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무한독전

사랑을 분석하고 나면?

- 므니

얼마 전부터 신비주의 책에 입문하게 됐다. 이런 책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시공간을 넘나드는 퐝타스틱한 내용에, 새로운 진실들. 읽으면서 팡팡 날리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내게 요즘 어떤책을 읽는지 물어오면 답하기 어려웠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에게 신비주의 책들은 황당무계하고 의심스러울 텐데…… 그러면서도 이렇게 ‘쎈’ 책들을 읽고 있으니, 웬만한 책들은 인상에 안 남는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현실에 닿아있으면서도, 신비주의 책들이 말하는 사랑도 담고 있는 책을.

[아직도 가야할 길]. 친구가 자기 식구들과 강독한 책이라며 알려줬다. 부모님하고 동생들하고 함께 읽었다니. 멋지다, 감탄하고는 어떤 책인지 궁금해져서 찾아봤다. 한 정신과의사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신경증이 왜 생기는지 고민하고, 인간에 대해 성찰한 이야기다.

서양의학의 치료는 ‘문제’가 나타난 곳을 없앤다. 암세포가 생기면 그 부위를 때어내 버리고, 아무 문제없는 맹장까지 나중에 문제 생길 수 있다며 덤으로 때어내기도 한다. 간질을 치료하기 위해, 아니 ‘없애기’ 위해서 오른 뇌와 왼 뇌 사이 교량을 잘라버렸던 과거는 문제없애기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그런 의학세계에서 자라고 배우고 형성된 사람이다. 뇌는 확 때어버릴 수가 없는데. 신경증과 여러 정신병리들은 어떻게 대처할까? 그는 ‘과학적’인 것에 매달려 증명할 수 없는 세계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말한다.

실제로 측정이라는 방법을 사용함에 따라 과학은 우주 사물을 이해하는 데 거대한 진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측정은 과학적인 우상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과학자들은 회의주의뿐만이 아니라 측정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거부해버리는 태도를 기르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자들에게서 그들의 성숙도를 재는 지표는, 과학도 어떤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독단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느냐 하는데 있다.

신경증은 왜 생기는 걸까. 유전적인 문제? 환경에 거슬러서 사는 반작용? 아니, 용의자를 물질세계에서 찾지 않는다. 마음과 의지에서 찾는다. 그리고 신경증을 이겨내는 힘과, 자기의 정신건강을 고민하고 정신과의사를 찾아오는 용기, 발전하려는 의지는 ‘사랑’이라 한다. 종족번식을 위한 호르몬의 농간-이라 정의되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발전시키고 확장시킬 수 있는 의지로서의 ‘사랑’이라고. 그렇게 분석하고 해부하는 세계 바깥에 나왔나 했더니. 사랑을 두고, 사랑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지, 하나씩 내려놓고 꼼꼼하게 살핀다. 사랑에 빠지면 왠지 그냥 다 될 것 같단 믿음, 노력보다는 운명에 따르는 사랑, 모두 다 사랑할 수 있을 거란 착각들을 쫓아 하나하나 벗겨낸다.

진정한 사랑은 자아의 확장을 포함하기 때문에 거대한 양의 에너지가 요구된다. 그러나 좋든 싫든 우리가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는 양은 하루 24시간에 비례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일, 누군가에게 집중하는 일은) 때로는 지루하고 하찮은 일이며 매번 너무 힘든 일이다.

친구네 강독이야기를 들었을 때, 화기애애하게 둘러앉은 가족들이 함께 책 읽고 서로 생각을 나누는 아리따운 모습만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강독은 노력과 의지의 시간이었다 한다. 날마다 함께하려면 피곤한 날도, 귀찮은 날도, 재미없는 날도 있으니까. 힘들다 재미없다 노력필요하다……. 그런 것들만 실컷 강조해주시다니. 하나하나 분석하는 앞에 방어기제가 돋기도 했다. 난 내가 사랑에 대한 환상 -첫눈에 반하는 사랑, 운명이 어쩌구저쩌구- 같은 거 안가지고 있다 생각했는데. 파스텔톤과 샤랄라함이 막 벗겨지니까, 멈춰 세우고픈 맘이 들었다. 환상 좀 있으면 어때서. 적당한 환상은 즐거움을 줄 수 있잖아? 환상들을 다 구분하고 분석해서 없애버리면, 물기 쪽쪽 빠지고 퍽퍽해지는 것 아닐까? 감성은 날아가고 시선만 냉랭해져서, 영화를 볼 때 감동받지 못하고, 팔짱 끼고 콧방귀를 뀌면서 ‘저건 사랑이 아냐.’ 같은 비평이나 하게 되진 않을까? 그래도 재밌어서 그냥 다 읽었다. 그리고 우려와는 반대로 됐다. 이 분석들을 읽고나서, 영화나 책이나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어졌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랑들도 눈에 쏙 들어오고, [낯선 땅 이방인] 같은 책은 다시 이해하게 됐다.

읽으면서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내가 어떻게 해왔는지 다시 돌아보게 된다. 사랑하고 집중하고 살자 (또 한번) 마음먹었다. 다른 이가 쓴 책을 읽어서 아는 것과, 삶을 살아서 내 것이 되는 데는 커다란 거리가 있지만. 최소한 책을 읽는 동안은 사랑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게 되는 ‘약발’이 있다. 거기다 이 책은 두꺼워서 시간지속이 좀 된다. 뒤로 후속편이 둘이나 더 나온 것도 누군가가 약발을 필요로 했기 때문일까?

응답 1개

  1. 백수광부말하길

    자기를 발전시키고 확장시킬 수 있는 의지로서의 사랑이라는 말이 재미있어요. 사랑을 하면 자기 생각들이 많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자기의 발전과 연관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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