 만나는 고요한 길이었다. 그 길을 걸어 경사진 길을 넘어설 때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행복을 느꼈다.

결국 제주 올레길을 걸으며 내가 깨달은 것은 제주 사람들에게는 제주 올레길이 그들의 아름다운 일상이듯 나에게는 내가 걸었던 그 길이 아름다운 일상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제주 올레길이 나에게 선물한 것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아름다움’이었다.

2. 기록한다는 것

나에게 오항녕 선생의 『기록한다는 것』은 제주 올레를 걸을 때의 깨달음, 즉 내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게 해주었다. 선생은 거창한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어린 시절 칠판에 적어놓았던 ‘떠든 사람’이라는 기록으로 말문을 연다. 칠판 끝자락에는 항상 ‘떠든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다. 선생님이 그 기록을 보고 아무런 야단을 치지 않아도 이름을 적힌 아이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싶어한다. 이것은 자신의 행동이 어딘가에 기록되어 남는다는 사실만으로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며 선생은 이를 ‘떠든 아이 효과’라고 명명한다. 우리에게 기록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갖는다.

춘추시대에 공자는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고 거짓과 옳지 않은 일이 많아지자 『춘추』를 짓는다. 그러자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두려움에 떨게 된다. 기록한다는 것이 이런 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역사가 과거의 사람들 또는 미래의 사람들과 지금의 내가 ‘평등하게’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즉 지금의 나는 미래에 만날 누군가가 나의 기록을 보고 내 리는 평가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미래의 누군가는 지금 나의 기록을 보며 나의 삶을 평가하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이지 배울 것이다. 이 두 존재는 평등하다. 누가 누구에게 예속되는 관계에서는 그런 평가가 불가능하며, 그런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예를 우리의 소중한 역사 기록,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국왕이 세상을 뜨면, 조정에서는 곧 실록청을 설치하여 편찬을 시작했다. 사관의 사초를 비롯한 여러 기록을 모아서 초고, 중간 초고, 최종본을 만든 후 최종본을 기준으로 인쇄본을 만들어 사고에 보관했다. 이 기록 속에는 태종이 말에서 떨어진 후 좌우를 돌아보며 했던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라는 말이 기록될 정도로 정확했다.

이런 기록이 유출되면서 사화를 부르기도 했지만 선조 연간 이후에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조선 후기에는 어떤 정파가 만든 실록을 다른 정당이 부정하고 새로 실록을 만드는 일이 몇 번 생겼다. 사림들끼리도 파가 갈렸는데, 다른 파가 만든 실록은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많다는 이유로 개정하거나 수정한 것이었다. 그 시작이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인데 우리 선조들은 수정했다고 해서 이전의 것을 없애지 않고 두 실록을 함께 남겼다. 어느 편이 더 정당한지를 평가할 몫은 후대 사람들의 몫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록만을 남겨 뒷사람들의 눈을 가리지 않는 것, 자기 시대만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도 대등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믿고 맡기는 자세’를 저자는 높이 평가했다.

3. 근대사회, 인간과 인간의 평등이 깨지다

그러나 이런 평등관계가 깨지는 시기가 근대사회라고 소개한다.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역사를 ‘진보’라는 관점으로 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인간과 인간의 평등은 깨져버렸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가 자유나 평등의 확대 과정이었고, 과거보다 지금이 훨씬 잘 살게 되었다는 관점에서 과거는 현재를 위해, 현재는 미래를 위해 존재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과거의 인간, 현재의 인간, 미래의 인간 사이에 위계가 생겨나고 인간과 인간의 평등은 붕괴되어 버린다.

우리가 학교 현장에서 배우는 역사는 철저하게 이런 관점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래서 학교 현장에서 배우는 역사 시간이 과거 이 땅을 살았던 사람들을 존중하게 되는 시간이 되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 개발논리가 쉽게 합리화될 수 있는 분위기도 이런 상황에서 촉발되는 것은 아닐까? 어차피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발전된 형태일 것이니까. 그리고 과거의 인간보다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리고 내일을 살 그들이 더 훌륭한 문명을 이뤄낼 테니까.

