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정치는 사라지고 손익계산만이 남은 풍경

- 이주성(고대문화)

1.

지난 2010년 11월 28일 열린 고려대학교 임시전체학생대표자회의(이하 전학대회)에서는 안암캠퍼스 총학생회장단(이하 안암총학)을 탄핵하는 총 투표의 실시가 의결되었다. 안암총학이 자신들이 만든 강의평가정보 사이트를 활용하여 학생들의 개인정보를 열람했던 것이 밝혀지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고려대학교 개교 이래 사상 최초의 ‘총학생회 탄핵 총투표’였다.

사람들은 무너져가는 학생회의 신뢰도에 대해서 우려하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학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분위기가 재현될 수 있다는 기대였다. 학내 곳곳에 수십장의 대자보가 다투어 게시되고, ‘고파스’와 같은 학내 커뮤니티에도 연일 이 사안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뿐만 아니라 참석 대의원의 부족으로 번번이 개회가 연기되곤 하였던 전학대회가 정시에 시작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그 ‘일말의 기대’는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그 기대는 2010년 12월 7일, 투표율 38.51%로 투표 자체가 무산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그 며칠 동안 여기저기에 나붙었던 대자보보다 더 구석구석, 깊이깊이 침투해있는 ‘무관심’이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고려대학교에 이른바 ‘비권’ 학생회가 등장한 것은 2007년의 일이었다. 그들은 그 동안의 ‘운동권’ 학생회를 비판하면서, 학생들의 ‘복지’를 전면적으로 내세웠다. 그들이 말하는 ‘복지’는 시험기간에 야식을 나누어 주거나 ATM 수수료를 없애고, 혹은 축제 때 거대한 미끄럼틀을 만들거나 더 많은 연예인들이 학교 무대에 등장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들의 ‘복지’는 학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제 2기 ‘비권 학생회’의 등장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학생회에 몸담고 있었거나, 혹은 그 언저리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던 사람들은 ‘총학생회의 역할’을 두고 논의를 벌였다.

그러나 이른바 ‘운동권’ 학생회도 ‘복지’를 운운하게 되고, 이에 ‘복지’만으로는 경쟁력을 얻지 못하게 된 ‘비권’ 학생회도 ‘학내 문제’를 언급하게 되면서 사실상 두 학생회의 차이점은 (적어도 공약에 있어서는) 발견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모호한 경계 속에서 드러났던 것은 다수 학생들의 ‘무관심’이었다.

2.

고려대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에서도 연중에 크게 이루어지는 움직임이 있다면 교육투쟁을 들 수 있다. 대체로 4월경에 시작되는 교육투쟁은 수업과 학교생활에 관련된 개선 사항을 학교 당국에 요구하거나 다른 대학과 연대하여 전교생이 모여 등록금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시기이다. 그러나 고려대 민주광장에서 시작되어 본관 앞의 집회로 마무리되곤 하는 등록금투쟁은 최근 몇 년 동안 ‘전교생’ 이나 ‘투쟁’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규모였다. 아무리 많이 쳐도 백 명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는 발언을 듣고 있을 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가 버린다. 아무리 구호를 외치고, 대자보를 붙이고, 소책자를 찍어내도 그것은 그저 매년 의례적으로 있는 일로써 여겨지고 있는 상황이다.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투쟁하여 비싼 등록금을 내리려는 시도를 하기보다 그 비싼 등록금만큼의 이익을 얻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학생들에게 있어 고려대학교는 남들보다 더 좋은 곳에 취업할 수 있게 해주는 ‘스펙’ 획득의 장(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 있었다. 그들의 학생회가 더 이상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3.

그들 스스로는 무관심을 관철하고 있지만, 그 무관심에는 정치적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들은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모임을 만들거나 맑스주의 포럼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쓰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남들보다 우월하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그들이 존재하는 공간의 지향점을 바꾸게 되었다.

2010년 12월경, 고대병원 보건의료노조가 파업을 시작했다. 고대병원은 새 의료기기 등으로 인한 지출을 저임금과 초과노동으로 메우고 있었다. 노조는 인력 충원과 비정규직 및 저임금 문제를 요구했다. 조합원들은 캠퍼스를 마주보고 있는 고대병원에서부터 캠퍼스 안으로 들어와 현실을 알리고 고려대 학생들의 지지를 부탁하는 집회를 종종 열었다. 거기에 대해, 학생들은 기말고사 기간에 강의실 안까지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의 비합리성에 짜증을 내는 것으로 답했다. 학내의 몇몇 정치단체만이 지지의 목소리를 내었을 뿐이었다.

