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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책? 미래의 그림!

- 유정아(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성 이시드로 축제일

이른 여름,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도시와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즐거운 축제를 즐기고 있다. 엷고 밝은 색조로 묘사된 먼 곳은 마드리드의 거리이고, 그 앞을 흐르는 것은 만사나레스 강이다. 당시 유행했던 프랑스풍 의상을 차려입은 젊은이는 숙녀에게 손을 뻗어 이시드로 성수를 받으며, 비스듬히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다. 흰 양산과 레이스가 눈부시고, 부드러운 햇살이 도시의 성과 강의 물결을 비추는 이 포근한 오후는 5월 15일, 마드리드의 수호성인인 이시드로 축제일이다.

Fig 1. 고야, <성 이시드로 목장>, 1788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는 오늘날 스페인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그에 관한 기본 소개글은 인터넷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자. 고야는 스페인 궁정화가의 전통을 이어 카를로스 3세, 카를로스 4세, 페르난도 7세를 위해 일한 고전주의의 마지막 대가이자, 전통적인 회화 형식을 차용하되 주제로부터 거리를 두는 새로운 시선을 포착한 최초의 근대적 예술가였다. 그는 82년의 긴 생애 동안 종교화, 초상화, 장르화뿐 아니라 당대의 역사, 개인적인 환상이라는 다양한 주제를 프레스코, 유화, 동판화, 석판화 등의 매체로 다루어 회화 7백여 점, 판화 3백여 점, 드로잉 9백여 점을 남겼다. 작품의 양식은 로코코에서 낭만주의까지 변화의 폭이 넓다.

고야는 1746년에 스페인 동북부 아라곤 지방의 푸엔데토도스(Fuendetodos)라는 시골 마을에서 도금을 하는 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그림수업을 받던 고야는 1763년과 1766년에 왕립 아카데미의 역사화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아카데미 입성을 시도했으나 두 번 다 실패했다. 대신 산타 바바라의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밑그림 그리는 일을 하면서 1781년 운좋게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교회당의 부제단화 제작을 맡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명성은 점점 높아져갔으며 후원과 주문이 밀려들었다. 1789년 궁정화가, 1795년에는 아카데미 회화부장, 1799년 수석 궁정 화가가 되었으니, 이쯤 되면 화가로서 태어나 누릴 수 있는 명성은 모두 누려본 셈이다. 그러나 어디 인생 길이 그렇게 만만하던가! 고야에게도, 그리고 그림 속에서 함께 즐거운 오후를 나누던 민중들에게도 역사의 칼바람은 가혹하게 불어닥쳤다.

아래 그림을 살펴보자. 역시 산 이시드로를 기념하는 5월 15일 축제일이다. 그러나 산뜻한 오후 햇살이 내리쬐던 축제는 35년이라는 시간을 지나는 동안 악몽으로 바뀌었다.

Fig 2. 고야, <산 이시드로 순례여행>, 1821-1823

검은색과 갈색의 어두운 색조 속에서 이상하게 생긴 인간 무리들이 물결을 이루어 밀려들고 있다. 선두에는 기타를 치면서 순례가를 부르는 백안의 맹인, 그 다음에는 매처럼 험상 궂은 얼굴로 지팡이를 움켜쥔 노인. 바보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청년. 기묘한 얼굴로 조용히 이 곳을 응시하고 있는 자. 순례가를 같이 부른다기보다는 분노를 발산하는 것 같은 중년의 남자들이 줄을 잇는다. 옆쪽의 여자들은 상복 같은 검은 옷차림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들은 오직 자기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듯이 앞다투어 구원을 갈망한다.

첫 번째 작품과 두 번째 작품이 그려진 이 35년이라는 시간동안,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그렇지 않아도 어리석은 군주와 세속적 욕망들로 가득찬 교회 탓에 당시 서유럽에서 벌어졌던 계몽과 시민혁명의 세례를 받기 힘들었던 스페인은 프랑스군의 침입을 받아 이에 대항하는 전쟁을 겪어야 했고, 가까스로 자유주의 헌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구세력인 페르난도 7세와 종교재판소에 밀려 정치적 자유를 잃어버렸다. 민중들의 삶은 숱한 전쟁과 폭압적인 횡포로 피폐해져갔고, 고야 자신의 삶을 보아도, 거의 스무명에 달하는 자식들을 잃고 그 자신은 과로로 귀머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말년에는 화가 자신이 취한 자유주의적 입장 때문에 심각한 정치적 위기감에 봉착했다.

기이한 미술관 – ‘귀머거리의 집’

위에서 보았던 <산 이시드로 순례여행>이라는 작품은 《검은 그림》연작에 포함되어 있다. 이 《검은 그림》연작은 고야가 말년에 구입한 집에 그려진 벽화였는데, 그가 스페인을 떠나기 전에 구입한 집, 일명 ‘귀머거리의 집’ 벽에 그려진 그림이다. 만사나레스 강과 함께 펼쳐져있는 마드리드 시내가 보이는 전망을 마음에 담고 있었는지 화가는 73세 때인 1819년 이 집을 구입했다. 정치적인 위기감에 몰려 고야는 4년 후에 이 집을 17세인 손자에게 양도하고 물러났지만, 이 집의 1층 식당과 2층 살롱의 벽면에는 열 네 점의 놀라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현재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미술관인 프라도에 전시되어 있다.

귀도 들리지 않는 적막함 속, 궁정화가의 후광도 벗어던지고, 주문자도 후원자도 부재한 상황 속에서 함께 작업할 조수도 없이 노년의 화가 고야는 혼자 묵묵히 남아 그 거실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는 고야 생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그림들로, 벽화가 처음 완성되었을 때의 상태가 정확히 어떠했는지, 누가 그 벽화들을 보았는지 알 수 없다.

