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대학 혹은 당대의 비겁함

- 엄기호(교육공동체 '벗' 조합원)

이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당혹감을 느꼈다. 아마도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는 제목의 책을 쓰고, 대학생들과 함께 강의하고 공부를 하기 때문에 이 글을 부탁했을 터인데 문득 내가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날 때 한 번도 그들을 대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대안학교나 청년캠프에서 만난 청(소)년들을 대할 때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다른 말로 하면 대학교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날 때 그들이 ‘대학생’이니까 非대학생들과 다른 어떤 구분되는 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경험과 언어에서 그렇다. 내가 학생들과 함께 하는 강의실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가 경험과 그 경험을 읽는 언어에 대한 성찰이다. 대학생이라는 정체성 혹은 사회적 위치에서 대학생이 아닌 사람들과 별다른 경험이나 언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돌이켜 보면 90년대 초반까지 대학이라는 정체성은 사회적 위치에서 단호한 단절의 이름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문화적 향유였다. 고등학생들이 빠돌이/빠순이가 된다면 그건 청소년의 하위문화로서 긍정되거나 비난되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만약 여전히 대중가수를 쫓아다닌다고 하면 그것은 덜 떨어진 짓거리로 비난받았다. 대학생은 김광석이나 안치환 혹은 홍대 앞의 인디 밴드들과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대학교 총학생회의 선거에서 축제 때 어떤 아이돌을 부를 것인가하는 것이 공약이 되기도 한다. 대학마다 수 천만원씩 주고 잘 나가는 대중 엔터테이너들을 부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리기도 한다. 대학생들과 자신들이 열정을 바친 가장 소중한 경험을 말해보라고 하면 여학생들은 다수가 팬클럽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촛불시위로 몸살을 알던 2008년의 봄, 시위현장에는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지만 아이돌이 나오는 축제에는 아침부터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긴 줄이 늘어섰다.

대학생들이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소비자본주의에 찌들었다고 비난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대학과 대학생을 묻는 것이 무슨 의미와 효용성이 있는지를 되묻기 위함이다. 질문을 하고 말을 던지는 것은 단지 무미건조하게 현장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다. 화용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질문과 언어는 이미 그 안에 그 말로 무엇인가를 이루고자하는 ‘의지’가 들었다. 그렇다면 대학과 대학생을 다시 묻는 것은 어떤 ‘의지’를 표현하는 것인지 우리는 되물어 보아야한다. 파악되는/파악되어야하는 것은 질문을 던지는 우리이지 질문되는 그들이 아니다.

지지이건 비판이건 무엇보다 대학생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서 대학과 대학생의 사회성에 대한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여기에는 대학생은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기여를 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들어있다. ‘변화’라는 말보다는 ‘발전’이라는 말을 쓴 것에 좀 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지금 한국 사회에 대해 절망하거나 한숨을 쉬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사회가 정치적으로건 경제적으로건 ‘발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발전’이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되는가에 따라 천지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수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말에는 역사에 대한 공통된 관점이 있다.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해서든 발전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발전에 대해 이전의 세대들은 공유된 자신감을 갖고 있다. 486들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은 자신들이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있고, 58년 개띠들은 자신들의 청춘을 조국 근대화에 바쳤다고 생각하고, 그 이전 세대들은 한국전쟁에서도 살아남고 국체國體를 자신들이 지켰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이들은 현재의 20대들과 비교하여 자기 ‘세대’가 한국의 역사에, 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20대를 보면서 질타할 수 있다. 너희는 도대체 무슨 기여를 하고 있는가? 아무리 봐도 기여하는 바가 없다.

더구나 이 비난이 20대들 중에서도 대학생들에게 집중되는 것은 20들안에서도 대학생들에 대한 더 강한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대학생은 혜택 받는 자들이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대학생은 부모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이다. 부모의 돈으로 학교를 다니고 생활한다. 그런데 그 생활이 사회에 기여하거나 미래 지향적이기는커녕 즉자적이고 소비 지향적이다. 특히 대학생은 4년이라는 시간을 ‘자유’롭게 유예 받은 사람들이다. ‘자유’는 이 사회에서 모두가 가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의 피땀 같은 돈으로 얻은 이 ‘자유’를 미래와 사회를 위해서 보다 가치롭게 사용하지 못하고 허비한다는 점에서 대학생들은 특히 비난의 초점이 된다.

그러나 이런 ‘의지’는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우선 사회를 발전시키거나 퇴행시키는 것은 한 특정 세대의 몫이 아니라 당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몫이다. 과연 한국의 민주주의는 486들이 이루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 시대를 살아간 모두가 같이 한 것이지 그것이 왜 486이라는 당시의 20대들, 혹은 대학생들이 이룬 것인가? 만약 이것을 486들이 한 것이라고 한다면 87년 여름의 노동자 대투쟁도 오로지 공장으로 투신한 ‘학출’들의 덕분이 된다. 이런 식으로 한 세대가 오만하게도 역사를 전유하는 것이 타당한가?

