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여치와 떠난 여행

1화 달팽이의 하루

- 배문희

봄이다! 블라인드의 각을 살짝 젖히니 생선회처럼 얇게 저며진 햇살이 켜켜이 날을 세우고 들어온다. 젓가락으로 집어먹고 싶을 만큼 쫄깃쫄깃하고 투명한 햇살이다. 이렇게 좋은 날 집안에 콕 박혀 있는 신세라니. 에휴. 기지개를 켠다.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워 있는데 햇살이 슬금슬금 기어와서 눈꺼풀을 간지럽힌다. 눈을 살짝 뜨니 속눈썹 사이로 햇살이 스민다. 이럴 때 실눈을 뜨고서 속눈썹을 살며시 감았다 뜨면 속눈썹 사이로 무지개가 생긴다. 아싸, 드디어 아침에 할 일이 생겼다! 속눈썹에 무지개를 만드는 것! 나는 속으로 크크 웃으며 열심히 무지개를 만들었다. 열 개쯤 만들었을까. 눈이 따가워서 그만두었다. 이젠 뭘 하고 놀지?

벌써 삼월이다. 아직까지 한번도 바깥에 나가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난해 10월부터 지금까지 나는 쭉 방에만 있었던 것이다. 달팽이처럼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동안 벌써 달력은 해가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람. 블라인드를 닫아버렸다. 그러자 햇살이 사라지고 방 전체가 어둑신해졌다. 다시 잠이 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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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모모! 이 미친년. 너 내 초콜렛 다 먹었지?”

“왜 아침부터 큰 소리들이야? 정말.”

“저 미친년이 냉장고에 넣어둔 내 초콜렛 다 먹었단 말예요. 발렌타인데이 선물로 여친한 테 받은 건데!”

“에휴. 그러게 저 년 안 보이는 데다 숨겨놨어야지.”

방 밖에서 남동생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어 짜증이 알알이 묻어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 다. 나는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휴. 정말 집구석에 미친개를 한 마리 기르는 것 같아. 정말 개 같은 년.”

언니의 목소리.

“왜 이렇게 아침부터 시끄럽냐!”

아빠의 목소리.

“아유 지겨워. 이놈의 집구석. 저 년 때문에 한시도 편할 날이 읎네. 빨리 아침이나 먹어 들!”

엄마의 목소리.

“야! 모모! 밥 쳐 먹어!”

언니의 목소리.

“밥맛 떨어지게 어떻게 쟤랑 같이 밥을 먹어?”

동생의 목소리.

“냅둬. 배 고프면 지가 알아서 겨 나오겠지. 내가 저 년 밥까지 챙겨주게 생겼어?”

엄마의 목소리.

나는 이불 속의 세계로 점점 깊이 들어간다. 이불은 무엇이든 다 덮는다. 엄마도, 아빠도, 언니도, 동생도. 그리고 무섭기만 한 세상도.

한바탕 왁자지껄하던 목소리들이 사라졌다. 가족들이 모두 출근을 하거나 학교에 간 것이다. 나는 일어나 거실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닌데 언제부턴가 아침에 일어나면 냉장고부터 열었다. 냉장고의 냉기를 온 몸으로 받고 서 있다 보면 냉장고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냉장고는 언제나 차갑다. 내 가슴 속은 언제나 뜨거워서 터질 것 같은데. 냉장고 속의 음식들은 결코 부패하지 않는다. 내 뜨거운 가슴 속의 꿈들은 이미 모두 부패해 버렸는데.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텅 빈 식탁에 앉아 꾸역꾸역 밥을 먹기 시작한다. 나의 밥상은 그야말로 ‘생존의 법칙’이다. 언니나 동생은 최소한 된장찌개 하나라도 상에 올라 있어야 숟가락을 드는데 나는 김치쪼가리 하나만 있어도 밥 한그릇을 뚝딱 해치운다. 그나마도 아무것도 없을 땐 맨밥만 먹은 적도 있다. 오동통하고 쫄깃한 밥알이 어찌나 맛나던지. 난 아무래도 인간의 오만가지 욕구 중 식욕만 왕성한가보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음악을 켜고 책장을 쓰읍 훑어봤다. 책이 빼곡히 채워진 책장은 나의 유일한 자랑거리다. 어디 오늘은 동화책을 읽어볼까나? 세계를 빛낸 100명의 위인전 시리즈와 디즈니명작 시리즈, 창작동화 전집을 쭉 훑어보다 ‘잭과 콩나무’를 집어 들었다. 하도 읽어서 책 표지가 너덜너덜하다. 잭이 요술할멈을 만나 콩을 사는 장면 같은 몇몇 장면은 찢어지고 없어 상상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 잭과 콩나무, 시골쥐와 서울쥐, 웃지 않는 공주, 아기돼지 삼형제… 읽다가 지겨워져서 휙 던져놓고 이번엔 생채식건강법이란 책을 집어 들었다. 채소를 불에 익히지 않고 생으로 먹으면 만병이 치유된다고? 책 속에는 암 말기 환자, 희귀병 환자, 얼굴이 사마귀로 뒤덮인 환자들의 체험담이 잔뜩 들어 있었다. 나는 대학노트를 펼쳐놓고 생채식쥬스를 만드는 법을 꼼꼼히 적었다.

