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크라시나우 리뷰

기획 인터뷰 – 슬라보예 지젝

- 육은정

Democracy Now는 2010년 10월 8일자 방송에서 슬로베니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과의 인터뷰를 마련했다. 지젝은 전유럽에 확산되고 있는 반이민주의 경향에 대한 우려에서 출발하여 현재 유럽의 정치적 지형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최근 유럽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우파적 분위기는 좌파의 소멸, 정확히는 좌파의 정확한 문제인식의 실패와 궤를 같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사회적 이슈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선점하고 좌파들이 오히려 보수적 세력으로 기능하게 된 아이러니한 현재의 정치적 현실을 진단하고, 자본주의의 문제를 단순히 자본가대 노동자라는 선악구도에서 파악하는 도덕주의적 접근의 한계를 지적한다. 더불어 우리의 경제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전지구적 관점에서의 인식과 우리의 삶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촉구하고 있다.

Part 1

에이미 굿맨

자, 이제 유럽으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유럽에서는 지금 반이민 정책과 정치적 레토릭이 증가하면서 많은 이들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반이민주의는 이제 극우파들의 전유물을 넘어서서 주류적 경향이 되고 있습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 주말, 보수기독민주주의연합의 젊은 당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문화주의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연설했습니다.

앙겔라 메르켈

“프랑크푸르트에는 다섯 살 이하 어린이의 세명 중 두명이 이민자 출신입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초반 실제로 이주노동자들을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그들은 오래 머물지 않고 언제가 사라질 것이라는 말로 우리 자신을 속여 왔습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말하는 이런 다문화주의적 접근은 실패했습니다.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에이미 굿맨

독일 총리는 또한 이민자들은 독일에서 환영받았으며 이슬람은 독일 현대문화의 일부라고 덧붙였습니다. 우파적 전환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는 그녀의 연설은 중도좌파인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의 연구 결과가 발표된 며칠 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연구는 독일인 삼십퍼센트 이상이 독일이 “외국인들로 넘쳐난다”고 생각하며,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또한 “이민자들은 독일의 사회적 혜택 때문에 독일에 왔으며 독일의 일자리가 부족해 졌을 때는 고향으로 돌려보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올해 초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던 한 영향력 있는 은행경영인의 저서는 ‘많은 이민자들을 통합하지 못함으로 인해 독일의 국민성이 쇠하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독일에서 일고 있는 이러한 논쟁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여기 뉴욕에서 한 지식인과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문화 이론의 엘비스”라고 불립니다. 맞습니다. 슬로베니아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슬라보예 지젝입니다. 그는 삼십 권이 넘는 책의 저자이며 최근 베르소에서 신작이 출간되었습니다. 제목은 <종말의 시대에 살기>입니다. 그는 최근 런던 가디언지에 “유럽 전체에 합리적인 반이민정책의 필요성를 요구하는 극우정치의 바람이 일고 있다”고 논평했습니다. 지젝씨, <데모크라시나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슬라보예 지젝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미 굿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다문화주의에 대해 얘기했는데요. 다문화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말입니다. 그리고 프랑스를 비롯해서 유럽 국가들에서 대중적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데..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슬라보예 지젝

저는 유럽인들이 자만에 빠져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똘레랑스의 모델이라는 둥 그런 것 말입니다. 지금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 그런 일들이 우리가 평소 비관용하면 떠올리는 나라들, 예를 들어 루마니아, 헝가리 등 남동부 유럽만이 아니라 정말로 똘레랑스의 모델이라고 생각해왔던 네덜란드나 노르웨이와 같은 나라들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단순하고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민주주의에서 관용(똘레랑스)의 실질적 의미는 ‘공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셈족주의나 성차별주의적 농담은 공적으로 던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십년, 십오년전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이런 것들이 지금은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또한 대단히 걱정스럽게도 이십년 전에는 전적으로 우파의 영역이었던 문제들이 일반적 의제로서 설정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직까지는 비주류일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전형적인 레토릭은 두 가지 모습을 띱니다. 일단 당신은 극우파를 비난합니다. ‘극우파는 우리의 발전된 민주주의에서는 자리가 없다’고 하죠. 그러나 이내 당신은 덧붙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걱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말하죠. ‘증오가 터져나오기 전에 막아야 한다.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 더러운 궤변론이죠. 당신이 아까 말했던 그 은행가, 사라진에서 중요한 게 뭔 줄 아십니까? 그는 정치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웠습니다.

