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네팔 강아지와 군자에게 – 새 학년이 되는 이들에게 남기는 쪽지

- 오항녕

이게 뭐 특별한 편지는 아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대개 하는 말이다. 가끔 내가 죽을 때 할 수 있는 말을 떠올려보곤 하는데, 사실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이 얘기는 그렇게 떠올랐다 사라졌거나 아직 사라지지 않는 그런 말 중의 하나이다. 마침 첫째가 대학에 들어가고, 둘째도 귀한 경험을 하고 맡는 신학기기에 시의성이 있을 듯하여 몇 자 적어보는 것이다. 이 글을 쓰려고 내 일기장을 불러다놓고 이 사람들 이름을 검색해보니, 숱한 일들이 떠올라 시간을 잡아먹었다. 청소, 여행, 나들이, 게임, 싸움, 제사, 성적, 웃음, 야단 … . 이걸 다 쓰려다간 한이 없을 듯해서, 지금 얘기 몇 가지만 해볼까 한다.

1. 먼저 ‘네팔 강아지’ 첫째에게.

– 고모 말에 따르면, 인도 강아지들은 길에 누워있다가도 차가 오면 피하는데, 네팔 강아지들은 마냥 누워있다고 했다. 그래서 너의 닉이 ‘네팔 강아지’가 되었지. 이제 너도 나이가 차서, 네팔 ‘강아지’라고는 계속 부르지 못할 터.

– 루쉰(魯迅)의 〈연〉(일월서각 노신전집Ⅱ)이 떠오르는 일. 루쉰은 동생의 연을 부수기까지 세세한 정황을 다 기억하고 있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네가 고집 때문에 조금 이기적이다 싶은 말을 했겠지. 근데 내가 거기다 대고, ‘너 같은 녀석은 공부 잘하지 마!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폐나 끼치고, 못살게 굴기나 할 테니!’라고 했다. 독한 말이다. 애비가 자식에게 하기 힘든 말. 아무튼, 그때 나를 바라보던 슬픈 눈을 잊을 수가 없다. 네가 정말 슬플 때 눈빛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전, 네 고모가 왔을 때, 내가 그때 얘기를 했지. 마음에 못내 걸렸다고. 그러자 너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지. ‘그런 일이 있었나요?’ 루쉰은 이걸 복수라고 했다.

– 슬픈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한 가지 더. 내 외사촌 형이 죽었을 때, 자네가 세 살이나 되었나? 장례를 치르러 갈 때 너를 데리고 갔었다. 아침에 우는 소리에 잠을 깼더니, 이모할머니가 너를 달래고 있었지. ‘속상해서 울었어? 광우와 윤정이가 싸워서?’ 그때 너는 이모할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 슬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 뒤 언젠가 신항수 아저씨가 왈, ‘저래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사나….’라고 했었지. 며칠 전에 항수 아저씨 만났는데, 필성이 잘 지내느냐고 묻더라. 그래도 슬퍼하는 마음은 소중한 거다.

– 그 작은 토끼. 그 토끼가 우리집에 온 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마당에 풀어놓았는데, 오후에 네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거지. 고양이가 물고 갔을 가능성이 가장 큰데, 어쨌거나 찾을 수가 없었던 거고. 그때도 그 슬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 내가 학위준비를 하던 한 2년, 가능하면 집에서 공부하던 버릇 때문에 너와 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막 말을 시작하고 총총거리며 잘 걷던 너와 청량산을 오르는 시간은 무척 행복했다. 그때 너는 ‘지구가 아프다.’며 올라가는 산길에 쓰레기를 비닐봉지에 담았다. 작은 몸 때문에 어른들이 치우지 못하는 곳까지 치우면서. 그러던 네가 청소하길 싫어하기 시작한 건 왜일까? 요즘은 그래도 나아지는 기미가 있지만.

– 그 무렵 얘기 하나 더. 그때도 언제나처럼 청량산에 가려고 너를 뒷좌석에 태우고 가던 중이었다. 문득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더니, “아빠, 세상은 참 힘든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많은 부모가 착각하듯이, 나 역시 우리 애가 부처님의 환생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란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말이 내 기억에 남아 마치 화두처럼 ‘힘든 삶’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주었으니, 부처님이 아니라고도 할 수는 없을 듯하다. 하긴 모든 곳에 계시니 부처님이겠지.

– 청량산에 갈 때, 집을 나서 용현동사거리를 지나기 전에 너는 잠이 들곤 했다. 안전벨트를 매고, 뒷좌석에서 고개를 한쪽에 떨구고 잠이 들어 있었다. 어찌 그리 잘 자는지. 지난 1월, 대학 논술고사를 보러 갈 때도 너는 집을 나서 문학IC를 벗어나기 전부터 졸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데마쥬, 아니 재현. 그나저나 사람은 참 변하기 어렵다, 그렇지?

– 그나저나 청소년 케포이를 가지 않겠다고 한 뒤, 그래도 니체는 읽고 싶다며 《니체의 위험한 책》을 거론하기에 내가 선물로 주었는데, 아직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조만간 읽고 씨앗문장이라도 적어놓기 바란다.

