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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도설 – 생명으로 가득찬 우주

- 기픈옹달(수유너머 R)

“하늘천 따지, 검을 현 누를 황 … ”

갑자기 웬 천자문이냐고?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 천자문의 첫 구절에 심오한 뜻이 숨어져 있기 때문이다. 뜻을 빼놓고 한자만 적어보면 이렇다. ‘천지현황天地玄黃’ 이것을 풀이하면 ‘하늘을 검고 땅은 누렇다’는 뜻이다. 혹시 그다음 구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혹시 이렇게 대답하지는 않겠지? ‘가마솥엔 누룽지, 박박 긁어서…’ 다음 구절은 이렇다. ‘집우 집주, 넓을 홍 거칠 황’. ‘우주홍황宇宙洪荒’, ‘우주는 넓고 거칠다’는 뜻이다. 천지와 우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다니. 잘 살펴보면 단순히 글자를 익히는 책인 줄 알았던 천자문이 결코 만만한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천지와 우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천자문. 근사록의 첫 글은 태극太極의 문제를 다룬다.

‘우주宇宙’라는 단어를 뜯어보자. 먼저 ‘우宇’란 공간을 뜻하며 ‘주宙’란 시간을 의미한다. 즉, 우주란 시공간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사실. 옛사람이라고 무시하지 말 것. 근대 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우주, 시공간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송대의 육구연(1139~1193)이라는 사람은 ‘우주가 바로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곧 우주이다(宇宙便是吾心 吾心卽是宇宙)’라고 했을 정도다. 어떤가, 멋지지 않은가?

우주, 이 세계는 과연 어떻게 생겨났을까? 근대 과학은 다양한 이론을 빌려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옛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아무 생각없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 그들도 나름대로 세계의 원리를 당대의 언어로 설명하려 했다. 오늘 살펴볼 «태극도설太極圖說»은 그 대표적인 글이다. 이글은 우주, 곧 이 세계의 탄생과 생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과연 어떤 글일까. 일단 «태극도설»의 일부를 인용해본다.

염계 선생(주돈이)이 말했다.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태극이 움직여 양陽을 낳고 움직임이 극한에 이르면 고요해진다. 태극이 고요해지면 음陰을 낳고 고요함이 극한에 이르면 다시 움직인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번갈아 일어나 서로 뿌리가되니 양의兩儀, 곧 음과 양이 세워진다.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의 오행五行이 생겨난다. 이 다섯가지 기운(오행)이 순조롭게 펼쳐지면 네 계절이 운행한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며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고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이 생겨나면 각기 그 본성을 하나씩 갖는다.
무극의 진정함과 음양오향의 정밀함이 신묘하게 합하여 모이니 건도乾道는 남성을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성을 이룬다.
두 기운이 교감하면 변화하여 만물을 낳는다. 만물이 낳고 낳아 변화가 끝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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濂溪先生曰
無極而太極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
一動一靜 互爲其根 分陰分陽 兩儀立焉
陽變陰合而生水火木金土 五氣順布 四時行焉
五行一陰陽也 陰陽一太極也 太極本無極也
五行之生也 各一其性
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 乾道成男 坤道成女
二氣交感化生萬物 萬物生生 而變化無窮焉

도대체 무슨이야기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이 글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본래 어떤 그림을 설명하기 위해 쓰인 글이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태극도»라는 그림이다. «태극도»에 대한 설명이라는 뜻에서 글 이름을 «태극도설»라 붙였다. 다시 이 «태극도»를 풀이하면 ‘태극에 대한 그림’이라는 뜻이 된다. 사실 태극에 대한 그림은 수 없이 많다. 하다못해 우리에게 익숙한 ‘태극기’ 조차도 일종의 태극도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태극은 본래 «주역: 계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계사전의 내용에 따르면 태극에서 음양이 나오고, 여기서 사상四象이, 그다음에 팔괘八卦가 나온다. 여덟 개의 괘, 팔괘를 둘로 포개어 만든 것이 육십사괘니 태극이란 주역의 원리가 출발하는 최초의 시작점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태극기에서도 음과 양이 서로 어우러진 태극이 중간에 있고, 사상四象을 의미하는 건乾, 곤坤, 감坎, 리離, 네 괘를 그려놓았다. 태극기에 주역의 원리가 그려져 있는 셈.

규격은 필요 없다. 명칭만 참고하자. «주역: 계사전»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역易에는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 음/양)를 낳고, 양의는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은 팔괘八卦를 낳는다.'(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

«계사전»에 따르면 태극에서 시작해서 궁극적으로 팔괘가 나온다. 반면 이 «태극도설»에 따르면 태극에서 시작해서 음양, 오행이 나오고 궁극적으로는 만물이 나온다. 즉,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 태극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다. 내용은 비슷하나 «주역»의 이론을 «태극도설»이 더 구체화했다고 할 수 있다.