에이미 굿맨

그 말은?

슬라보예 지젝

그러니까, 극우파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모두의 문제로 치환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놀라운 얘기를 해드리죠. 저는 당연히 이 끔찍한 논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짜 폭동이 일어날지 모르니 신중해야한다’는 논리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표준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다문화주의적 접근에는 실패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민족 집단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집단들의 공존을 보장하는 중립적인 법적 틀’이라는 시각 말입니다. 내 얘기가 충격적이라면 미안합니다만, 저는 독일인들이 ‘주도 문화Leitkultur’라고 부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이것이 국가적으로 정의되지 않아야 할 뿐입니다ㅡ그런 것과는 싸워야죠. 맞습니다. 저는 우파에 동의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두에 의해 수용되는 일련의 가치들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가치들이냐? 우리가 간과한 것은 이 부분입니다. 그것은 단지 추상적인 자유주의적 모델이 아닙니다. ‘너에게는 너의 세계가 있고, 나에게는 나의 세계가 있고, 우리에게는 단지 중립적인 법적 네트워크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것ㅡ다른 말로 하면, ‘서로를 어떻게 정중하게 무시할 것이냐’ㅡ는 아니라는 거죠.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반이민주의의 폭발이 좌파정치의 후퇴-특히 경제 영역에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좌파들은 마치 경제적인 문제에서 반동적으로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낡은 노동조합 대표들이 아니다’, ‘우리는 포스트모던적 디지털 자본주의에 찬성한다’ 운운하죠. 그들은 노동계급이나 소위 말하는 하층계급은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우파가 들어옵니다. 이로써 끔찍한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오늘날 유럽에서 평범한 노동자 계층에 어필할 준비가 되어있는 정치세력은 변두리 좌파 정당들 빼 놓고는 오로지 반이민주의 우파들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좌파들은 모욕당한 관용주의자의 포즈를 취할 권리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는지를 말입니다.

에이미 굿맨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의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독일인의 13퍼센트가 새로운 ‘지도자’의 도래를 반기고, 삼분의 일 이상이 나라가 ‘외국인들로 넘쳐난다’고 느끼고, 약 60퍼센트가 이슬람 의식에 반대하며, 17퍼센트가 유대인들이 너무 많은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밝혔는데요.

슬라보예 지젝

또 놀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의 의미를 과장하면 안 됩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독일은 일상적인 삶에서 프랑스보다 훨씬 더 관용적입니다. 저는 이것을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구서베를린의 다인종 지역에 가 보십시오. 여전히 놀라운 협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제 말은, 구체적인 수치에 너무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저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유럽의 정치적 지형이 끔찍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가’ 입니다. 저는 이에 대해 당신이 친절하게도 앞에서 소개해 준 저의 책에서도 말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재 우리에게는 하나의 큰 중도좌파 정당과 하나의 큰 중도우파 정당, 그리고 작은 변두리 정당들이 있습니다. 정당 두 개가 거의 전 인구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럽에는 서서히 하나의 극단이 출현하고 있는데, 바로 하나의 큰 자유주의 정당입니다. 심지어 낙태, 여성인권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들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순수한’ 자본주의 정당 말입니다. 그리고 심각한 대립이라고는 오로지 이민 VS 반이민 밖에 없습니다. 이건 끔찍한 일입니다. 오로지 반이민주의자들만이 진정한 항변의 목소리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진정한’이라는 말은 정치적인 의미가 아니라 경험적인 의미입니다. 만약 당신이 항변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면, 유럽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길은 이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약간만 더 급진적인 좌파가 출현하는 것은 생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학자였던 발터 벤야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파시즘 뒤에는 실패한 혁명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말이죠. 그 어느 때보다 이 얘기가 더 들어맞는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고향 켄자스를 예로 들어보죠. 지금은 기독교 근본주의의 진원지가 되었죠. 토마스 프랑크는 자신의 책에서 ‘맙소사, 이삼십년 전에는 켄자스는 모든 급진적 사회주의자와 대중 운동의 요람이었는데!’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운 일이죠. 자만은 안 됩니다.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인종주의에 대한 비난은 항상 우리 중상층 자유주의자들이 평범한 사람들을 묵살하는 식으로 이루어지죠. 이런 거만한 태도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해야 합니다.

