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선곡표

음악, 그냥 듣기

- 신현주(수유너머N)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해서 학교에서 단체로 처음 갔던 연주회를 아주 선명히 기억한다. 유명 피아니스트와 관현악단이 함께하는 연주였다. 하지만, 난 연주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르륵 잠이 들었다. 꾸벅꾸벅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힘겹게 음악 감상을 끝내고 밀려오는 민망함에 그리고 놀려대는 친구들의 시선에··· 정말 많이 부끄러웠다. 그러고 시간이 흘러 2년 후 봄 소풍 겸 음악회를 가게 되었다. 그 음악회는 또 다른 유명 피아니스트와 관현악단이 함께하는 연주였고, 2년 전과 같은 곡을 들었다. 하지만, 이때에는 졸지 않고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음악에 홀딱 몰입해서 연주되던 40여 분 내내 거의 한순간도 한 눈 팔지 않고 완전히 빠져들어 음악을 감상했다. 음악을 온몸으로 듣고 느껴서 몸 어느 한구석에 그 곡이 저장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 두 번의 음악 감상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경험이다. 이때 들었던 음악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이다.

고1 때는 피아니스트 김대진(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연주였고, 고3 때는 피아니스트 김정원(경희대학교 교수)의 연주였다. 두 사람 모두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는 피아니스트이다.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는 러시아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20세기 작곡가임에도 아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다. 피아노 협주곡(독주악기와 관현악단의 연주) 중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의 서정적인 선율과 러시아 작곡가 특유의 폭넓은 음역과 음색을 담은 곡이다. 이 곡은 영화 ‘밀회’, ‘호로비츠를 위하여’, ‘노다메 칸타빌레’ 등에 삽입되면서 클래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음 직한 곡이다. 1악장은 낮은 음역에서 시작하는 어두운 피아노 화음이 멀리서 가까워지는 듯한 점점 커지는 서주로 시작한다. 그 후에 관현악단이 주선율을 연주하고 피아노가 첫 음에 힘을 주어서 아르페지오를 연주하여 긴장감을 준다. 이 부분만을 들어도 ‘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 싶을 거다. 이 뒤에는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의 기교가 듬뿍 담겨서 음악이 전개된다. 그냥 들어보라. 앞의 서주에서 충분히 화성을 느끼고, 그 후에 등장하는 선율을 듣다 보면 곡을 무난히 잘 따라갈 수 있다.

I. Moderato-Allegro

2악장은 반음계적인 짧은 서주 후에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애수 어린 선율이 등장한다. 피아노는 셋잇단음표의 반주를 하고 목관악기가 선율을 연주한다. 그 후에 관현악단이 반주하고 주선율을 피아노가 받아 연주한다. 잘 들어보자.

II. Adagio Sostenuto

이 선율 어디선가 들었다. 분명히···.

브리짓 존스의 일기(Bridget Jones’s Diary, 2001) – 르네 젤위거(Rene’e Zellweger)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첫 장면에 여주인공이 외로움에 젖어 ‘All by myself’를 립싱크로 열창한다. 이 노래는 에릭 카멘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의 주선율을 빌려 와 작곡하였다. 영화 속에서는 잔잔하고 슬픈 선율에 그 속에 있는 여주인공의 처절함까지 잘 표현해 명장면 꼽힌다.

All By Myself – Jamie O’Neal

음악을 듣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우리가 음악을 듣는 것은 습관이고 학습된 것이다. 그래서 음악을 들을 때 감각적으로 듣다 보면 비슷한 음악만을 찾게 된다. 듣기에 편한 음악만을 찾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엔 많은 종류의 음악이 있고 각 음악이 전해주는 특수한 감성이 있다. 이 감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각 음악을 듣기 위한 학습이 필요하다. 글 처음에 이야기했던 내 경험은 학습된, 습관 들여진 음악 감상을 체험한 이야기다. 예고에 들어가기 전에는 사실 듣고 싶은 음악만 골라 들었다. 소위 클래식이라고 말하는 음악은 듣지 않고 가요도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 딱 둘의 음악과 아이돌 음악만을 들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2년 동안 반복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접하다 보니 클래식 음악 어법을 자연스레 체득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모든 게 새롭고 많은 공부를 한듯했지만 지금 뒤돌아보면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연주하는 음악의 레퍼토리(대학 입시를 위한 음악)는 한정되어 있다. 악기 별로 3곡에서 5곡 정도의 곡들을 반복해서 들으며 클래식 음악을 학습한 것이다.

어떤 음악이든 무조건 들어야한다. 많이 들어야 한다. 반복적으로 들어야 한다. 그렇게 그 음악의 흐름을 익혀야 한다. 음악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계속 듣다보면 친숙해진다. 친숙해지면 비슷한 음악을 듣고 싶어지고 그렇게 이전과 다른 감성의 음악을 듣는 습관이 생긴다.

매일 비슷한 음악만을 듣다가 어느 날은 아무 음악도 듣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그런 날 이제껏 듣지 않았던 음악을 골라 ‘무조건’ 들어보자. 가능하면 앨범 전체를 한 트랙도 넘기지 말고 쭈욱 듣자. 클래식에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으면··· 귀에 쏙쏙! 가슴에 콕콕! 박히는 선율과 가슴 울렁대게 하는 화성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추천한다. 클래식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접근하기 쉬운 음악이다. 생각하지 말고 우선 그냥 듣자.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