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레알’ 소름 돋는 심리 호러, <블랙스완>

- 황진미

차이코프스키의 발레극 <백조의 호수>의 줄거리가 뭔지 아는 사람? 사냥에 나선 왕자가 마법에 걸려 백조가 되어버린 오데트와 사랑에 빠지지만, 흑조인 오딜에게 속아서 잘못 청혼하는 바람에 빚어지는 갈등을 그린 통속멜로물이다. 그런데 ‘흑조’라는 게 정말 있냐고? 가끔 논리학에서 반증을 설명하는 예로 등장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없다고 한다. 그럼 백조/흑조 놀음이 대체 뭐냐고? 글쎄…발레극에서 한 사람의 주인공이 백조와 흑조를 1인2역으로 연기한다니 슬슬 감이 오시는가? 백조와 흑조는 의상이나 분위기는 딴판이지만, 왕자가 속을 정도로 닮아야 하기에 1인 2역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백조와 흑조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설정이다. 백조와 흑조를 같이 연기하는 발레리나의 입장에서 보면, 백조와 흑조의 상반된 이미지는 자신의 양면성을 극대화시켜서 뽑아내서 만들어야 하는 것들이며, 이는 분열된 자아에 다름 아니다.

<블랙 스완>은 바로 이점에 착목한다. 백조와 흑조를 같이 연기해야 하는 한 사람의 발레리나. 사실 발레만큼이나 혹독하게 자신의 몸을 닦아세우는 예술분야가 또 있을까? 완벽한 동작을 추구하기 위해, 군살하나 없는 몸매와 기괴하게 변형된 발가락 관절을 감내하며, 자기 몸을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것이 발레이다. 자기 신체와의 싸움은 끔찍할 정도의 자기 인식으로 되돌아온다. 한번이라도 다이어트를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의 의식이 내 몸을 대상화하여 끊임없이 조련할 때, 나의 의식세계는 철저하게 내 몸에 한정된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몸의 어디까지가 나인지를 확인하고 싶어지는 기이한 혼란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블랙 스완>의 니나는 어렸을 때부터 발레리나로 키워진 여성으로, 완벽한 동작을 추구하며 훈련에 매진한다. 그러나 안무가는 그녀가 <백조의 호수> 주인공 역할을 맡기엔 부족하다고 말한다. 백조의 역할에는 어울리지만, 도발적이고 유혹적인 흑조의 역할을 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안무가는 자유분방한 경쟁자 릴리의 섹슈얼리티가 니나에겐 없다고 지적한다. 사실이다. 그녀는 연애를 해본적은커녕 엄마의 말을 거슬려 본적도 없다. 발레리나였던 엄마는 싱글 맘으로 딸을 뒷바라지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녀와 엄마의 관계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모녀의 관계를 연상시킬 만큼 지긋지긋한 유착을 가지고 있다. 그나마 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는 것만 다를 뿐, 혹시 딸이 자신의 몸을 긁어 상처를 내지는 않는지를 철저하게 감시할 정도로 딸의 신체와 시간을 장악하고 있다. 니나는 엄마로 인해 자위조차 마음 놓고 할 수 없다.

안무가는 발레 연기의 섹슈얼리티를 강조하며, 그녀에게 강제로 입을 맞춘다. 그의 행위는 섹슈얼리티를 가르치려는 것과 ‘위계에 의한 성추행’의 경계에 놓여있다. 놀란 그녀가 안무가의 혀를 물어뜯자, 그는 도발적인 면모를 보았다며 그녀를 발탁한다. 그러나 동료들 사이에선 그녀가 안무가에게 섹스를 제공하고 주인공의 자리를 얻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세대교체 당한 선임자는 니나에게 주인공의 자리와 안무가의 애정을 빼앗겼다며 자해한다. 그런데 그러한 의심은 일방적인 모함이 아니다. 니나 역시 다르지 않다. 니나도 릴리가 안무가를 섹스로 유혹하려든다고 보며, 릴리가 자신에게 친한 척 다가와 헤치려고 군다고 의심한다. 선임자와 그녀와 릴리는 하나의 남근적 기표를 사이에 두고 선망하고 의심하는 애증의 쌍생아들이다.