에이미 굿맨

그리고 여기 미국에 오셨으니까 말인데요, Tea Party 운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슬라보예 지젝

그것은 제가 하려는 얘기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례입니다. 일년 전쯤 그들 풀뿌리 공화당원들이 (정부가) 은행에 너무 많은 돈-공적 자금-을 쓰는 것에 반대하여 처음 운동을 일으켰을 때, 저에게는 이와 관련하여 어떤 깨달음의 순간-이것도 좀 아이러니컬한 용법입니다-이 있었습니다. 저는 한 호텔방에 앉아서, 두 채널을 왔다갔다 하면서 티비를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폭스 뉴스였는데(싸우려면 적을 알아야잖습니까) 텍사스의 Tea Party 운동에 관한 라이브 방송에서 한 가짜 포크 가수가 나와서 ‘안티 워싱턴’, ‘국가 지출 반대’, 뭐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PBS였는데, 유명한 좌파 아이콘 페트 시거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두 방송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이 거의 흡사하다는 사실에 충격 받았습니다. 각각의 정치적 의미가 어떻든지 간에 말입니다. 두 방송 다 ‘힘없고 평범한 사람들이 착취당하고 있다’, ‘나쁜 권력자들’, ‘워싱턴의 은행가들’ 어쩌고 저쩌고를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월스트리트 어쩌고 저쩌고…이건 비극입니다. 가장 순수한 의미의 비극입니다.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저의 판단으로는 이 풀뿌리 운동들이 우파들에 의해 장악되기 시작한 것은 카터 이후 레이건 때부터 인 것 같습니다. 좌파의 시대, 급진적 대중 운동의 시대는 갔습니다. 누군가 ‘아, Tea Party, 풀뿌리 지역 운동이죠’라고 하면 당신은 우선 ‘우파들, 또 시작이야 뭐야?’ 하겠죠. 이건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유럽이 미국을 비난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이런 일이 바로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이 말했던 ‘이성의 공적 사용’ 소멸하는 세계적인 과정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미국대학들이 어떻게 점점 더 기업들에 의해 이용되어 가는지를 고발한 리포트를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유럽에서 상황은 더 나쁩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는 프로그램이 명확히 제시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대기업들이 기부를 통해 대학들을 통제하는, 이런 구체적인 상황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언가 더 근본적인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문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모든 과학자들을 전문가로 만들려는 전유럽적인 조직적 캠페인입니다. 이 아이디어는 이런 것이죠. 문제가 발생했을 때-예를 들어 루이지애나 기름유출사건과 같은-‘오 문제가 발생했다. 이 문제를 처리할 전문가가 필요하다’, 혹은, ‘공공질서가 무너졌다, 시위가 발생한다, 우리에겐 심리학자가 필요하다’ 하는 식이죠. 이건 사고하는 게 아닙니다. 대학의 임무는 문제를 정의하는 권력자들의 전문가로 기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 자체를 재정의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확한 문제인식인가? 이것이 진정 문제인가?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하는 거죠.

또 다소 충격적인 얘기를 하게 될 지도 모르겠는데, 저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여전히 동정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의 가장 큰 실패들 중 하나는 아프가니스탄이 아닙니다. 그 문제는 아주 복잡하죠. 저였어도 어떻게 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그의 기름 유출 사건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거기서 법적, 도덕적 게임을 하려했기 때문이죠. 이런 비극에서 누가 죄인인지를 밝히는 류의 도덕성 게임은 불가능합니다. 더 보편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BP(British Petrol)가 악덕기업이라고 칩시다. 그러나 이런 일이 또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BP가 아닌거죠. 문제는 훨씬 더 보편적입니다. 우리의 경제구조, 우리의 삶의 방식, 우리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문제의 핵심입니다. 제가 좌파로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이러니이긴 합니다. 우리는 아마도 지나치게 반자본주의적이었는지 모릅니다. 반자본주의의 과잉 속에서 우리는 항상 법적, 도덕적 언어로만 말해 왔습니다. ‘오 그 기업은 아동 노예 노동을 이용해, 오 이 기업은 자연을 오염시켜, 오, 저 기업은 우리 대학을 착취하고 있어’ 운운하면서 말입니다. 틀렸습니다. 문제는 더 근본적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전체적인 시스템이 그 기업들로 하여금 그러한 짓들을 하게 만드는가?’ 입니다. 문제를 도덕화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도덕화하는 순간, 무슨 말이든지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와 같은 영화에서 이미 보여주었듯이, 대기업은 물론이고 심지어 미국 대통령도 부패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반자본주의의 과잉은 가짜 과잉입니다. 우리는 더 근본적인 물음을 묻기 시작해야 합니다.