팔이 아프도록 다 적고 난 후엔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를 들으면 친한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DJ와 정답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곁을 떠나야할 시간이 온다. 아직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허전한 마음이 든다. 몇 번의 반가운 만남과 몇 번의 아쉬운 헤어짐을 하고 나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간다.

조금 있으면 부모님이 퇴근할 시간이라 부랴부랴 화장실로 가 세수를 하고 오줌을 누고 난 후 다시 방으로 들어 와 죽은 것처럼 납작 누웠다. 낮잠을 너무 잔 탓에 밤에는 거의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을 자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결국 오늘밤도 뜬눈으로 지새워야 할 것 같다.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와 오롯이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존재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 세상에서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것을 자신 있어 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더더군다나 나 같은 한심한 청춘이야 말해서 무엇하리.

눈꺼풀에 달라붙어 있는 잠의 찌꺼기를 어떻게든 끌어내려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동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더듬이를 곧추세웠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신발을 탁탁 터는 사람은 보지 않아도 엄마다. 엄마는 신발을 현관에 대고 탁탁 턴 다음 잰 걸음으로 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가고 있다. 이윽고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쿵쿵 소리가 내 방을 향해 다가온다. 탕탕. 문을 두드리는 소리. 나는 쥐며느리처럼 몸을 동그랗게 웅크렸다.

“야! 문 좀 열어!”

탕탕탕 탕탕탕 탕탕탕 탕탕탕

“에휴. 이 놈의 문을 부숴버리던가 해야지 원. 내일 아침에 친척들이 오기로 했으니까 넌 어디 좀 나가 있다가 친척들 다 돌아가면 들어 와. 알았어? 아유. 그놈의 재수 없는 상판때기 꼴두 보기 싫으니까.”

엄마는 할 말을 다 마친 후 다시 쿵쿵거리는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갔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나의 오래된 눈물들을 저장하고 있는 베개에는 뭐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퀴퀴한 냄새가 난다. 이 베개에 흡수된 눈물들을 다 짜내면 수력발전소 하나를 만들 수 있을 만큼의 눈물이 나올지도 모른다. 이런 쓸데없는 공상이나 하고 있는데 또다시 주방에서는 엄마의 잔소리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어린 애도 아니고 스무살이나 쳐 먹어서 기껏 들어간 대학도 때려치고 부모 속을 썩이네. 에잇. 저 미친년을 어떻게 해.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고. 스무살이면 한창 피어날 꽃같은 나이 아니야. 하여튼 저 년 때문에 온 집안에 재수가 다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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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언제나 강조하는 ‘기껏 들어간 대학’에서 내가 유일하게 배운 수업은 고독이었다. 나는 대학에서의 두 학기 동안 고독의 밥을 먹고 고독의 국물을 마시고 고독의 버스를 타고 고독의 잠을 잤다. 선배들은 언제나 서 푼짜리 철학을 가지고 잘난 체 해댔고 남자애들은 술을 마시면 여자애들의 어깨에 뻔뻔스럽게 손을 올리곤 했다. 교수님이 별 재미도 없는 농담이라는 걸 할 때마다 ‘핫하하’하고 아주 바람직하고 호탕하게 웃는 남자애들도, 코맹맹이 소리로 남자선배들에게 과제를 부탁하거나 밥을 사달라고 하는 여자아이들도 모두 시시하고 지겹게 느껴졌다. 교수들은 열정이 없었고 수업내용은 지루했다. 단 한번도 내 주의를 끌거나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논제들이 없었다. 교수들은 두꺼운 전공책을 들고선 백년 전에 죽은 사람들의 말과 글을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릴 뿐이었다.

나는 수업에 들어가는 대신 도서관에 틀어박혀 오래된 책 냄새를 맡거나 피지도 못하는 담배를 입에 물고 연희동이며 신촌 일대를 닥치는 대로 돌아다녔다. 한 학기가 지났을 때 온통 F로 가득한 성적표가 집으로 날아왔다. 엄마 말대로 스무살이 꽃 같은 나이라면, 아마도 나는 썩은 꽃잎이리라. 그것도 지독하게 썩은 꽃잎.

그해 여름은 유난히 혹독했다. 태양빛은 교정을 소독이라도 하려는 듯 독하게 내려쪼았고 사물들의 윤곽선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나는 종종 현기증을 일으켰고 도서관 뒤편의 그늘진 곳에 앉아 여름 내내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었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다리에서 찾아온다.’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돌아오던 날은 매독 같은 가을이 절정에 이르던 무렵이었다. 길바닥엔 잘린 손바닥 같은 단풍잎들이 가득 떨어져 있었고 무언가 타고 있는 듯한 독한 낙엽냄새가 코를 찔렀다. 조교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퇴서를 받아 들었다. 자퇴를 하겠다고 굳이 학교까지 찾아간 건 누군가 나를 잡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나는 석탄가루처럼 외롭고 쓸쓸했다.

응답 4개

  1. 라이프타임말하길

    괜찮군요. 조금…

  2. 은구슬말하길

    눈물의 수력발전소……흠… 멋진데요.

  3. 말하길

    한 문장 한 문장 쫄깃쫄깃 씹으면서 읽게 되네요. 글맛과 함께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기 궁금해여

  4. 나무말하길

    쫄깃쫄깃하고 투명한 햇살 ㅎㅎ 잼있는 표현이네요
    나도 속눈썹 사이로 무지개를 만들어 봐야지
    모모와 풀여치의 여행 벌써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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