거울 앞의 니나는 여러 개의 자아로 분열되어 보이고, 남들이 자매 같아 보인다는 릴리와 그녀는 도플갱어에 다름 아니다. 그녀는 피부를 긁고, 손톱 발톱의 상처를 통해 자아와 변태적으로 대면하며, 릴리와의 상상적 섹스를 통해 자아분열의 극한을 경험한다. 착란적 상태에서 만류하는 엄마를 뿌리치고 무대에 오른 그녀는 그만 실수를 한다. 분장실에서 자신의 실수를 야유하며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릴리와 혈투를 벌이는 니나의 상들은 거울에 의해 무수한 상으로 분열되며, 서로 목을 조르는 두 사람은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니나는 파괴적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여 깨어진 거울조각으로 릴리를 찔러 죽인다. 이제 그녀는 순수한 백조의 자아를 벗어버리고 마성의 흑조로 탈바꿈한다. 무대에서 완벽한 흑조를 연기하는 그녀의 몸에서 흑조의 깃털이 솟아난다. 이때 관객의 몸에서도 소름이 돋아난다. (레알!) 그녀는 흑조의 깃털을 푸드득 거리며 무대에서 내려와 릴리의 찬사를 듣는다. 뭐라고? 분장실에는 릴리의 시체가 없다. 어찌 된 것일까? 다시 백조가 되어 무대에 오른 니나. 대본에 있는 대로 모든 것을 잃은 표정이 되어 무대 뒤로 투신하는 그녀의 얼굴위로 안도감이 번진다. 그녀의 몸에서는 붉은 피가 번진다.

완벽에의 추구와 살인적인 경쟁, 자신의 몸과 대결하는 자의 분열된 자의식, 끈덕지게 달라붙는 엄마로부터의 분리, 성적 주체성에 목말라하면서도 남근적 섹슈얼리티와 레즈비언적 욕망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여성주체, 자기소멸의 욕망에 이끌리는 강박적 예술가의 파괴적 충동 등 영화는 수많은 정신분석학적 주제들을 한 명의 발레리나에 응축시켜 보여준다. 그녀는 자신의 피부를 긁다가 손 가시를 뜯어내는 것에서 출발하여 착란과 환상을 통해 반인반수의 몸으로 피부경계를 허물어버리고, 마침내 자기 몸 깊숙이 자상을 내어버린다. 자기한계에 직면한 이의 자아분열이나, 이의 대립을 통한 자기 파괴의 충동 등은 어쩌면 이미 많은 영화들에서 다루어져 익숙해진 주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블랙스완>의 탁월한 점은 그러한 주제를 얼마나 관객의 오감에 완벽하게 구현시켜 내었느냐에 있다. 마치 발레극의 줄거리가 특별하지 않아도, 발레극만의 감동이 특별하듯이. <블랙 스완>은 영화라는 장르가 지닌 모든 장점과 표현력을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영화 시작부터 전철의 유리에 비친 릴리를 쫓아가는 니나의 모습, 거울에 비친 니나의 상이 짓는 괴이쩍은 표정들, 키득키득 웃는 듯한 괴팍한 환청들, 푸드덕 푸드덕 조금씩 커지는 깃털소리 등은 시종 관객의 신경다발을 움켜쥔 채, 어디까지가 객관적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주관적 망상인지 끝까지 알아채지 못하게 만들면서, 긴장과 공포를 고조시킨다.

<블랙 스완>의 가치를 논함에 있어서 배우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나탈리 포트만은 전작 <클로저>에서 호연을 펼쳤지만, <레옹>의 마틸다에 고착된 아역의 이미지를 벗을 만큼 강력한 이미지를 각인시키지 못하였다. 이는 마치 백조의 이미지에 갇혀 변신을 갈망하는 니나의 한계와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니나가 무대에서 완전히 흑조로 변신하였듯이, 나탈리 포트만 역시 완벽하게 니나가 됨으로써 백조이자 흑조인, ‘팔색조’로 변신하였다. 사실 발레리나가 아닌 사람이 발레리나의 근육을 갖춘 몸으로 변신하는 것 자체가 사람의 피부 밑에서 깃털을 뽑아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하였으니, 그녀가 흑조로 분장하였을 때 알아보지 못할 만큼 달라 보인다 해도 가히 놀랄 일은 아니다. 과연, 그녀는 ‘퍼펙트’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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