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멋진 하루> 신자유주의시대 붕괴된 중산층의 삶 또는 꿈

- 황진미

<멋진 하루>는 독특한 영화이다. 연인이었던 남녀가 재회하여 하루 동안 함께 돌아다닌다는 설정에서 사랑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멜로물을 떠올렸거나 상반된 캐릭터의 남녀가 티격대다 키스로 끝맺는 로맨틱코미디를 기대했다면 맨송맨송한 결말에 ‘뭥미?’를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무미건조하진 않다. 로맨틱코미디 못지않은 웃음과 멜로영화와는 다른 뒷맛의 묘한 여운을 남기는데, 그 웃음과 여운은 바로 (하정우에 의해 완벽하게 구현된)병운이라는 독창적인 캐릭터와 스산한 경제현실에 대한 섬세한 묘사에서 기인한다.

1. 이 남자가 사는 법 – 병운은 윤리적 인간인가?

<멋진 하루>는 철저하게 캐릭터에 의존한 영화이며, 그 중에서도 병운 캐릭터가 절대적이다. 따라서 병운에 대한 가치판단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능청스러운 날건달’(<오마이 뉴스> 박영신기자, 이윤기감독 대담)부터 ‘순수하고…팅커벨 같은 존재’(<씨네21> 박혜명기자, 이윤기감독 대담)까지 천차만별이다. 다이라 아즈코의 원작 소설에는 여주인공의 입을 빌어 ‘자상하지만 무책임한 남자’로 요약돼 있지만, 그녀 또한 소심하고 까다로운 성격으로 그녀의 평가가 공정함을 담고 있진 않다. <멋진 하루>를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병운 캐릭터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개진해 보고자한다.

그는 참 수완이 좋다. 스크린경마장 직원도 아니면서 직원 출입처에 가방을 두고 드나들며 여직원으로부터는 회식 제안을 받는다. 아는 여자도 많다. 그녀들은 그를 끔찍하게 여기고 피하는 게 아니라, 그를 반기고 (‘삥 뜯긴다’는 생각 없이) 자발적으로 돈을 준다. 물경 350만원이라…수중에 땡전 한 푼 없고, 집도 없이 가방을 싸갖고 다니는 백수치곤 ‘일일 현금 동원력’이 꽤 좋은 편이다. 비록 희수에게는 1년이나 빚을 안 갚은 불량채무자이지만, 다른 이들한테는 나름의 의리와 신용을 잃지 않고 있으며(“나는 꽤 의리가 있어서 쓸모가 많다.”), 예의범절에 능통한데 특히 예의에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상대에게 맞추기’의 달인이다.

그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준다. 여사장에게는 그녀의 재력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기분 좋게 상기시키며, 골프에 대한 조언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주고, 담배를 같이 피워주고는 담배 끊으시라며 초콜릿을 건넨다. 그녀가 보기에 그는 참 “하는 짓도 귀여운” 남자이다. “밤일 하는” 여자에 대해서는 낮에 일어나기 힘든 것을 이해해 주고 씻을 시간을 기다려주며, 얼음 맥주를 대령하며 “나의 기쁨이지!”를 외친다. 두 여자의 감정대립이 격해지자 ‘나 죽었소’ 읍소를 하며 자기자존심을 버려 두 여자의 자존심을 구한다. “술집 여자”인 그녀를 속으로도 비판하거나 경멸한 적이 없으며, 그녀의 생활과 인격을 최대한 존중하기에 그녀는 그를 “괜찮은 오빠”로 생각한다. 정학 맞은 여중생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제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 “누구나 아픔이 있다”고 생각하며 상대를 배려한다. 이는 돈을 받기 위해 일시적으로 취하는 비굴한 제스처와는 다르며, 몸에 밴 태도이자 습관이다. 그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인물이 후배의 남편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데로 상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자신의 가치판단으로 “이 남자랑 잤나?”며 다그친다.

