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다보스 포럼이 파는 `명품’의 환상

- 맹찬형(연합뉴스 제네바 특파원)

매년 1월 말이면 스위스 동부의 스키 휴양지 다보스에서는 세계경제포럼(WEF)이 주최하는 연례회의가 열린다. 올해 41번째를 맞은 WEF 연례포럼은 통상 `다보스 포럼’으로 더 잘 알려져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일행과 우연히 거리에서 조우해 함께 길을 걷고, 빌 게이츠가 내 책상 옆을 스쳐 지나가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악수하고, CNN의 유명 앵커 리처드 퀘스트와 샐러드바에서 같은 줄에 서고, 지금은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특별고문이 된 주민(朱民) 전 중국 인민은행 부총재와 인사를 나눈 일은 분명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TV 화면 밖에서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인물들을 다보스의 회의장에선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다.

올해 다보스를 찾은 각국 정상들만 35명.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 등이 2011년 회의의 주빈이었다. 눈이 잦은 다보스에선 누구나, 심지어 각국 정상급 인사들조차도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양복에 등산화나 부츠를 신고 거리를 걷는다. 기자회견차 미디어센터에 들른 빌 게이츠도 등산화 차림이었다. 오로지 깎아지른 산과 사방에 하얀 눈 밖에 없는 스위스의 산골에 모여 의전을 크게 따지지 않고 편안한 태도로 세계경제의 미래를 전망해본다는 포럼에는 등산화와 캐주얼한 복장이 제 격이긴 하다. 올해 다보스 포럼에 참가한 사람은 무려 2천500명이나 됐다. 각국 중앙은행장들과 세계 유수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 학자와 언론인들, 시민사회단체 대표와 문화계 인사들이 `여러 참가자 중의 한 명’이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회의장 좌석을 채웠다. 인터내셔널 헤럴드트리뷴에 따르면 세계적 명사들이 모인 다보스 포럼 행사장에 들어가려면 최소 비용만 7만1천 달러(약 8천만 원)이 든다. 회원 등록비(5만2천 달러)와 포럼참가비(1만9천 달러)를 합한 금액이다. 이 많은 돈을 내고도 들어갈 수 있는 회의는 매우 제한적이다. `산업회원’들에게만 열려있는 프라이빗 세션에 들어가려면 15만6천 달러(1억7천500만 원)이 든다. 거기에 5명의 수행원을 대동할 수 있는 `전략적 파트너’ 등급이 되려면 52만7천 달러(5억9천만 원)을 내야 한다. 아무나 받아주지도 않아서 세계 250대 기업은 돼야 한다. 한국에선 SK그룹만 가입돼있다. 숙박비는 육두문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비싸다. 나는 다보스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클로스터에 있는 허름한 호텔에서, 그것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한국에서 출장온 생면부지의 공무원과 방을 나눠 썼는데도 하룻밤에 300 스위스프랑(35만 원)을 냈다. 생 갈렌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다보스 포럼 유치로 인구 1만 명 남짓한 작은 마을에서 매년 벌어들이는 돈은 5천500만 스위스프랑(640억 원)이라고 한다. 호흡기 환자들의 요양소였던 다보스는 교통도 불편하기 그지 없다. 취리히에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꼬불꼬불한 산길을 위태롭게 올라가야 한다. 기차도 30~40분에 한 대씩 다닌다. 저명인사들이 오는 행사인 만큼 보안검색도 까다로워서 행사장에 들어갈 때마다 국제공항과 똑같은 검색대를 매번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도 기를 쓰고 다보스 포럼에 참가하려는 사람은 많다. 신문과 방송에서만 보던 인사들과 한 자리에 앉아 세계경제의 방향을 결정하는 대화에 참여했다는 `환상’이 첫번째 이유다. 행사에 참가했다는 것만으로도 명예로 생각하게 만드는 `명품 마케팅’이 다보스 포럼이 성공을 구가한 배경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올해 73세로 독일계 유대인인 클라우스 슈밥 WEF 회장은 공학과 경제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고,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도 공부했다. 제네바 대학의 교수도 역임했지만 석학 반열에 드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네트워킹 능력과 아이디어는 탁월했다. 1971년 유럽경영포럼(EMF)로 시작한 다보스 포럼을 지금의 수준으로 키워내는 데는 슈밥 회장 개인의 수완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과 에드워드 히스 전 영국총리 등이 많은 도움을 줬다고 WEF가 4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책자는 밝히고 있다. 저명인사 A의 참석 약속을 받아낸 뒤 B에게 `A와 함께 나란히 토론하는 자리에 참석하겠느냐’고 해서 B의 참석을 이끌어내고, 다시 C와 D, E, F 등으로 범위를 넓히는 방식이다. 지금은 더이상 그럴 필요조차 없다.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 두번째 이유는 다보스에서 한 발언들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매체들을 통해 빠르고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BBC와 CNN, 폭스뉴스, MSNBC, 중국 CC TV, 알 자지라 등 온갖 매체들이 행사장에 아랍의 대상을 연상시키는 천막을 치고 실시간으로 방송을 내보낸다. 물론 각국을 대표하는 통신사와 신문들도 거의 다 미디어센터에 진을 친다. 다보스 포럼의 성공에는 언론매체가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인지 기자들에 대한 지원은 괜찮은 편이다. 한국인인 내 입맛에는 별로지만, 매일 점심으로 다양한 샐러드와 빵이 공짜로 제공되고, 음료수는 마음껏 마실 수 있다. 좀 더 발품을 팔면 더 나은 뷔페를 무료로 먹을 수도 있고, 첫 날과 마지막 날에는 언론인들을 위한 파티도 열린다고 하는데 취재 일정 때문에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

