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카페

위험한 프로포즈, <성균관 스캔들>

- 안티고네

우울하고 마음을 못 잡고 헤매던 올해 초, 나는 <성균관 스캔들>을 보기 시작했다. 남장여인이 어찌어찌 하다보니 금녀의 구역인 성균관에 들어가고, 함께 공부하는 동방생과 러브라인을 형성한다는 설정. 드라마에 익숙한 나에게 이 정도 설정이면 이미 왠만한 그림은 다 나온다. 하지만 워낙 뽀얗고 예쁜 -어떤 기자의 표현을 빌자면, ‘페티쉬를 즐기기 좋은’-화면과 알콩달콩 만화같은 스토리에 금새 빠져들고 말았다. 결국 나는 예쁜 배우들에 푹 빠져 신랑과 함께 <성균관 스캔들> 20편을 2박 3일 만에 정주행하는 기염을 토하고 말았다.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지금쯤 뭐가 되도 됐을 것이다, 쩝.

<성균관 스캔들>의 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몸이 아픈 남동생 김윤식을 부양해야 하는 몰락 남인 집안의 소녀 김윤희는 남장을 하고 세책방(다기능(?) 도서대여점)에서 필사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런데 그녀의 집이 동생 병수발 때문에 사채빚을 지게 되고, 윤희는 그 빚을 갚으려고 소과 시험에 대리답안지를 작성하는 사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소과 시험장에서 실수로 대리답안지를 당대 노론 벽파의 영수인 좌의정의 아들 이선준에게 건네는 사고로 그와 엮이게 된다. 한 눈에 김윤희의 재능을 알아본 이선준. 동생의 호패로 남장을 한 김윤희를 남자라고 굳게 믿은 이선준은 ‘아까운 재주였다’며 김윤식(박민영)을 정조가 직접 참관한(친림시!) 복시 시험장에 세우고, 그 둘의 재주에 반한 정조는 이선준과 김윤식에게 성균관 거관수학을 명한다. 남장여인의 몸으로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 김윤식은 동방생인 이선준과 걸오 문재신과 이런 저런 사건을 함께 겪으며 알콩달콩 러브라인을 형성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로맨틱 코메디로 만족하지 않는다. 굳이 정조를 금상으로 설정하고, 정약용을 성균관 박사(선생님)로 설정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노론의 ‘가랑佳郞’ 이선준, 소론의 ‘걸오桀驁’ 문재신, 남인의 ‘대물大物’ 김윤식, 운종가에서 나고 자란 ‘여림女林’ 구용하라는 일명 잘금 4인방은 탕평을 추구하는 정조의 눈에는 재미난 조합이다. 성균관 활쏘기 대회인 대사례와 임금이 직접 시험문제를 내는 순두전강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들 4인방에게 정조는 영조의 유훈이 담긴 ‘금등지사’를 찾으라고 명한다. 각각 다른 정치적 기반을 가진 이들에겐 다소간 벅찬 상황. 하지만 힘을 합쳐 서로 간의 오해도 풀고 금등지사도 찾고, 이선준과 김윤식의 해피엔딩으로 드라마는 끝난다. (어디까지나, 드라마니까요!)

<성균관 스캔들>은 뭔가 심각한 역사나 정치를 병풍으로 친 조선판 칙릿 혹은 로맨틱 코메디이다. 내가 이 드라마를 이렇게 정의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개의 드라마는 러브라인이 달달해지다 못해 속이 미슥거려질 즈음, 정치적 긴장과 외부의 탄압을 통해서 이를 해소한다. 하지만 <성균관 스캔들>은 드물게도 동방생들끼리의-잘금 4인방- 러브라인은 참으로 진지하고 아름다운데,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손발이 오그라들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역사 교과서가 아니다. 하지만 <성균관 스캔들> 20편을 달리는 동안, 어쩌면 이런 류의 정치인식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 너무 쉽게 용인해주는건 아닐까 하는 고민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가 갖는 정치관이 문제다. 개인적으로 <성균관 스캔들>에서 제일 유치한 장면은 정조와 정약용을 그리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정약용이 성균관에서 수업을 하며 유생들을 향해 “새로운 조선을 꿈꾸는 것은 제군들의 의무다”라고 외치는 장면. 이 보다 한 수 높은 오글거림은 정조가 화성천도 지도를 잘금 4인방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화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 곳을 자유로운 상공업과 농업을 보장하고 양반도 노비도 없는 자유로운 기회의 땅으로 만들겠다고 선포하는 장면. 그러면서 정조는 주인공들에게 “나의 꿈을 함께 꾸어 주겠는가”라는 느끼한 대사를 친다.

