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만추> 현빈씨, 진정 여심 후리기 달인이십니다!

- 황진미

<시크릿 가든>으로 최고의 핫한 남자에 등극한 현빈이 <색,계>의 탕 웨이와 멜로영화를 찍었다네. 그것도 <만추>라는 명작의 리메이크를. 감독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가족의 탄생>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김태용 이라니, 심장이 쫄깃해질 소식 아닌가.

<만추>는 1966년 이만희 감독의 <만추>(문정숙, 신성일)이래, 여러 번 리메이크 됐다. 1972년 일본에서 사이토 고이치 감독의 <약속>이 개봉되었고, 1975년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김지미, 이정길)과 1981년 김수용 감독의 <만추>(김혜자, 정동환 주연)가 만들어졌다. 일본판에서 일본의 귀휴제도 관행 상 원작에 없던 여교도관이 등장하였는데, 이후 김기영 감독판과 김수용 감독판에서도 여교도관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 <만추>에는 여교도관이 안 나온다. 또 남자이름도 이만희 감독판과 같은 ‘훈’으로, 이번 영화의 원전이 이만희 감독판임을 분명히 한다.

이만희 감독의 <만추>는 크게 흥행하였고, 당시 문화계에 일대 충격이었다. 문학작품을 각색한 문예영화와, 통속 신파극으로 양분되어 있던 당시 한국멜로영화계에서, <만추>는 오리지널 시나리오임에도 고도의 문학성을 갖추었고, 절제된 대사와 이미지, 음향 등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영화예술의 진면목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만희 감독의 <만추>는 오래전 해외영화제 출품과정에서 원본네거필름이 분실되어 볼 수 없는 영화이다. 시나리오와 몇 장의 스틸 컷, 영화를 보았던 이가 쓴 책<영화감독 이만희>와 구술 자료집 <만추, 이만희>등을 통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만희 감독이 <7인의 여포로>로 반공법위반혐의를 받아 짧은 옥살이를 하는 동안 알게 된 모범수 귀휴제도는 ‘여죄수의 귀휴와 짧은 사랑’이라는 불세출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 모티브가 김기영 감독판에서는 에로티시즘과 괴팍한 무의식이 흘러넘치는 괴작으로 변주되고, 문예영화에 능했던 김수용 감독판에서는 차분하지만 활력이 잦아든 감상적인 작품으로 변주되었다.

김태용 감독은 모던한 감각으로 이 모티브를 미국으로 옮겨놓는다. 기차와 인천갯벌과 창경원이 배경이던 원작 장면들은 고속버스와 시애틀 시내를 배경으로 싹 바뀌었다. 더불어 둘이 처음 말을 걸고 감정을 교류하고 데이트를 하는 에피소드들도 몽땅 바뀌었으며, 매 리메이크작마다 화제가 되곤 했던 정사장면 또한 뜨거운 키스로 생략되어 있다. 인물도 중국계미국여성과 한인남성으로 바뀌어서, 이들은 영어로 대화하지만 서로의 모국어를 모른다. 원작에선 인물에 대한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지만, 이번 영화에선 구체적인 묘사는 물론이고, 주변 인물들까지 꽤 비중 있게 등장한다. 가령 원작에서 그녀의 살인사건은 불문에 부쳐지지만, 이번 영화는 살인사건에서 시작되며, 원작의 성묘가 장례식으로 바뀌면서, 남자는 여자의 가족과 살인사건의 진상을 더 알게 해주는 인물과 맞닥뜨린다. 영화는 이처럼 부수적인 설명이 많아졌음에도 두 사람 사이의 감정적 긴장이 늘어지는 우를 범하진 않는다. 영화는 대체로 깔끔하며, 세련된 미장센과 함축적인 대사가 감독의 예술성을 재확인시킨다.

여심을 무너뜨리는 그만의 필살기는?