Fig 3. 고야가 머물렀던 ‘귀머거리의 집’의 그림 배치도

그림들은 1, 2층으로 나뉘어져 창과 창 사이의 공간을 적절하게 메우고 있는데, 이들은 하나의 주제를 따르지 않으며, 연속된 내러티브 구조를 가진 것도 아니다. 위에서 보았던 <산 이시드로 순례여행>처럼 광기에 사로잡힌 사악한 군중의 모습이 담겨있거나, 무릎이 진흙에 파묻혀 있음에도 서로를 막대기로 공격하고 있는 어리석은 두 인물을 보여주기도 한다.


Fig 4-5. ‘귀머거리집’ 세부 배치도

가장 잔혹하다고 평가되는 <사투르누스>는 화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연상케 하는 작품으로, 자신의 아이들이 계속 죽어가는 가운데, 자신만이 삶을 연장해가는 자책감조차 느껴지며 이는 비애섞인 늙은 괴물의 표정으로 묘사되었다. 이 《검은 그림》연작은 종교, 신화, 어리석은 위정자와 민중의 이미지 등 화가가 평생 다루었던 작품들의 핵심을 모아놓은 다이제스트 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Fig 6. 고야, <자식을 집어 삼키는 사트루누스>, 1820-1823

Fig 7. 고야, <몽둥이를 들고 싸우고 있는 남자들>, 1820- 1823

Fig 8. 고야, <스프를 먹고 있는 두 노인>, 1820-1823

Fig 9. 고야, <개>, 1820-1823

(나는 이 열 네 점의 검은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브레히트의 시가 떠오른다. 특히 이 <개>라는 작품이 더욱 그러한데, 처음 보았을 때부터 어떤 씁쓸하고 비릿한 뒷맛을 느꼈다. 고야는 ‘신께 바치는 찬가’를 믿었을까? 여전히 우리는 신에게 구원을 갈망하지 않는가? 몸은 모래 속에 파묻혀도 고개만은 꼿꼿이 들어 하늘을 향한 채로? 혹시 신이 우리에게 은총 대신 검은 회오리 바람을 준비해 두고 있다면…그렇다면 그 때는 어찌할텐가!)

신께 바치는 찬가

1.
어둔 골짜기 깊은 곳에 굶주린 자들이 죽어 갑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빵을 내보여 주시지만, 죽게 내버려 둡니다.
당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영원한 옥좌에 앉아 주위를
환히 비추고 계시지만 당신의 영원한 계획에는 몸서리가 쳐집니다.

2.
젊은이, 그리고 삶을 향유하는 자들은 죽게 내버려 두셨지만
죽으려는 자들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썩어 문드러진 많은 사람들은
당신을 믿고 확신하며 죽어 갔습니다.

3.
가난한 자들의 동경이 당신이 살고 계신 천상보다 아름답기에
많은 세월 그들을 가난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당신이 빛으로 오시기 전에 그들이 죽었다니 유감입니다.
그들은 축복 속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곧 썩어 버렸습니다.

4.
당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허나 어찌 그런 거짓이 통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당신 때문에 살아가고 또 죽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어떻게 반박할 수 있는지 말해 주십시오!

미래의 관람자들을 위해

이 검은 그림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훗타 요시에의 평가를 따라, ‘마치 고대 이집트 묘 속의 벽화처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 그린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일본 학자 사카이 다케시는 흥미로운 견해를 밝혔다. 이 그림들은 고야가 정치적인 위기감 때문에 ‘귀머거리의 집’에서 나오기로 결심했을 때, 즉 자신이 거주할 공간이 아니라고 결정했을 때 그려졌을 것이라고 말이다. 즉, 이 연작은 자신을 위한 사적인 그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의 ‘인간’은 엄밀한 의미에서 고야와 동시대인이라기 보다는 어지럽게 변하는 당시의 정세 후에 도래하게 될 보다 열린사회의 인간들이 될 것이라고.

‘만년의 카프카가 세 장편소설 원고를 스스로 태우지 않고, 친구인 막스 브로트에게 태워달라고 건네주었을 때, 그의 마음 속에는 작품의 공개에 대한 갈망이 잠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고야가 ‘귀머거리의 집’을 손자에게 양도했을 때, 그는 《검은 그림》을 버린 것이 아니며 손자에게 준 것도 아니었다. 가까운 장래의 불특정한 감상자들에게 공개하고 싶은 바람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흥미롭게도 이 집을 구입한 해인 1819년 프라도가 왕립미술관으로 개관되었다. 유럽에서의 미술관 탄생은 계몽 사상의 흐름 속에서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계몽 사상의 본류인 프랑스에서는 대혁명 과정에서 국왕 루이 16세가 처형되었던 1793년에 루브르 미술관이 개설되었다. 고전주의 미학을 민중에게 침투시켜 이성을 육성하고, 뛰어난 화가들을 키워내 화단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위로부터의 교육적 배려였다. 프라도 미술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런 계몽주의 흐름 속에서,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던 고야는 동시에 계몽주의를 벗어나는 에스파냐 민중의 감성에 바탕을 둔 회화, 시대에 대한 공포와 끔찍함을 담은 그림을 전시했던 독특한 사립 미술관을 지었던 셈이다. 고야가 원했던 것은, 계몽주의의 ‘교육’의 전당이 아니라 지고한 교류의 장이었으리라. 우리가 다케시의 말을 믿어본다면, 고야가 어둠 속에 홀로 남아 묵묵히 바친 찬가는 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도래할 관람자들의 몫이었던 셈이다.

응답 1개

  1. 김성동말하길

    너무 좋은 글을 포스팅해주셔서 인사를 남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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