에이미 굿맨

지젝씨, 신작의 제목을 왜 <종말의 시대에 살기>라고 지었나요?

슬라보예 지젝

제 의도는 ‘2012년(혹은 언제가 됐든지 간에), 종말이 온다’는 식의 종말론적 운명을 환기시키는 비유 또는 아이러니컬한 지칭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우리는 살 날이 이년밖에 남지 않았고 그 때가 되면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진다’는 류의 얘기를 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이런 얘기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생각에 우리는 좀더 다른 차원에서 일종의 영점zero point에 천천히 접근하고 있습니다. 생태계만 봐도 명백하죠. 확실한 것은 누군가 제게 ‘당신은 이상주의자로군’이라고 말한다면 저는 ‘아니오, 진짜 유토피아는 지금과 같은 상태가 한계없이 지속되는 거죠’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을 보면 정말 이상합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재앙이 일어날 거라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재앙의 가능성에 대해 알고 있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밖에 나가면, 태양이 있고, 풀들은 푸르고, 아무 문제가 없죠. 동시에 우리는 일상생활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매일 공갈당하죠. ‘신문을 그렇게 버리다니. 그러면 안돼요’. 우리는 분열되어 있습니다.

에이미 굿맨

십초 남았습니다

슬라보예 지젝

네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가 어떤 영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하자면 이십년 후에 여기에 존재할 사회에서 저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Part 2

에이미 굿맨

이렇게 경제적인 압박이 많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계속해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전쟁을 확대하고 있는데요.

슬라보예 지젝

글쎄요, 우선 케인즈가 유행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케인즈주의가 레이건때부터 계속되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 경제는 그 모든 자유주의적 레토릭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케인즈주의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신자유주의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인정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제 말은 신자유주의가 우리 경제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개입하고 또 개입하는 매우 강력한 국가주의적 경제입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제 첫 번째 요점입니다.

제 두 번째 요점은,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또 하나의 놀라운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간 것이 재앙이라는 것은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비극은 우리 서구가 그곳에 개입함으로 인해 이제 더 이상 그곳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매우 간단한 얘기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은 40년 전만 해도, (유감스럽게도 저는 40년 전을 회고할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어버렸군요.) 중동 무슬림 국가들 중에서 가장 관용적인 나라였습니다. 강력한 지역 공산당과 친서방 테크노크라트 왕이 있었죠. 그 후에 우리가 익히 아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공산당이 권력을 잡으려고 했던 거지요. 성공이었죠. 그러나 그들이 무너지려 하기 시작할 때쯤 소비에트 연방이 개입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지지했죠. 다시 말해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아프가니스탄이 우리가 계몽시켜야 할 오래된 근본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은 매우 훌륭하고 관대한 나라였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근본주의화는 명백히 국제 정세에 휘말린 결과입니다. 우리, 전지구적 자유주의 시스템이 근본주의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에이미 굿맨

방금하신 얘기 설명을 좀 더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젊은 층은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고, 미국이 이슬람을 지원하고 했던 당시 상황을 잘 모를테니까요.

슬라보예 지젝

제 생각에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파키스탄, 사우디 아라비아 등 소위 중동 문제로 분류되는 이슬람 근본주의와의 싸움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는 50년대 후반, 그리고 특히 60년대, 70년대에 미국을 포함한 서구가 범했던 재앙적인 전략적 계산착오를 파악하는 데 있습니다. 짧게 말해, 그들은 주된 위험요소가 세속주의 좌파들이라 생각했고(왜냐하면 그들은 어쨌든 공산당에 의해 조종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최소한 단기적으로 봤을 때 그들에 대항해서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을 지원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옳다고 봤습니다. 조금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오늘날 철두철미한 CIA요원이 아닌 이상 이 거대한 악의 축들 중에서 과거에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 쪽을 찾는 게 어려운 이유입니다. 오바마 빈 라덴이 바로 서구의 지원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에이미 굿맨

오사마 빈 라덴이죠.