이런 관점의 형성과 함께 실록을 제작하던 귀중한 전통이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면서 끊어져버린다. 그리고 최근에는 광주학살진상규명청문회에서 기억나지 않는다로 일관하는 자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증거 기록 파괴와 은닉이 자행되었다. 그후 공공기록의 관리에 관한 법률 제정이 되었으나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기록의 전통이 깨어지면서 정보의 편중 현상은 날로 심화되어가고 있다. 이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저자는 현재의 ‘정보공개제도’를 소개하고 있다. 이는 정부가 가진 정보를 적절한 절차를 거쳐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이를 통해 정부가 은밀하게 정보를 남용하여 시민을 감시하거나, 시민들의 생활과 관련된 결정을 자기 마음대로 내리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 또한 시민들의 세금인 예산을 멋대로 사용하거나 부패한 공무원들이 특정 세력의 이익을 위해 엉터리 사업을 추진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 이것은 근대사회 이후 붕괴된 평등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노력이 될 것이다.

4. 일상을 기록하다

이 책은 ‘떠든 아이 효과’를 시작으로 기록의 역사를 살핀 후 마무리에서 우리 일상의 삶을 바라본다. 저자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가 국사로 한정되어 있음을 안타깝게 여긴다. 전통 시대의 역사는 ‘경험의 자료’였지만 근대 역사학은 ‘국민국가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허구화된 서사임을 지적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는 지역의 역사, 우리 가족의 역사, 나의 역사인데 ‘국사’만을 역사의 모든 것인양 가르치는 태도는 결국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내 삶, 우리 가족의 삶, 우리 지역민의 삶보다는 ‘국가’ 국민으로서의 삶이 중요하다는 사고를 주입하고 국가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전파한다. 그러므로 역사라는 이름으로 ‘국사’만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역사의 변화도 한 인간의 삶에서 증거를 남기지 않고 서술될 수도 없다면, 그 변화나 격동은 한갓 허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여러분의 삶이 흐르는 길, 하루하루가 만들어지는 리듬이 곧 역사이며, 그것은 기록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잘못된 일을 성찰하게 하여 삶을 깊이 있게 해 주고, 잘한 일은 흐뭇하게 떠올리게 하여 삶에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합니다.(120페이지)

며칠 전 부산대학교 밀양캠퍼스 점필재연구소에서 여는 고전아카데미 마지막날 강의를 들었다.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오항녕 선생의 강의였다. 앞서 살펴본 이야기를 선생은 힘있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당신은 역사가임을 여러 번에 걸쳐 반복해서 강조하셨다. 그 말씀에 담긴 눈빛, 목소리가 무척 당당했다. 평생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어른을 만난다는 사실이 그 강의를 듣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큰 행운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날 내 옆에는 독서모임 풍경 활동을 두 해 동안 함께 했던 동혁이와 제민이가 있었다.

쉬는 시간이었다. 옆에 앉은 동혁이를 쳐다보았다. 동혁이 책상 위에는 풍경자료집이 펼쳐져 있었다. 동혁이는 수능이 끝난 후 지금까지 풍경 아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앨범으로 엮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자료집은 풍경 아이들이 2년 동안 책을 읽고 토론한 후 제출한 후기를 모아 엮은 자료집이었다. 동혁이는 앨범에 실을 글을 뽑기 위해 엄청난 두께의 자료집을 읽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걸 알고는 나를 쳐다보며 미소지으며 말했다.

“선생님, 이 자료집이 우리의 기록이고 역사네요. 풍경실록이네요.”

풍경자료집에는 풍경 4기 아이들과 나의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담겨있다. 이 자료집을 현재의 나와 풍경 4기 아이들이 다시 읽을 때마다 그때의 고민, 그때의 설렘을 기억하며 현재의 삶을 신중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풍경 5기, 6기를 비롯하여 앞으로 풍경 활동을 해나갈 아이들은 그 자료집에 실린 선배들의 글을 읽으며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채워나갈 것이다.
제주 올레길 여행을 통해 내 일상의 길이 아름다운 길임을 깨달았듯이 이 책을 읽고 여행을 하면서 내 삶이 하루하루 흘러가는 길이 역사임을 깨달았다.

응답 1개

  1. beforesunset말하길

    선생님과 공부하는 아이들이 슬그머니 부러워지네요. 이 또한 기록한다는 것의 힘이겠죠^^ 풍경실록을 통해 영글어갈 아이들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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