또한 ‘발전’에 대한 공포와 강박은 1997년 IMF와 함께 우리 사회에 도적처럼 찾아온 것이지 이 세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IMF와 더불어 우리는 사회가 발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대단히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 ‘성장과 발전’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어떤’ 발전이냐는 것이었지 역사의 ‘퇴행’이 아니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점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이나 경제발전을 요구하는 사람들이나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확신이었다. 그러나 IMF는 내일이 오늘보다 나빠질 수도 있으며, 그것은 예측되고 통제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우리 모두에게 심어 놓았다. 이 ‘공포’를 돌파하는데 너희가 기여하지 못한다고 질타하는 것은 ‘역사’의 짐을 ‘세대’에 얹는 것에 불과하다.

두 번째로는 ‘자유’의 문제이다. 지금 대학생들이 과연 정말 ‘자유’로운가? 혹 그들이 대학에 들어와 누린다는 그 자유는 ‘술 먹고 망가질 자유’말고는 없지 않는가? 강의하고 있는 한 대학의 익명게시판에서 내 수업에 대해 학생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들었다. 숙제가 많고 빡빡해서 폐강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전 학기에 수업을 들었던 한 친구가 수업을 추천하였다. 그러자 한 학생이 ‘학점은?’이라고 질문을 하였고, 그 친구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답을 달았다. 그 밑에 달린 대답이 이러하다. ‘물론 그 수업을 들으면 머리는 행복해질지 몰라. 그런데 학기가 끝난 다음에 성적을 보고도 계속 행복할 수 있을까? 현실적이 되자고. 친구.’ 여기에 어떤 자유가 있는가?

아마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청춘이란 그런 현실을 뛰어넘어 과감해지는 것이다. 청춘이란 현실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추구하며 과감히 한번쯤은 현실을 무시할 수 있는 용기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대학생들에 대한 비난은 딱 한마디로 정리된다. 비겁하다는 것이다. 청춘의 핵심은 용기인데 도무지 현재의 청춘들, 특히 자유까지 특혜로 받은 대학생들이 용기 혹은 호기를 부리기는커녕 지나치게 현실적이라는 것, 그 말은 곧 그들이 비겁하다는 비판이다. 나는 대학생들에 대한 이야기의 핵심에는 바로 이 ‘용기와 비겁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이 혼돈스러운 불한당의 시대에 누가 용기를 낼 수 있는가?

그런데 용기는 영웅적인 개인이 내는 것인가, 아니면 집단이 뒷받침될 때 낼 수 있는 것인가? 적어도 우리 시대가 꿈꿔야하는 것이 개인 영웅의 출현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용기는 아마도 집단이 받쳐주는 용기, 동지/동료가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용기가 될 것이다. 용기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노래가 ‘사랑과 혁명에 대하여’이다. 가사가 이렇다. ‘진실로 사람을 사랑하고, 가슴속 심장에 붉은 피로, 모든 위장된 진실을 불태우고 내 곁에 선 이들과 함께 서로 부추겨 변화를 일으키는 아.아. 혁명의 길이여.’ 용기는 상호 상승하는 것이지 개인이 초인 같은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초인 같은 용기는 역사에서 극히 예외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전태일 열사처럼. 혹은 당대의 비겁함을 감추기 위해 대중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조작해내거나. ‘아덴만의 여명’처럼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용기란 공동체에서, 공동체를 통하여, 아니면 최소한 ‘아지트’라도 있을 때 일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던져야하는 질문은 대학생이라는 이름이 공동체를 도모하는 이름이 될 수 있는가, 혹은 대학 안에서 아지트를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이다. 대학생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대학은, 혹은 동아리건 학생회건 대학안의 공간이 이런 동지/동료를 만날 수 있는 공동체, 혹은 아지트인지,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어야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내가 볼 때 지금 시대에 대학생을 질문하는 것은 결국 ‘발전’과 ‘용기’에 대한 의지의 우회이다. 그것이 우리 시대에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비켜서서 과거의 언어로 뒤덮어버리는 태도이다. 내가 보기에 당대의 비겁함을 문제를 청춘의 문제로 돌리는 것이 훨씬 더 비겁해 보인다. 이것이 청춘에 대한 질문이 낭자한 당대의 ‘비겁함’이다. 이 비겁함은 우리 모두가 견뎌 내거나 돌파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대학에 대해 던져야하는 질문은 이렇게 실천적으로 바뀌어야한다. 그들과 함께 우리는 어떤 아지트를 도모하고 있는가?

응답 2개

  1. someday말하길

    당대의 비겁함이 청춘의 비겁함으로 책임전가된 것인가.. 뭔가 맞는 말 같은데 실천적으로 감이 안 와요. 과거에는 대학 자체 동력이 강하니까 대학 바깥과 연대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는데 지금은 대학내 운동기반이 와해된 상황입니다. 외부에서 그들과 아지트를 도모하는 방식으로 건강한 대학문화가 살아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2.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EC LEE, 김태중(Kim, Taejoong), 2b0, 파랑곰/Yang Rihye, uhmkiho(엄기호) and others. uhmkiho(엄기호) said: 수유너머의 부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대학의 무능력, 당대의 비겁함'이라는 제목입니다. '발전'과 '용기'라는 덫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http://suyunomo.jinbo.net/?p=6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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