이번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져야 할 차이는 역시 남자주인공의 캐릭터이다. 원작의 신성일은 위조지폐 범으로 도주한 공범을 만나기 위해 열차에 오르며, 처음부터 경찰에 쫓기는 자이다. 그는 낙천적이며 좀 건들거리는 사내이다. 그러나 현빈은 ‘직업남성(남성을 직업으로 삼는 자)’으로, 이를테면 ‘제비’이다. ‘옥자누님’의 남편에게 쫓기는 중이며, 처음 본 탕 웨이에게 작업(혹은 직업)의 일환으로 접근한다. 그는 친절하며 귀여운 남자다. 물론 그는 잘 생겼다. 본인도 곧잘 나르시시즘에 빠진다. 거울을 보며 제임스 딘 같은 머리를 이리저리 빗어 넘기는 모습은 ‘쩐다’. 그의 길고 미려한 몸은 서구에서 백안시되어왔던 동양남자의 섹슈얼리티를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그의 최대무기가 외모에 있는 건 아니다. 여자와 처음 방에 들었을 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다가 여자에 의해 밀쳐진다. (<육체의 약속>에 등장했던 모든 남자들은 이때 여자를 폭행한다.) 그는 잠깐 자존심에 금간 표정을 짓지만, 곧 그녀를 배려한다. “괜찮아요, 내 잘못인걸요…누군가와 같이 있는 거 좋잖아요. Let’s go!” 그는 기지를 발휘해 여자가 이름을 자연스럽게 말하게 하고, ‘다른 남녀에게 더빙하기’ 기법으로 여자의 말문을 틔운다. 이는 일종의 사이코 드라마적 효과를 발휘하여 그녀는 피나 바우쉬의 춤을 보는듯한 마법적 환상에 빠진다. 그녀는 자신이 죄수라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중국어로 자신의 사연을 말한다. 그는 중국어를 모른다고 밝히면서도, 중국어 추임새로 화답해주며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는다. 말의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말하고 듣는 ‘행위’가 중요하다. 장례식에 꽃을 들고 찾아와, 눈치 상 그녀와 감정이 연루된 남자와 시비를 붙음으로써, 그녀의 억눌린 감정을 분출시킨다. 우스꽝스럽게도 그는 소란의 이유를 포크 때문이라 말한다. 자신이 우습게 될지언정 그녀의 체면을 중시하는 것이다. 여자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왜 포크를…”하며 옛 애인을 책망하며 통곡한다. ‘기표’는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그녀가 옛 애인에게 호곡하는 ‘행위’이다. 그는 그녀의 막힌 살을 풀어주었다. 어떤 치료자나 영매가 이 정도 서비스를 해줄 수 있으랴. 그러니 옥자누님은 자발적으로 큰돈을 마련해 찾아오고, 남편은 ‘내 아내가 누구를 사랑했는지 보고 싶었다’며 찾아온 것이다. 그는 신변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탕 웨이와 긴 키스를 나누며 다시 만나자 기약하며 잠든 그녀에게 외투와 시계를 남기고 살포시 떠난다. 그는 다정하게 상대를 배려한다. “착한 남자를 원하면 착한 남자가, 나쁜 남자를 원하면 나쁜 남자가 되는” 그는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는 유연성을 지녔다. 과연 옥자남편이 그의 진정한 필살기가 무엇인지 보았을까? 많은 남자들이 오해하듯 여심을 후리는 진기명기는 외모나 섹스기술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태도이다.

영화는 기대이상이다. 영화 속 현빈이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은 불안한 여자의 내면을 짚어주는 듯한 마력을 발산한다. (다들 현빈의 이 눈빛에 쓰러지는 것 아니겠는가?) 탕 웨이의 새치름한 얼굴은 화면을 꽉 채우면서 관객의 몸을 움찔움찔 달게 한다. 게다가 그녀의 예상 밖의 중저음은 기이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둘의 화학작용도 상당해서, 참 기막히게 잘 어울린다.

이번 영화의 최대 이슈는 아마도 현빈의 월드스타로서의 가능성일 것이다. 현빈은 각도나 분장에 따라 매우 달라 보이는 여백 있는 ‘탈’을 지녔다. (<시크릿 가든>의 단정한 슈트발의 재벌 3세,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의 편안한 셔츠 차림에 수염 자국 있고 안경 쓴 쉬크한 조니 뎁 풍의 예술가 룩과는 또 얼마나 다른 느낌인지!). 또한 글로벌한 ‘기럭지’와 섬세한 ‘태’를 지녔다. 게다가 고등학생 때부터 연극을 한데다 <나는 행복합니다> 같은 저예산영화에 나올 만큼 연기욕심이 남다르다. ‘군대 가기 직전에, 캐릭터로 먹어줄 수밖에 없는 재벌 3세 드라마 찍고, 그것도 모자라 떠오르는 중화권 스타 탕 웨이랑 멜로를 찍다니, 짜식, 운빨 장난이 아닌데?’ 하며, 시샘을 부릴 넘들에게, ‘우리 빈이 오빠의 운은 운이 아니거든요~’라고 말해주고 싶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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