‘어떤 정치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득실인가?’가 된 캠퍼스에서, 무관심은 곧 그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보수성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지금, 학생들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추적해보면 이러한 경향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매년 봄이면 동아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신입생들로 붐비던 학생회관은 늙은 복학생들이 치는 기타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 적막강산 그 자체다.

대신 건물마다 있는 스터디룸은 매 시간마다 예약이 꽉꽉 들어차 있다. 그들은 교내 경력개발센터에서 매일같이 보내오는 취업설명회 문자메시지에 따라 저녁 일정을 짠다. 그들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카페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삼성이나 엘지와 같은 유수의 대기업을 향한 ‘취업스터디’에 참석하고, 일찌감치 두꺼운 책을 끼고 도서관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행정고시 합격을 노리는 쪽을 택한다. 대부분의 동아리는 신입생을 받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지만, 모의투자 등 금융 관련 동아리는 시험과 면접을 통해 부원을 ‘선별’해야 할 정도다. 고대문화나 고대신문 같은 학내언론은 평소에 취업스터디나 고시준비를 서두르지 못하다가 뒤늦게 ‘언론인’을 떠올린 고학번들이 ‘실무경험’을 얻기 위해 부랴부랴 지원서를 들이미는 공간이 되고 있다.

4.

취업 준비에 쉴 틈 없는 대학생활 속에서, 학생들은 인터넷을 통해 겨우 남과 이야기할 시간을 마련한다. 그러다 보니 각 대학마다 커뮤니티가 인기를 끈다. 고려대의 ‘고파스’도 고려대생이라면 대부분 하루 한두 시간 정도는 머무는 결코 작지 않는 곳이다. 교문에서 나누어주는 학생회 선거 유인물을 못 본 척 지나가고 간혹 열리는 학내 집회를 도서관 가는 길에 흘긋 쳐다보는 대부분의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가입자를 선별한 것도, 누가 선동한 것도 아닐 텐데 신기하게도 고파스의 목소리는 비슷하다. 그들은 하루 식비를 80원 받는 청소노동자들은 많은 임금을 받을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당연한 대우를 받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장학금이나 교환학생, 어떤 대기업 신입사원의 연봉을 신경 써야 하는 그들의 합리적인 사고 속에서는 그러한 논리 전개는 당연하다. 그들은 연애 이야기에, 맛집 소개글에, 심심풀이 동영상 자료에 많은 댓글을 단다.

청년 실업이니, 88만원 세대니 하는 흉흉한 단어들이 일상처럼 되어버린 학생들에게 정치적 경향성은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본인의 스펙에 도움이 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이다. 대기업 취업원서에 쓸 수 있는 것이라면 활동의 내용 자체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말이다.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나서다가도 그들의 빈곤과 기아를 악화시키고 있는 다국적기업의 면접 스터디에 참석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백령도 안보 캠프’에 관심을 보이다가도 언론사 시험을 위한 토론 모임에서 이른바 ‘진보 언론’의 논조에 동조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이 ‘스펙’을 얻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되어버린 대학에서, 정치적 논의는 고사 직전에 이르고 있다.

요컨대 대학은 무수히 많은 정치적 논의들이 치열하게 오고가고, 그렇게 치열한 논의 속에서 내려진 결론을 누구보다도 먼저 실천에 옮기고, 그리하여 사회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던 과거의 모습을 상당부분 상실했다. 대학이라는 공간은 철저히 ‘더 나은 스펙을 위하여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구입한’ 소비자들이 모인 곳이다. 그곳에서 소비자들은 서비스의 목적을 제외한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서비스의 목적을 제외한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은, 반대로 서비스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적극 받아들인다는 이야기가 된다. 바로 지금 누군가가 남보다 더 좋은 회사로의 취직, 그것을 위한 ‘스펙 획득’을 대가로 제시하면서 손을 내밀면, 오늘의 대학생들은 지체 없이 그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있다. 그 손이 누구의 것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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