– 네가 인간의 몸과 생명을 탐구하는 분야로 전공을 정한 일이야 너의 선택이니까 내가 더 부언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우주의 생명, 적어도 지구의 생명이라는 지평에서 이해해야할 것이다. 수유너머구로에서 공부했던 굴드-도킨스 세미나 커리큘럼과 《꿈꾸는 기계의 진화》 등 몇 권을 추천하니 대학 졸업 전에 읽어놓는 게 좋을 거다.

– 일단 사교육 없이 대학엘 들어간 건 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두 달 처음 요즘 입시를 지켜본 결과, 복잡하게 만들려고 애써도 못 만들 정도로 복잡하다는 것과, 법이 그렇듯이 복잡할수록 사교육은 강제되기 마련이고 강제되면 될수록 특정 계급이 입시에 유리할 것이라는 것이 명확했다. 결국 너마저도 마지막 두 달은 사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 그 사교육비를 대는 이 땅의 학부모들이 더 놀라웠다. 그러고도 너와 인연이 있을 뻔했던 한 대학은 ‘정상적인 학교수업만 받으면 풀 수 있는 문제 운운’하며 늘 치던 그 사기를 또 치고 있었다. 네가 빠져나왔다고 덫이 없어진 게 아니다.

– 너의 사주에 고집이 가득차서 대운이 바뀌는 23살까지 더욱 다른 사람들의 말을 신중히 듣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요즘은 생각보다 마음이 넉넉해진 듯해서 보기 좋더라.

2. 다음엔 ‘군자’ 둘째에게

– 그나저나 온지당(溫知堂)에서 태워먹은 이불은 변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불 때는 일은 재미있다. 나 역시 어려서 여물이든, 군불이든 불 때는 일은 좋아서 했으니까. 해본 적이 없는 네가 온지당 아궁이에 불을 땔 때 모습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신났겠지? 아무리 장작을 땐다 해도 구들이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방이 타지 않는 법인데, 어지간히 쑤셔넣었나 보다. 이불을 세 채나 태운 걸 보면 말이다. 네 살을 태우지 않은 게 다행이지.

–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하루종일 이어지는 자습과 강의를 견뎌낸 게 대견하다. 계룡산 수통골이 공부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고. 대전청사에 내려와서 며칠 같이 있을 때도 너는 유성도서관에서 하루종일 혼자 책을 뒤적이며 놀았으니까 몸에 훈련이 되어 있는 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심 쫓겨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럭저럭 잘 지냈나보다. 물론 형이나 누나들이 챙겨주었을 거고. 아당 선생님도 제법 따라온다고 하더구나.

– 《맹자》 구절을 외우며 스스로 뿌듯해하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온지당에 있다가 설날 휴가를 나오자마자 게임과 인터넷에 다시 적응하는 걸 보고, 내가 그랬지? ‘저 놈이 보약 먹고 와서는 마약 먹는다.’ 습(習)을 깨는 데 66일 이상이 걸린다. 이런 거는 ‘자포(自暴)’는 아니지만, ‘자기(自棄)’에 가깝다.

– 《소학》을 배우는 자세가 훌륭하다. 온지당에 다녀온 효과가 있었다. 한자 몇 자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글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한데, 그게 몸에 조금은 익은 듯하다. 내가 늘 말하지만, 너에게는 군자(君子)의 풍모가 있다. 귀찮고 힘든 일도 기쁜 마음으로 하는 덕성이 있다. 그러나 격물(格物)이 없으면 경륜(經綸)이 없고, 경륜이 없는 군자는 이미 군자가 아니다.

3. 둘 다에게

– 그제 너희들 엄마가 목걸이를 풀어달라고 했다. 가느다란 사슬이 한 번 말렸나보다. 너희들에게 부탁했더니, 둘 다 ‘이건 못 풀어!’라면서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고 하던데, 사실이겠지. 평소 너희들의 태도로 미루어. 그런데 사슬은 실과는 달라서 풀기 어렵게 엉키기가 어렵다. 엉키려면 서로 엉키는 데가 구분이 가지 않아야 하는데, 사슬은 쇠라서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핀 두 개로 살살 당겼더니 금방 풀어졌다. 제발 생각 좀 하고 살아라.

– 물론 너희들의 태도 배후에는 엄마에게는 적당히 해도 된다는 같잖은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런데 오해하지 마라. 가족에서 중심은 여자고 엄마다. 동물의 왕국이나 인간 세상에서나 수컷은 별로 새끼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 어떤 수컷은 심지어 새끼를 먹어치우기도 한다. 통상 수컷 없이 생식은 불가능하지만, 수컷 없이 가족은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 너희들은 애를 낳을 수 없다. 여친을 사귀든 동거(또는 혼인)를 하든 잊지 말아라. 이건 진실이다.