자, 그럼 태극이 무엇이냐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예컨대 우주가 유일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창세기»에서도 만물이 생겨나기 이전 거기에는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공동번역)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여기 «태극도설»에서는 태극과 더불어 무극無極을 이야기한다. 세상에… 태극도 모르겠는데 무극이라니! 이해를 돕기 위해 윙칫찬의 영어번역을 보자. 윙칫찬은 태극을 Greate Ultimate로, 무극을 Nonbeing Ultimate로 번역해 놓았다. 무극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무無’라는 글자이다. Nonbeing. 그러니까 만물이 생겨나기 이전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에는 태극조차 없다. 태극에서 만물이 나온다는 것을 잘못 이해하면 서구의 유신론적 창조론, 그러니까 누군가로부터 만물이 생겨난다고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그것이 인격적인 신이 아니더라고 하더라도 만물 이전에 그 무엇이 있다는 사유를 성리학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빌려 온 말이 바로 무극이다. (무극이라는 개념은 본래 «장자»에서 최초로 나온다)

따라서 태극이란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어떤 형체나 움직임으로 포착할 수 없는 이치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자, 이 태극이 움직이면(動) 양陽이 되고 고요해지면(靜) 음陰이 생겨난다. 이 태극의 운동과 멈춤(動靜)에서 음양이 나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둘, 음과 양은 서로 따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양을 낳는 움직임이 극한에 이르러 음이 생겨나고, 음을 낳는 고요함이 극한에 이르러 다시 양이 생겨난다. 그래서 «태극도설»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서로 뿌리가 된다고.

太極圖. 본래 태극도는 서로 꼬리를 무는 물고기 모양을 형상화 한 것이다. 왼쪽 그림에서 음이 양 속에, 양이 음 속에 있는 것에 주목할 것. 서로 뿌리가 된다는 의미가 이것이다. 그래서 오른쪽 고양이들이 엉켜있는 것처럼 음양은 항상 이렇게 함께 엉켜있다.

이 음양의 변화 속에서 오행, 수.화.목.금.토가 나온다. 다시 이 다섯가지 기운으로 네 계절로 대표되는 끝없는 생명의 순환이 생겨난다. 봄에는 만물이 생겨나고, 여름에는 자란다. 가을은 결실이 맺히며, 겨울에는 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성리학자들은 이처럼 생장소멸生長消滅이 정확히 반복되는 네 계절의 변화야 말로 한결같은 우주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좋은 예라고 생각했다. 생명의 끝없는 생성. 그러나 이것이 지루한 반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변화가 끝이 없다고 말했다.

무극-태극으로부터 이 무한한 생성의 순환까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무극-태극 → 양의(음/양) → 오행(수, 화, 목, 금, 토) → 사시 → 건/곤 & 만물. 그러나 이 과정을 시간적 흐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즉, 무극-태극이 가장 먼저 있었고 그다음에 순서대로 음양, 오행이 나오고 나중에 만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무극-태극이 그런 것처럼 음양이나 오행은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두고 음이나 양, 혹은 오행 가운데 한 가지를 들어 말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설사 태양이 밝게 비치고 있는 가운데도 음의 요소가 언제나 있다. 마찬가지로 흙이라고 하더라도 그 흙에는 오롯이 오행의 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는 무극-태극은 물론 음양, 오행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며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고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요약하면 오행-음양-태극-무극은 본래 하나라는 뜻이다. 설명을 위해 이들을 구분해 놓았지만 실제 만물들이 충만한 세계 가운데 이들은 구별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한 측면을 가리켜 음양이나 오행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만물을 설명하기 위해 빌린 도구일 뿐 이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태극도설»에서는 이 우주의 생성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태극도설»에서 말하는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미 이 우주는 만물이 낳고 낳아 끝없는(生生不息) 생명으로 충만한 상태라는 점이다. 다만 우리는 이 우주의 현 모습을 보며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퇴계의 «성학십도»에 실린 태극도, «성학십도»는 유가의 핵심을 열 가지 그림으로 나타낸 것인데 그중 첫번째가 바로 태극도이다. 좌우에 기록해 놓은 설명은 «태극도설»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둔 것이다.

자, 이런 질문이 튀어나올 때가 되었다. 도대체 이것이 삶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는 ‘근사近思’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사실 이에 대한 대답은 분량상 미처 인용해놓지 못한 뒷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태극도설»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사람만이 뛰어난 능력을 얻어 가장 신령하다.(惟人也 得其秀而最靈) 그러면서 인간 가운데 가장 빼어난 성인이야말로 무극-태극에서 만물에 이르는 이 법칙을 체화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근사近思의 공부란 매번 닥치는 수 많은 일에 일일이 정답을 찾는, 그런 번잡한 공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잡다한 문제를 꿰뚫고 있는 핵심을 밝히는 공부이다. 이로써 다양한 문제들을 두루 다루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리라. 성인이야말로 «태극도설»에서 말하는 우주의 법칙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다. «근사록»의 저자와 편집자들이 스스로를 도학자道學者라고 칭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도道를 배우는, 또한 도道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이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결코 녹녹치 않다. 쩨쩨한 공부에 그치지 말라는, 도道라는 이 세상의 법칙에 대해서까지 논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응답 2개

  1. 박카스말하길

    태극은 무극이라.. 잘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근사의 공부,
    앞으로 더욱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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