슬라보예 지젝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아, 오사마죠. 깊이 사과드립니다. 저는 여전히 오바마 대통령에게 호감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것이 바로 역설입니다. 반이민주의 문제와 똑같은 교훈입니다. 우리 자유주의 다수파들은 깊은 의미에서 근본주의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과잉에 대한 반응이라는 설을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문자 그대로 근본주의를 창조했습니다. 우리에겐 이처럼 오만하게 관망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 세상에, 어떻게 저런 원시적인 사람들이 있을 수가.’ 미안하지만 우리가 망쳐놓기 전에는 거긴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에이미 굿맨

해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 조 달러 비용이 들어가는 전쟁은 어떻습니까? 조 스티글리츠(Joe Stiglitz)와 린다 빌머스(Linda Bilmes)는 3조 달러로 계산했는데요. 여러 해를 넘기고 있고, 퇴역군인들에 대한 지원까지 생각하면 이 수치는 과소평가된 것 일수도 있는데요. 국내 경제는 위기인데 말입니다.

슬라보예 지젝

심각한 문제입니다. 제 생각에 군비지출은 이제 우리 경제가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평화 운동만으로도 안 되고, 경제구조 자체를 훨씬 더 근본적으로 개혁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파 군국주의자들이 공갈을 하긴 하지만 그 공갈에는 어떤 면에서는 진실의 국면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경제는 사실 군비지출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상대적 복지는 군사적 케인즈주의의 결과였습니다. 저는 전쟁의 종결과 평화를 기원하는 이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는 모든 환상을 걷어낸 채 더욱 급진적인 질문 즉 우리의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때입니다. 더 이상 이 문제를 피할 방도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에게 옛날식의 공산당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미치지 않았습니다. 구 공산주의자들은 권력을 쥐게 되면서 서구 자본가들보다 훨씬 더 나쁜 자본가들이 되었습니다. 중국을 보십시오.

에이미 굿맨

프랑스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은퇴정년이 60세에서 62세로 늦어지는 것 때문에 대규모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는 얘기를 들으면 제 생각에 여기 미국인들은ㅡ

슬라보예 지젝

에이미 굿맨

사람들은 미국에서도 은퇴정년이 앞당겨지길 바랄 것 같은데요.

슬라보예 지젝

맞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얘길 하나 해 드리죠. 제 나라 슬로베니아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저도 기본적으로는 파업하는 사람들을 원칙적으로 지지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 중 대부분이 고용 안정이 보장된 공무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지금 유럽에서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고 점점 더 과열되고 있는데 여기서 그 모든 것들을 항상 파악할 수는 없죠. 감히 파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는 특권층, 고용 안정이 보장된 공무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안돼요, 우리의 봉급을 동결하는 것을 원치 않아요, 올려야 됩니다’, 라고 하면서 파업을 합니다. 반면에 제 나라의 경우, 수천명의 여성 직물 노동자들이 있는데, 만약 그들이 오늘날 파업을 하는 사람들과 같은 상황에서 ‘종신 고용을 보장해 주겠습니다. 그러나 봉급은 5년 동안 동결입니다.’ 과 같은 제안을 받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세상에! 우리가 감히 꿈꾼 것보다 더 좋아요’ 제가 걱정스러운 것은 이렇듯 파업의 지배적인 흐름이, 낡은 레닌주의 용어로 말해 ‘노동귀족(workers aristocracy)’-안정적인 자리가 보장된 사람들-적 경향을 띤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궁핍하고 가난한 노동자들은 감히 파업을 할 수도 없습니다.

에이미 굿맨

하지만 프랑스에서와 같은 대중 시위가 여기 미국의 거리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데요.