누군가에게 이런 장면은 매우 ‘감동적’일 수 있다. 성균관은 단순한 대학이 아니다. 이 곳의 학생들은 대과를 치고 조정에 나가 나랏일을 하는 출사를 꿈꾸는 예비 공무원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조국의 새로운 미래를 꿈꾸라는 말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조처럼 화합을 꿈꾸는 지혜로운 왕이 새로운 대동 세상ㆍ자유의 땅을 열겠다는 말을, 드라마에서만큼은 좀 가슴 벅차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하지만 아무리 드라마라도 용납할 수 없는 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우선, 정조에 대한 위험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성균관 스캔들>에서도 자주 강조되는 정조의 탕평은 사색당파 간의 화합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문을 구하고, 또 「조선의 힘」등을 급하게나마 살펴본 결과, 당쟁은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처럼 단순한 패싸움이 아니었다. 예컨대 당쟁의 핵심은 노론과 소론이 싸우는 것이 아니다. 당쟁에서는 ‘청류’라고 불리는 이상파와 현실을 중시하는 ‘탁류’가 그 힘을 겨룬다. 강직한 청류 선비는 자신이 공부한 이론을 가지고 소신껏 왕에게 간언을 올리고, 왕이 그 카드를 받지 않으면 미련없이 관직을 버리고 다시 낙향하거나 서원으로 돌아가곤 했단다. 따라서 이런 대결 구도에서는 아무래도 현실을 고려할 수 밖에 없는 왕과 선비 간에 긴장이 형성되고, 노론 청류는 같은 노론 탁류보다 소론과 입장이 더 가까운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정조가 말한 탕평은 정치에서 청류와 탁류 간의, 각 입장 간의 정치적인 경쟁과 대결을 막고 임금이자 스승인 자기 아래 모든 신하들을 정렬시키는 것에 더 가깝다. 정조가 꿈꾼 탕평이라는 전제정은 무식한 전제정보다 훨씬 더 무섭다. 스스로 백성과 신하들의 임금이자 아버지이자 스승이길 원했던 치밀하고 명석한 왕의 꿈에 자기의 꿈을 쉽게 맡기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에서 성균관 유생들은 스스로 뽑아 세운 장의(학생회장)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스승인 성균관 박사나 대사성은 물론, 금부나 형조 심지어 왕으로부터도 간섭받지 않는 강력한 자치권을 행사한다. 아직 청춘이고 학식이 뛰어난, 누구보다도 청류가 되어야 할 이들이 어째서 탕평이란 이름 아래 자신의 꿈을 왕에게 맡겨야 하는 걸까? 가장 강력한 왕의 견제 세력이 되어야 할 유생들이 어째서 왕의 꿈을 실현하는데 가장 앞장서야 하나?

여기에는 정조에 대한 이중적인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탕평이란 말에 민주적 화합을, 군사(임금=스승)라는 말에 강력한 중앙집권을 동시에 기대하고픈 마음. 현명하면서도 강한 권력자가 나타나 우리를 잘 인도해주길 바라는 어리석은 기대감 말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세상, 자유로운 기회의 땅은 결코 강하고 현명한 왕으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언제 어떻게 그런 세상이 도래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원하는 자가 스스로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 꿈을 함께 꾸어달라’는 권력자의 달콤한 프로포즈는 언제나 위험하다. (사족: 게다 <성균관 스캔들>은 ‘양반도 노비도 없고 사농공상의 귀천도 없는 탕평을 넘어선 대동 세상’이란 정조의 구상이 얼마나 빈약하고 허구적인지 스스로 드러낸다. 화성천도 계획에 결정적으로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영조의 금등지사를 찾은 이가 김윤희 즉, 남장 여인이라는 걸 알자 정조는 스스로 강상을 어지럽힌 패주가 되었다고 크게 분노한다. 왕 스스로가 여자에게 성균관 거관수학을 시키고 밀명을 수행하게 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균관 스캔들>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눈길을 끄는 인물은 이선준의 아버지이자 당대 좌의정으로 나오는 노론벽파의 영수 이정무(김갑수)이다. 아마도 심환지를 모델로 삼은 듯한 이정무는 조선은 왕의 나라가 아니라 사대부의 나라이며, 선비라면 때로는 종묘사직을 위해 임금과는 싸울 수 있어도 민심과는 맞서지 말라고 아들에게 일러준다. 백성의 살림이 나아지면 기뻐하고, 백성의 근심을 함께 근심하라고 말이다. 이런 좌상 이정무의 면모는 노론으로서 유일하게 금난전권을 폐지한 신해통공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는 이게 그나마 이 드라마에서 가장 볼만한 정치의 한 면모를 보여준게 아닐까 싶다 제대로 된 보수 우파라면 정직과 청렴을 생명처럼 여기고, 지배 대상인 백성을 항상 살피고 걱정하며, 때로는 넉넉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실제 드라마 속에서 좌상 이정무는 김윤식(박민영)이 한때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남인 (아마도 ‘청류’) 김승헌의 딸 김윤희임을 알게 되자, 자신이 먼저 그녀를 자기 며느리로 삼고 싶다고 말한다. 여인의 몸으로 감히 금녀의 공간인 성균관에 들어 간 것이나 자기와 정치적 입장이 다른 것에 대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말이다. 아들 이선준이 선택한 그녀의 재능과 배포를 높이 평가하며 인정하는 것, 이것이 넉넉한 보수 우파의 자세다.

참고로 공판을 앞두고 있는 ‘G20 그래피티’에 ‘쥐벽서’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알고보니 <성균관 스캔들>의 영향이었다. 부디 대한민국 법원이 좌상대감처럼 원칙과 관용을 지킬 줄 알길 바랄 뿐이다. 나는 한국이 그렇게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 정도 표현의 자유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포기할 수 없는 내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패러디를, 누군가 알아보고 웃어주길 바랄 뿐이다….)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 해야겠다. 관용과 정치적 올바름은 권력자의 몫이다. 그리고 저항은 민중의 몫이다. 권력자가 그려주는 핑크빛 꿈에 자기 미래를 대입할 수는 없는 법. 그래서는 언제나 지배받고 계몽되어야 할 백성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새로운 세상은 철인왕을 꿈꾸었던 정조에게서나 온실 속의 성균관 유생들에게서 오는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반쪽짜리 인간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반인들, 반촌 사람들의 변화에서 온다고 믿고 싶다. 배움이 향하는 나라의 근본이 바로 그 억압받는 반촌인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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