세번째 이유는 다보스 포럼이 기업들에게 매우 효율적인 로비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기업의 CEO들은 정상 경로를 통할 경우에는 만나기 힘든 각국 정상들과 장관들, 정책 입안자들을 비교적 쉽게 접촉할 수 있다. 대략 반경 2㎞ 안에 회의장과 주요 호텔들이 다 몰려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동에 진출하려는 중국의 기업인이 아랍에서 온 장관이나 왕자들을 호텔 로비나 회의장 주변 미팅룸에서 자연스럽게 만나 대화하며 상대방의 의사를 타진하고 협조를 구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기업인들은 적게는 1억6천 만원, 많게는 6억 원에 가까운 돈을 내고 회원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기업의 입장에서 효율성을 따져보면 행사 참가비는 결코 많은 비용이 아닐 수 있다. 한때 신자유주의 이념의 본산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다보스 포럼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하지만, 서서히 약화돼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집행력을 가진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올해 포럼의 주제는 `새로운 현실의 공통규범(Shared Norms for the New Reality)’이었다. 5일 동안 열린 대화에서는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와 브라질을 필두로 한 남미로 세계 경제와 정치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는 게 `새로운 현실’이라는 점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걸 굳이 다보스까지 와서 확인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포럼에 참가한 연사들은 `차이나’라는 말을 내내 입에 달고 살았지만, 정작 중국에서는 천더밍(陳德銘) 상무부장만 달랑 참석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10년 간의 중국 경제의 변화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설명하고 갔다. 천더밍은 `새로운 현실’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서방 선진국들이 `힘의 이동’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호들갑을 떨면서 신흥경제국들이 성장에 걸맞게 책임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결국은 더 많은 시장 개방과 금융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압력’의 다른 표현임을 중국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결국 포럼이 끝난 뒤 예년과 마찬가지로 `성과없는 말잔치’, `그들만의 파티’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다보스 옆마을 클로스터의 아침 거리풍경. 고층건물이라곤 없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자신이 다보스에 가지 않는 이유를 간결하게 설명했다.

“내가 왜 다보스에 안 가느냐고? 기본적으로 거기에는 내게 도움되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다보스에 모인 `매우 진지한 사람들(VSPs:Very Serious People)’은 일반적으로 해당 주제를 연구하거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아는 게 없거나 종종 더 모르는 게 많다는 게 진실이다.”

개인적으로 그나마 다보스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두가지다. 첫째는 사람들의 지식과 생각을 한 곳에 모으면, 비록 `말의 성찬‘에 불과할지라도, 무형의 자산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슈밥 회장의 아이디어다. 둘째는 40년 넘게 대규모 행사를 치르면서 대형 신축건물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진작 건설자본이 끼어들어서 30~40층 짜리 특급호텔들을 즐비하게 지어냈을 것이다. 고층건물에 가로막힌 다보스는 더이상 다보스가 아니다. 슈밥 회장은 사람들이 다보스에서 뭘 보고 싶어하는지, 명품을 만들어내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것 같다.

2011년 다보스포럼이 끝난 지 정확히 1주일 후 제11회 세계사회포럼(WSF)이 2월 6일부터 엿새 동안 세네갈 다카르에서 열렸다. 다보스의 대안 모임을 자처하는 세계사회포럼에 참석한 국가 정상급 인사로는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전 대통령과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등 2명 뿐이었다. 하지만, 마르틴 오브리 프랑스 사회당 대표를 비롯한 진보진영의 주요 정치인들과 사회단체 활동가, 노조 지도자 등 공식적으로만 5만여 명이 참석해 아랍 세계의 민주화 봉기와 사회, 식량, 지정학적 위기가 얽힌 자본주의 시스템의 위기를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룰라 전 대통령은 식량 주권 확보를 위한 아프리카의 녹색혁명을 역설했고, 시민.사회단체들은 다국적 기업들의 세금 도피에 이용되는 조세 피난처 반대 캠페인을 펼치기로 결의했다. 참석자들은 자비를 들여 항공권을 마련하거나 소속단체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아준 돈으로 포럼에 참석했다고 한다. 아직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다보스의 100분의 1도 안될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의 승자들이 모인 다보스포럼과 세계사회포럼을 나란히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주기적인 금융.경제 위기로 지구촌의 더 많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가난해지고 있는 요즘, 다보스에서 나온 CEO들의 변명 뿐만 아니라 다카르에서 제기된 문제의식도 경청해야 위기 예방이 가능하지 않을까?

응답 3개

  1. 이월애말하길

    신문에 나오지 않는 취재 뒷얘기를 보는 기분. 와우. 신기해요@.@

  2. 말하길

    와, 다보스 포럼이 이런 거였군요. 참가하기도 어렵지만 그 정체를 알기도 어려운 법인데, 저희는 한 푼도 안 들이고 (샘의 우정으로) 다보스 포험의 실체를 간단히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지식과 생각과 사람을 모우면 무형의 자산이 된다는 말이 참 인상적입니다. 다보스만 그런 게 아니라 대안적 세계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마찬가지겠죠. 언제 세계사회포럼 이야기도 자세히 들려주세요. 암튼, 새로운 ‘명품’ 잘 소개 받았습니다.

  3. 열루말하길

    위클리를 통해 귀한 글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 반갑습니다. 해외통신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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