병운은 욕망에 대해서도 유연하다. “여사장이 자자고 하면?”이라는 질문에 “너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 인양 말하는구나”하며 받아친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사전에 절대적 금기의 선을 긋지 않는다. 즉 타인의 욕망을 인정하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돈을 빌리고 갚는 상황에 대해서도 “내가 있을 땐 없는 사람 돕는 거고, 내가 없을 땐 있는 사람에게 도움 받고”라는 경제관념을 피력한다. 처음엔 마치 그가 희수에게 돈을 꾸어주는 상황인양 (“젊은 친구가 그렇게 어려워서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어려운 동창에게까지 자기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였다. 병운은 겉으로 보기엔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 <비스티 보이즈>의 재현과 큰 차이를 보인다. 재현이 끊임없이 주위사람들에게 거짓말로 ‘갈취’하려 드는 것과 달리, 병운은 진심을 담은 (신용)‘거래’를 하고자 한다. (물론 병운의 상황이 더 막장으로 몰리면 재현과 같은 행동을 할지도 모르지만, 현재 병운은 재현과 다른 캐릭터이다.) 따라서 “오늘은 이 친구 일을 봐줘야 된다”고 말하는 병운의 관념 속에서 돈을 갚는 상황이나 돈을 꿔주는 상황은 큰 차이가 없다. 그는 돈을 빌려 줄 여력이 있는 사람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돈을 꾸어 돈이 당장 필요한 자신이나 남이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며, ‘돈은 돌고 돌아 돈’이라 믿는다. 따라서 그에게 ‘돌려 막기’는 돈의 속성에서 기인한 정상적인 경제활동이지, 부끄럽거나 괴로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채무자의 삶이 쉽지만은 않다. 사촌 부부는 그를 대놓고 무시한다. “기분 나쁘지도 않냐”는 희수에게 그는 “그러고 보니 화난다”며 맞장구친다. 기분 나쁘지 않다며 변명하지도 않고, 기분 나빠하지 않는 게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저 상대의 판단에 100% 맞춘다. 그의 이러한 내공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는 사실 자아존중감이 무척 높은 사람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든 근본적으로 나는 꽤 괜찮은 인간이고 앞으로도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심각한 자기비하와 절망에 빠지지 않으며, 사회로부터도 완전히 고립되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에 “조병운 1965-2000”이라는 자막이 나온다. 아마도 조병운이라는 이름은 감독의 지인 이름이었으며, 감독은 그 이름과 캐릭터에 각별한 애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제적 불안정성과 개인의 고립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병운은 새로운 삶의 윤리를 보여주는 캐릭터로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한 인물이다.

2. 스모키 화장법이 추억하는 90년대 – 신자유주의시대 붕괴된 중산층의 삶 또는 꿈

영화의 첫 장면은 스크린경마장 주차장의 사람들을 롱테이크로 훑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땅을 사서 “한방에 3천만 원을 번” 누군가에 대한 말을 주고받으며, 그에게 돈을 꿀 수 있을지 술을 얻어먹을 수 있을지 궁리한다.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은 “경마에 대해 공부를 안 했다”는 말과 점심에 관한 말을 주고받는다. 부동산과 경마, 합법적인 투기와 도박의 ‘돈 잔치’와 밥 먹고 술 먹는 ‘먹고사니즘’에 사람들의 온신경이 집중돼 있다. 그뿐인가. 잠시 세워둔 차에는 급전을 빌려준다는 ‘찌라시’가 무수히 꽂히고, 기둥엔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 현수막이 나부낀다. 이것이 21세기 ‘금융선진화’를 목표로 하는 ‘글로벌코리아’의 살풍경이다.

상황이 이쯤 되니 헤어진 연인이 만나는 빌미가 하필이면 채권채무관계인 것이 이상하기는커녕 자연스럽고 현실적이다. 1997년 <접속>이 나왔을 때 남녀의 만남이 컴퓨터 통신에 의해 익명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에 새로운 시대적 감성을 느꼈던 것과 조금 다른 의미로, <멋진 하루> 역시 새로운 시대적 감수성을 보여준다. <접속>이 정보화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면, <멋진 하루>는 신자유주의시대의 본격화를 알리는 나팔소리이다. 헤어진 남녀의 재회가 로맨틱한 약속과 운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꿔준 돈을 받기위해 이뤄진다는 척박한 설정은, 대다수 청춘남녀가 경제적 불안정성의 나락에 빠져 채권채무 등 금전관계가 주요인간관계를 대체하고 일상을 지배해버리는 살벌한 시대의 개막을 암시한다.