– 며칠 전 민법이 바뀌어 20세에서 19세로 성인연령이 낮아진다고 하더라. ‘발육이 조숙하고 운운’ 해서 그런다고 하는데, 이거 다 헛소리다. 늘 말하지만, 이도령과 춘향이는 너희들 나이에 환상적인 러브스토리를 엮었다. 그럼 그때는 훨씬 더 조숙했었네? 잊지 마라. 너희들은 사랑하기에 충분한 나이다.

– 사랑에 관한 자신들의 판단을 믿어라. 내가 듣기에 제일 웃기는 말이, 서로 필이 꽂힌 고등학생들이 ‘지금은 공부해야 할 때이니 대학 가서 만나자.’는 말이다. 그럼 대학 가서는 취직 공부해야 하니까 취직하고 만나고? 고등학교 때 안 생긴 자율성이 대학가면 절로 생기나? 군대 가서는 제대해야 하니까 제대해서 만나고? 그런 거 없다! 찾아올 때 사랑하는 거다! 그래서 같이 살고 싶으면 살고! 다만 자식을 키우기 어려운 세상이니, 피임에는 유의하는 게 좋겠다.

– 자위는 별로 좋지 않다. 양(陽)은 음(陰)을 만나서 발현되어야 중화(中和. 건강)가 된다. 그런데 자위는 양이 음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타는 형세이기 때문에, 기력을 떨어뜨린다. 그럴 때는 운동을 하거나 공부를 해서 허화(虛火)를 내리는 게 좋다. 운동은 요가를 권한다.

– 《논어》에, ‘훌륭한 분을 보면,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고 싶은 마음을 바꾸고 배워라.[賢賢易色]’라고 했다. 공자는 배우는 일에 관해서는 남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그런 분이 이렇게 얘기하셨을 때는 여자친구를 만나는 기쁨이 그만큼 큰 기쁨이라는 거다. 그 기쁨을 온전히 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마음씀씀이는 물론, 함께 공부하는 것도 키스도 배워야 하고, 잠자리도 배워야 한다. 모든 배움에도 그렇듯이 그 배움에도 지행(知行)이 합일(合一)해야 한다. 원한다면 이론 교육은 해줄 수 있다. 실습은 알아서 하고.

– 이른 나이에 참선(參禪)을 배우는 게 좋다. 나는 참선을 늦게 배웠고, 그나마 게을러서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하는데, 5분, 10분이라도 하면 인간이 달라진다. 참선이 어려우면 108배를 먼저 해보도록 권하고 싶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수행한 방법에는 지혜가 있기 마련이다. 길상사 템플스테이도 권하고 싶다. 하루 다녀오면 적어도 보름은 부처님 같은 마음이 된다. 물론 절을 바르게 하는 것부터 배워야한다.

– 인간의 크기는 답을 잘 내는 걸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질문을 안고 가는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스님들의 화두도 그러한 것이리라. 그러니 화두를 안고 가는 힘을 길러라. 인생에서 던져야할 질문을 안고 가는 힘을 길러라.

– 담배는 아예 배우지도 마라.

– 너희들의 인생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싶은 하루하루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 나는 너희들을 낳고 싶어서 낳은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너희들도 나를 아비로 선택할래서 한 게 아니다. 인연이 그렇게 된 것이지. 그런데 죽기 전에 너희들에게 할 말을 생각하던 중, 이런 말이 생각났었다. ‘내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맙고, 즐거웠다.’ 일단 지금까지는 그렇다.

응답 4개

  1. 은유말하길

    수첩 꺼내 문장 몇 개 받아적었습니다. 새학년이 되는 아들에게 읽어주려고요. 아들이 어제오늘 오티를 다녀왔어요. 새벽까지 담소나누다가 기합받았다길래 괜히 가슴이 덜컥해서 이런저런 얘기 -결국은 잔소리-했더니 아들이 중간에 껴들더군요. “엄마, 저 TV볼래요.” “왜?” “웃고싶어요.” 그 때가 시트콤할 시간이었거든요. ㅎㅎ 아들이 고등학교 가면 저도 고등한 엄마가 되어야겠구나 생각했죠. 3년 동안 묵언수행 하려고요 ^^

    • 여하말하길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감정, 두 가지 웃기는 게 있습니다. 첫째, 왠지 지 자식이 나보다 잘난 것같은 착각. 많은 부모가 지 수준은 생각하지 않고 천재가 나오리라고 생각하지요.^^ 둘째, 왠지 자식이 저보다 못날 것같은 불안감. 자식 인생은 그 인생대로 간다는 건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래저래 잔소리가 늘어나지요. 그런데 그것도 부모 몫입니다. ^^

  2. cman말하길

    따뜻함과 경계가 조화로운 아름다운 글입니다. 아들이나 딸들이 보아도 좋고 남들이 읽어도 좋습니다. 대개의 아비들이 바라는 바를 아름답게 정리하셨습니다. 저의 아이들에게도 들려주겠습니다. 앞으로도 게으른 아비들을 위하여 좋은 경계의 글 기대합니다.

    • 여하말하길

      ‘아비’신가 봅니다.^^ 실은 전철에서 버스에서 늘 마주치는 ‘많은 아비’들에게 누군가 위로해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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