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민주주의의 도래 -지금! 그리고 여기!

- 고병권(수유너머R)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이 민주화의 불길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상당수 언론들이 이번 봉기를 뒤늦은 민주화 투쟁처럼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우리가 80년대 말에 성취한 것을 이제야 그들이 이루는 것처럼 말이지요. 어떤 언론은 이번 시위를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있었던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모두들 민주주의를 단일한 역사트랙에 놓여 있는 허들처럼 생각하는 건가요? 언젠가는 누구나 넘을 수밖에 없는. 하지만 허들은 고사하고 그런 트랙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구중심주의에 발전주의, 역사주의를 잡탕으로 섞은 망상이 아니라면요.

문제는 그런 생각이 현재 거기서 일어난 일을 다른 지역, 가령 서구 사회나 여기 한국 사회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는 겁니다. 수십 년 간 독재 아래 있다가 하필 지금 그런 시위가 일어나는 것이, 중동 지역 사람들의 알 수 없는 인내력이 때마침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일까요? 세계와 무관하게 그 지역 사람들의 시계가 늦게 간 것일까요?

그 뿐이 아닙니다. 민주화를 역사의 한 단계로 바라보면 서구나 한국 사회는 이제 그것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식의 환상까지 품게 되지요. 하지만 2000년대 이후 한두 해 걸러 계속되는 수만 명이 참여한 한국의 시위들은 민주주의와 무관한 것이었을까요? 규모가 작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장애인들이 벌인 2000년대 이후의 시위들은 민주화 이후에 일어났기 때문에, ‘비민주화’ 내지 ‘반민주화’ 시위일까요?

지난 연말 저희 <위클리 수유너머>는 ‘들썩이는 세계’라는 제목으로 영국과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의 시위를 전한 적이 있습니다. 수만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수십만 명의 이민자들이 단속추방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민주주의가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시위들에 중동 지역의 시위들에게 붙인 이름, 즉 ‘민주주의’를 붙이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요?

민주주의란 어떤 단계를 거쳐 도달할 목표도 아니고, 언젠가 통과하게 마련인 단계도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한 체제가 그 한계를 드러내는 곳에서 언제나 문제됩니다. 민주주의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항상 우리에게 도래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현 체제의 실패를 증언하고 고발하는 곳에서 민주주의는 언제나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이번 중동의 민주화 시위는 명백히 중동의 내적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측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번 <위클리 수유너머> ‘들썩이는 세계’ 편을 다루면서도 느꼈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가 좀처럼 안정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금융위기처리 과정에서 각국 정부는 막대한 재정적자를 감수하며 통화를 공급했습니다. 그리스는 물론이고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까지 정부 재정이 부도나는 것 아닌가 하는 공포가 퍼졌습니다. 각 정부는 급격한 재정 긴축 방안을 마련했고 그 일차적 타깃은 가난한 이들에게 제공되는 복지였습니다. 복지혜택은 대폭 축소되었고 임금은 동결되었으며 대학등록금은 인상되었습니다. 금융위기의 해법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공격의 형태를 취한 것입니다(이번 호에 실린 촘스키의 인터뷰를 참고하세요. 노동자들의 임금동결은 30초만 생각해보면 세금 인상과 같습니다. 인플레 등을 고려하면 말이지요. 이는 지난 몇 년간 계속되어 온 부자들의 감세와 좋은 대비를 이룹니다. 아마 연말정산 받아본 분들은 실감할 것도 같네요.^^). 뿐만 아니라 이런 식의 금융위기 해법은 물가인상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도 역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공격 성격을 갖고 있지요. 식료품에서 부동산에 이르기까지 물가가 엄청 올랐습니다.

어째 한국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이번호에 실린 하트와 네그리의 글을 보면 이것이 또한 중동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업자들, 특히 가난하지만 똑똑한 젊은이들, 새로운 삶에 대한 욕구와 역량을 갖춘 이들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는 겁니다(하트와 네그리는 이것이 작년 서구 사회를 흔들었던 시위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고 말합니다). 제 생각에 이번 사태는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가 변형 확산되고 서로에게 전가되면서 약한 고리에서 터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경제 금융위기가 사회적 위기, 삶의 위기로 나타나면서 중동에서 정치적 독재체제가 문제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정치적 독재체제는 중동과 서구, 그리고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똑같은 문제들을 은폐할 수 있습니다. 무바라크와 가다피의 얼굴이 세계 곳곳, 특히 민주화를 이미 달성했다고 믿고 있는 사회의 독재자들 얼굴을 가릴 수 있습니다.

미국의 진보적 독립언론인 ‘데모크라시나우’(www.domocracynow.org)의 진행자인 에이미 굿먼(Amy Goodman)은 ‘봉기: 미들이스트에서 미드웨스트(Uprisings: From the Middle East to the Midwest)’라는 칼럼을 썼는데요(<위클리수유너머>는 ‘데모크라시나우’에 실린 몇 편의 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의 위스컨신에서도 수만 명이 참가한 큰 시위가 일어난 모양입니다(이번호 촘스키 인터뷰를 참고하세요). 최근 공화당 주지사가 당선되자 공화당이 지배하는 주의회가 주지사에게 의료보험을 비롯한 각종 복지제도를 손볼 수 있는 사실상의 전권을 부여하고, 발전설비나 공유지 등 주의 재산을 사기업에게 처분할 수 있게 하며, 공무원 노조 등의 단체협상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법안을 처리한 모양입니다. 민주당은 반대하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저지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세계가 참 많이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지구화라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위기를 빌미로 가난한 이들을 노골적으로 약탈하는 세계 독재자들의 얼굴도 닮아가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얼굴도 닮아갑니다. 제가 중동을 약한 고리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약한 고리가 가장 선진적인 고리일 수도 있습니다. 중동의 민중들은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이미 다양한 형태의 첨단 네트워크 장비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번 촛불 시위에서 그랬듯이 말입니다.

거기서 어떤 가능성들이 싹트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들은 뒤쳐져 민주주의에 이른 사람들이 아니라 앞서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비전을 실험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닐까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공격은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중동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주 중요한 반격이 지금 중동에서 시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민주주의는 영원히 도래합니다. 영원히 도래한다는 것은 특정한 때, 특정한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 중동이 지금 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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