그녀가 갑자기 병운을 찾아온 건 그녀의 상황이 몹시 곤궁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거에 비해 경제 상황이 아주 나빠져 있다. 그녀가 결혼을 못한 이유는 사랑이 어긋나서가 아니라 남자의 실직 때문이다. 그녀는 전업주부를 꿈꾸며 호기롭게 퇴사하였지만, 지금 그녀에겐 월 80만 원의 비정규직을 제외하곤 재취업자리가 없다. 병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과거에 중산계급 출신으로 스키나 승마를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목재 사업을 하다가 어려워져서 희수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빚을 졌고, 결혼도 했지만 결국 부도가 나자 몇 달 만에 이혼당하고 집도 없이 떠돌아다닌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는 사업가와 화이트칼라 정규직노동자로 안정된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경제적 불안정성을 온몸으로 겪고 있다.

그들의 과거 장면이 엔딩 크레딧에 잠깐 나온다. 그들은 빌딩의 로비에서 정장 차림으로 처음 만났다. 이들의 대화가 희수가 엿들었던 오토바이족 남녀의 대화와 같다. 이런 식의 장면이 몇 개 더 있는데, 희수가 보는 버스안의 이어폰을 끼워주는 남녀의 모습은 병운과 사귀던 시절의 모습이고, 희수가 화장실에서 엿듣게 되는 여자의 통화 소리는 희수가 병운에게 했을 이별통보와 같다. 영화는 희수와 병운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두루 비추며, 돈 빌려주는 여자들의 상황은 물론이고 무수한 행인들의 모습까지 애정 어린 시각으로 담는다. 스쳐지나가는 타인들의 모습을 주인공들의 과거와 중첩시키는 방식을 통해 영화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비단 이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주지시킨다. 이들은 도시의 무수한 익명의 남녀들 중 하나이며, 이들의 사연은 특수하다기보다 극히 일반적이다. (차량보관소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네.”) 극히 일반적인 그들의 사연이란 다름 아닌 ‘붕괴된 중산층의 삶(병운) 또는 꿈(희수)’이다.

희수는 짙은 스모키 화장을 했다. 감독의 전작들이나 전도연의 전작들에 비해 매우 이례적인 이 화장법은 완연한 복고풍이다. 90년대 초중반엔 짙은 브라운 톤의 화장법이 유행했지만 IMF이후에는 밝고 옅은 동안메이크업이 대세였다. 스모키 화장법은 IMF 직전 90년대 호황기를 추억케 하며, (이명박 정부가 주장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 ‘잃어버린 10년’을 상기시킨다. (원작소설 역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의 끝자락인 199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자꾸 ‘잃어버린 10년’ 이라는데, 진짜 누가 뭘 잃어버린 것일까? 90년대까지 한국사회의 개인들은 ‘과거=못살던 시절’로 회상하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전면화 된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과 신용불량으로 내몰린 개인들은 ‘과거=그래도 더 나아질 것이란 희망을 품고 살던 호시절’로 추억한다. 그렇다. 87년부터 97년까지, 민주화운동과 노동자 대투쟁으로 임금상승을 경험하고, 문화가 전면에 나섰던 ‘벨 에포크’의 시대에, 그때는 웬만한 직장인이나 자영업자는 다 자신이 중산층인줄 알았고, 설사 아니더라도 자식 대에는 더 풍요롭고 문화적인 삶을 살 거라 기대하며 살지 않았던가? IMF 외환위기 후 10년, 희망을 몰수당한 채권채무관계의 남녀가 부산하게 돌아다니는 2008년 서울의 스산한 거리. 그 (살)풍경이 실로 리얼하게 눈에 착 감기면서 우울감은 증폭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걸친 “조의 키친” 간판이 한 가닥 희망을 말하는 듯하지만, 그마저도 인심 좋은 할머니 식당이 망해서 없어져버렸다는 영화 속 대사와 겹치면서 기묘한 여운으로 남는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