슬라보예 지젝

맞습니다. 그건 프랑스의 오랜 전통이죠. 저는 그걸 과대평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왜냐하면 슬프게도 거기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같은 문제로 돌아가게 되는데―거기에는 전지구적 대안적 비전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제가 마치 안티 노동자로 보이겠지만, 전 정말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그들은 단순히 ‘오, 아뇨, 우린 이걸 원합니다. 우린 우리의 몫을 원하는 것 뿐입니다’ 라고 생각합니다. 좌파는 ‘어떻게 전체 경제구조를 재건설 할 것인가’에 대한 보다 전지구적인 관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제 말은, 그들이 진짜 원인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를 매우 슬프게 합니다. 이건 전형적인 문제입니다. 오늘날 좌파가 하는 것은 삭감에 반대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이런 사회적 의미에서 좌파는 보수적인 힘입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의 사회적 의미에서 봤을 때 오늘날의 혁명적 계급은 자본가들입니다. 슬픈 현실이죠.

에이미 굿맨

마지막 질문입니다. 계속해서 시스템에 관한 거대한 주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데요ㅡ우리가 진짜 봐야 할 것으로요. 설명해주시죠.

슬라보예 지젝

아뇨,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기름유출사건을 예로 들어보죠. 저는 ‘우리는 자본주의를 바꿔야 한다’와 같은 원시적인 구좌파의 슬로건 따위를 외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얘기하는 것은 오늘날의 계몽된 자본가들조차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선과 악의 대결과 같이 도덕적인 언어로 이루어지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제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우리가 어떤 정치적인 선택을 하고 어떤 경제적인 선택들을 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들에서 더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요지는 단순합니다. 한마디로 좀더 전지구적 관점을 가지고 사고하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저를 이상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예를 들어 드리죠. 지극히 온건하고 친자본주의적인 사례입니다. 제가 노르웨이에 있을 때 들었던 얘깁니다. 90년대 초반 쯤 새로운 위기가 시작되자-이때는 이미 예전의 복지 산업 국가는 사라졌을 때인데-, 그들은 매우 온건하면서도 기적적인 일을 해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것은 스칸디나비아에서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무역 연합들, 산업가들 등 다양한 분야의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일종의 사회적 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러한 산업들은 희생시키자, 고통 받는 이들을 돌보자’, 등등. 그들은 전체 국가 경제를 실질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는 노르웨이가 기름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최근 노르웨이의 한 친구가 제가 입증해 준 바에 따르면 노르웨이의 1인당 생산량은 기름이 없더라도 스웨덴보다 50%가 더 높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증명할 것은 ‘어떻게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스칸디나비안 국가들에 대한 아주 훌륭한 사회학 논문을 한편 읽었는데, 그 논문에 따르면 여전히 믿기 힘든 수준의 건강보장과 평등을 갖고 있는 스칸디나비아의 일원인 노르웨이의 대기업에서는, 심지어 사기업에서도, 가장 낮은 직급의 노동자와 사장의 봉급 수준 차이가 1대 4인 것이 보통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려드리죠. 세계무역기구(WTO)의 경쟁력 순위 리스트를 살펴보면, 신자유주의자들이 항상 하는 주장들-‘지나친 건강보장, 사회복지, 평등주의는 우리의 경쟁력을 손상시킨다’ㅡ이 사실이 아니라는 경험적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코 공산주의자의 속임수가 아닙니다. 저는 사회주의 혁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상황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전략들을 실천할 공간이 꽤 많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밀고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재밌는 얘기 하나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사람들은 내게 ‘당신이 말하는 것들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합니다.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요즘 얼마나 이상하게 쓰이는지 아십니까? 사적인 즐거움과 기술에 관해 얘기할 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가 영원히 살기나 할 것처럼, 모든 것이 다운로드되고,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말입니다. 기술영역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변화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오면, ‘사회주의권 붕괴에서 겪지 않았나’라고 하면서 실질적으로 시장에 훼방을 놓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바뀝니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말합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살 것이고, 어쩌면 우리는 전능한 존재가 될지도 모르고,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 새로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우리 모두가 달나라 여행을 갈 수 있을 거라고. 어쩌면 이러한 상황이 바뀔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 때는 아마도 우리 모두가 디지털적 개체가 되는 그노시스적인 가능성에 대해서는 좀 덜 꿈꾸고, 작은 사회적 변화들에 대해서 좀더 많은 꿈을 꾸게 되는 때이겠지요.

응답 1개

  1. 박카스말하길

    지젝은 ‘어떻게 전체 경제구조를 재건설 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군요. 번역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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